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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의 인물열전(人物列傳)-근대 한국불교의 전개(展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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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의 향기 - 시명 1990년 08월 102호
조선 중기 임진왜란 이후 서산·사명을 비롯한 승군의 활약으로 위로는 왕실로부터 아래로는 일반백성에 이르기까지 다소 신뢰를 회복한 불교계는 청허대사와 부휴대사의 문하에서 조선시대 불교의 대표적인 인재들이 배출되었으니 이제까지 몇 차례로 나누어 살펴보았던 사명과 편양 소요, 정관 벽암 들과 그 뒤를 잇는 여러 학승들과 선승들의 활약은 대체로 선조에서 영 ·정조시대였으며, 시기로는 16세기에서 18세기 후반부까지의 약 200년이 되는 셈이다.
이 200년 동안 불교사에서는 상당한 인물들이 명멸하였고, 살펴본 바대로 여러 저술들이 나타났는가 하면, 특히 화엄교학의 관심은 모든 학승들의 관심이었다.
전호(前號)까지 인물 중심으로 서술하다 보니 살펴보지 못한 승계문제를 다시 검토해 보면, 선조 이후 승계(僧階)제도는 폐지되었으나 승직(僧職)제도가 새로이 생겨나 서산대사는 선교십육종도총섭(禪敎十六宗都總攝)에 임명되었으며, 그 이후 사명대사가 도총섭에 수여되었고, 인조 이후에는 「이조실록(李朝實錄)」을 수장한 강릉 월정사, 무주 적상산성, 강화 전등사, 봉화 각화사 동의 사찰 주지를 총섭이라 하였으며, 그 밖에 임금의 원당(願堂) 사찰, 즉 태조의 제전(祭殿)이 있었던 석왕사, 선희궁(宣禧宮)의 원당이었던 법주사, 예종의 원당이었던 유점사, 대장경이 소장되어 있었던 해인사 등의 원찰주지 또한 총섭이라 불렀다.
또 정조 때에는 밀양에 표충사를 세우고 원장, 도총섭, 도유사(都有司), 도송통 등 4인의 승직을 두었고, 해남 대둔사와 묘향산 수충사(酬忠寺)에는 도총섭만을 두었다. 그 이후 남한산성과 북한산성 등과 위에 든 삼사(三祠)에는 왕실을 위한 기도와 제사를 관장하게 하는 동의 의무승직일 뿐 점차 유명무실(有名無實)하게 되어 승직의 본래적 의미가 상실되었다.
한편 수원 용주사의 주지를 특별히 팔도도승통으로 칭하고 전국 승려의 규율을 바르게 하고 승풍을 진작시키는 역할을 하게 하였으며, 이제까지 별의미 없이 지켜져 오던 총섭은 이판승(理判僧)을 부르는 칭호로, 숭통(僧統)은 사판승(事判增)의 승직명으로 사용하였다.
이러한 전통은 오늘날에도 전하는데 모든 사찰의 업무를 관장하고 종사하는 승려를 사판승이라 하고, 참선·강경(講經)·수행·홍법 등을 전담하는 승려를 이판승이라 부른다.
그리고 임진왜란 이후 사원의 재정(財政)은 대사찰은 비록 억불의 시대였다고는 하나 궁중에서 하사받은 논과 밭이나 양반 귀족들이 헌납한 토지와 재물을 소유하고 다소의 대중을 거느리고 부양하고 살 수 있었으나, 작은 사찰에서는 제사나 의식과 탁발, 불공 등에서 생기는 수입으로 생계를 겨우 꾸려갔다. 또한 임진왜란으로 사찰토지가 많이 황폐하게 되었으므로 새로이 전답을 구입하기 위하여 계(契)가 생겨났는데, 이 제도는 한 사찰 내에 쥐띠해에 태어난 사람부터 뱀띠해에 태어난 사람까지, 그리고 말띠해에 태어난 사람에서 돼지띠해에 태어난 사람까지를 모아 하나의 단체를 만들어 매달 또는 매년 일정한 금액을 내어 그 재산으로 이자를 받아 상당한 액수에 달하면 전답을 구입하여 절에 헌납하는 제도가 곧 갑계(甲게契)인 것이다.
그뿐 아니라 이런 방법으로 염불회 또는 염불계가 만들어졌으며, 대표적인 것으로 만일회(萬日會) 등이 있었는데, 최근까지 그 전통이 내려오고 있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 아래에서 뚜렷한 개혁이나 자력의 기운은 없었지만 사회로부터의 갖은 천대와 수모와 멸시 속에서도 가람을 수호하고 교단을 지켜 내려온 조선 말기에 살았던 스님들의 노력에 대해서 어떻게 필설(筆舌)로 다 말할 수 있으리…….
