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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경(世記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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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해설 - 무관 1990년 08월 102호
인간이란 무엇인가? 무엇에 의하여 그 작용이 나타나는가? 하는 질문에는 한 마디로 쉽게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서양에서는 창세기를 중심으로 신이 동물을 다 만든 다음에 인간을 창조하여 동물이 인간을 위해 봉사하도록 하였다는 사상이 있었습니다. 근래에는 과학의 발달에 힘입어 꼭 그렇게 믿지 않고 한때는 진화론도 우세한 영향을 미치기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중생계 모두에 대하여 서로 인간과 자연간에 공업(共業)으로 살아가게 짜여진 것이 세간(世間)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연을 떠나서 잠시도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자연과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19세기 말에 들어와서는 환경보호 캠페인이 서양에서 일어나 동양에까지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양에서, 더구나 불교를 믿었던 우리 조상님들은 우리가 서 있는 이 대지만 해도 그 위에 자라고 있는 산천초목 강과 하천 흙과 먼지 어느 것 하나 인간 생활을 용납하지 않는 것이 없으므로 하나의 큰 그릇으로 이해되어 왔었습니다. 바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기세간(器世間)이라고 말하는 까닭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들 모두는 이 기세간 안에서 삶을 누리며 사회적 동물로서 자리를 지키며 살아가기 때문에, 이 기세간이 지니는 의미를 잠시라도 엎지 못하는가 봅니다. 즉 어쩔 수 없이 우리 모두는 그 기세간 안에서 공업(共業)의 세계를 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지은 악업의 과보를 내가 받는 것은 마땅하다 하겠지만, 그것이 이 세상에 파급되어 공업(共業)의 중생으로 모두가 최고로써 받게 된다면 자신의 책임이 결코 가벼울 수만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한 시대를 이끌어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있을 때 그 복지를 함께 나누어 가지는 것은 선(善)의 공과(共果)로서 함께 받는 것입니다. 반면에 통치자의 전제하에 착취만이 다반사처럼 행해질 때 역시 악한 과보의 공과(共果)을 면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불교에서의 이 세상을 기세간으로 표현하는 사회적 ·도덕적 불교의 가치체계에 자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으며, 또한 그 책임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환경과 공간으로서의 사회와, 시간적 제약의 시대성 속에서 중생의 고(苦)를 겪으며 살아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을 중생연(衆生緣) ·중생업(衆生業) ·중생심(衆生心)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이 세계는 중생의 업에 의하여 이루어져 있습니다. 업의 일반적인 개념으로는 개인의 행위와 사회적 의미로서의 행동과 자연계의 운동 등 세 가지가 있다고 보아집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광의적인 자연계와 사회적 의미보다는 개인적인 행위에 대한 관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이미 이러한 업에 의하여 세계가 성립되고 이 업의 영향에 의하여 생존이 영위되고 있습니다.
중생이 살아가는 곳을 세계, 세간이라 하고 「세기경」에서는 열두개의 작은 경을 묶어 놓았습니다. 염부제는 예토라고 하고 염부수 나무가 무성한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울단왈품(기세경에서는 웃다라크루품)은 산이 많고 그 산 곁에 들이 많고 꽃과 열매가 풍성하다고 한다.
울단왈의 땅은 네 면에 아뇩달못이 있어 길이와 넓어는 백 유순이나 된다. 또 땅에는 악한 짐승과 가시와 나무 끝동부리가 없고, 온갖 보배의 덩어리요 돌이나 모래가 없다.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아 울양이 고르고 부드러우며 네 계절이 화하고 순해서 모든 괴로움이 없다. 땅을 밟으면 손가락 네 마디나 들어 갔다가 발을 들면 도로 솟아나서 유연하다.
그 땅에는 못이 있다. 이름은 선견(善見)이라 한다. 물이 맑고 더러움이 없다. 못의 네 면에는 일곱겹의 난간, 일곱 겹의 그물, 일곱 겹의 항수로 둘렀고 무수한 새가 서로 소리를 맞추어 울음을 운다.
하늘은 청명하며 바다는 시원하다. 밤중에는 구름이 끼어 단비를 내리고 밤중 뒤에는 구름이 끼는 일이 없이 맑다.
땅은 풍요하고 인민은 번성하며, 만일 음식이 필요할 때에는 자연의 멥쌀을 솥 안에 두고 염광 구슬을 솥 밑에 두면 밥이 저절로 익는다. 그 맛은 구족하여 도리 하늘의 밥과 같다.
그 땅의 사람들은 신체가 서로 같고 얼굴이 서로 같아 분별할 수 없다. 그 얼굴의 젊기는 염부제의 이십세쯤의 사람과 같다. 이 땅의 인민들이 욕심을 일으킨 때는 음행으로 만족을 하고 어린이를 낳으면 여러 사람이 키운다.
그 땅에 사람이 대소변을 보면 땅이 곧 갈라지고 변을 마치면 땅은 도로 스스로 합한다. 마음에 그리워하는 것도 없고 쌓아 두는 것이 없다. 수명은 천세로 더하거나 덜하지 않고 죽으면 하늘에 태어난다. 그 사람은 전생에 십선업을 닦은 때문이다.
다시 아끼고 탐취하여 능히 은혜를 베풀지 못하면 죽어서 악로에 떨어진다. 마음을 열어 아끼지 않고 능히 은혜를 베푸는 사람은 선처에 난다. 사문·바라문·빈궁한 사람·거지아이 ·병든 사람·곤고한 사람에게 보시하며, 그 의복·음식·수레·꽃다발·향·명상·방을 주고, 탑묘를 만들어 세우고 등불로 공양하면 그 사람은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나 울단왈에 태어난다.
울단왈이란 세 개의 천하 가운데서 그 땅이 최상, 최승이기 때문에 울단왈이라 한다.

부처님이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세간에 전륜성왕이 있어 일곱 가지 보배를 성취하고 네 가지 신덕(神德)을 갖추었다. 일곱 가지 보배란 첫째는 금륜보(金輪寶), 둘째는 백상보(白象寶), 셋째는 감마보(紺馬寶), 넷째는 신주보(神珠寶), 다섯째는 옥녀보(玉女寶), 여섯째는 거사보(居土寶), 일곱째는 주병보(主兵寶)다.
네 가지 신덕이란, 첫째는 오래 살고 일찍 죽지 않아 아무도 미칠 자가 없는 것이다. 둘째는 몸이 건강해 병이 없어 아무도 견줄 자가 없는 것이며, 셋째는 얼굴 모습과 몸의 균형이 단정해서 아무도 당할 자가 없으며, 넷째는 보배창고가 가득 차 넘쳐서 아무도 견줄 이가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칠보와 네 가지 신령스런 덕을 갖추고 상호가 부처님처럼 잘 갖추어져 있지만, 다만 부처님과 같이 최후의 깨달음을 얻지 못한 것이 다릅니다. 그러므로 복이 다하면 다시 윤회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