또 이때의 스님들은 종래의 전통대로 선수(禪修)에 몰두하는 선사가 많았지만 경학(經學)의 연구에도 힘을 많이 썼던 것이다.
대표적인 인물로 연담 유일(運潭有一), 환성 지안(喚惺志安), 설파 상언(雪坡尙彦), 호암 체정(虎巖體淨), 함월 해원(涵月海源)과 같은 인물들이 활약하였고, 또 그들 나름의 학문적 저술을 남기기도 하였다.
또한 스님들은 고성염불(高聲念佛)로 정토업(淨土業) 또한 많이 닦았는데 이러한 경향이 곧 만일회와 같은 염불결사(念佛結社)로 나타났으며, 때로는 진언(眞言)을 외워 비밀법(秘密法)을 겸행하기도 하였다. 이와같이 후기 승가에서는 선(禪)만도 아니고 교(敎)만도 아닌 선수(禪修)와 강학(講學)이 함께 하고, 또 염불도 함께 닦았기 때문에 삼문수업(三門修業)의 가풍을 지녔다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이러한 삼문수업에 지침서가 될 만한 저서가 나타났는데, 진허 팔관(振虛捌關)스님의 「삼문직지(三門直指)」라는 책을 들 수가 있다. 「삼문직지」는 영조 45년 서기 1769년 경에 편찬된 것으로 경절문(徑截門)과 원돈문(圓頓門)과 염불문(念佛門)의 세 가지 수행방법을 제시한 책이다. 경절문은 참선을 강조한 수선문(修禪門)이며, 원돈문은 화엄경을 중심으로 하는 교학문이고, 염불문은 정토수업문(淨土修業門)이었다.
그리고 당시의 불서(佛書) 간행은 초기 조선시대에 비해서 그 질이 많이 떨어지고 주로 간행된 서적 또한 통속화된 위경(僞經)의 종류가 많이 간행되었다. 예를 들면 「천지팔양신주경(天地八陽神呪經)」과 「시왕경(十王徑)」처럼 도교와 습합된 경전이라든가 「부모은중경(父母恩重徑)」과 같이 유교와 습합된 것들을 들 수 있으며, 한글로 된 경전들이 간행되기도 하였으나 정토경전과 다라니 등이 간행되어 세속으로 유포되기도 했던 것이다.
대체로 임란 이후 19세기까지 불교적 상황을 크게 종합적인 시각으로 살펴보았다. 이러한 불교적 상황 아래에서 출발되는 19세기 이후 일제시대까지의 불교는 불교사 전체에서도 가장 침체의 늪에 빠져있던 시기였으며, 이시기는 불교뿐 아니라 조선시대 전체를 통하여 가장 암울하고 격심한 변화 속에 있었던 기간이었다.
순조-현종-철종-고종-순종-일제에 이르는 약 100년 동안 소위 근대사의 변화는 우리 민
족사를 통하여 가장 극심한 변화, 사회적 변화가 일어났던 시기로 왕실의 권위의 실추와 외척의 득세, 서양열강의 식민지 경쟁, 중국의 붕괴와 일제의 침략, 조선의 패망과 일본에의 합방 등 급변하는 세계정세 속에서 자신을 지켜내지 못했던 조선의 패망은 어떤 의미에선 필연적이었다.
한편으로 서학(西學)의 전래(傳來)에 따라 천주교에 대한 시비와 탄압, 동학 등 신흥종교에 대한 억압 등으로 민심은 극도로 흉흉했고, 특히 천주교, 즉 종교문제가 정치문제화됨에 따라 비교적 이제까지 억압받아 왔던 불교에 대해서는 오래되고 무해(無害)한 종교라는 의미에서 그 억압이 조금 가벼워지기도 하였다.
이 시기 동안 해인사뿐 아니라 불교사 전체를 통틀어 보아도 호남불교권의 백파(白坡)스님과 초의(草衣)스님 등의 이름만 겨우 보일 뿐 이렇다 할 고승의 이름이 나타나 있지 않다. 설령 계셨다 하더라도 기록으로 남겨져 있지 않으므로 무심히 흐르는 시간 속으로 조용히 침잠해버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일본불교가 이땅에 발을 들여놓음으로써 서서히 이땅의 불교에도 변화가 일었는데, 1897년에는 승려들의 도성 출입금지령이 해제되었고, 1899년에는 해인사의 대장경을 인각하여 각 사찰에 배분했으며, 서울 동대문 밖에 원흥사(元興寺)가 세워졌다.
이러한 급격한 시대적 변화 속에서 한국 최근대 불교사가 시작되는데, 원종(圓宗)으로 악명(惡名)높은 이회광과 근대 선종의 중흥조로 알려져 있는 경허선사와 그 이후의 근대 고승들이 다음 호부터 연재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