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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대각운동의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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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탐구 - 한보광 1990년 08월 102호
4. 교단의 정화운동
조선 중기 이후 극심해진 배불정책에 의해 산중으로 움츠러들기 시작한 조선불교는 이판승과 사판승으로 나누어졌으며, 이들의 사생활은 대부분 자유스러웠다. 특히 사판승들은 철저한 계율의 호지보다는 사원의 관리와 외호불사 등에 더욱 심혈을 기울여 왔다. 그러다 보니 지계생활은 자연히 문란해졌다.
또한 이판승들도 조선말 경허선사 이후 막행막식(莫行莫食)이 예사로 자행되어 왔다. 특히 선승(禪僧)들의 이상의 경지인 깨달음을 터득한 경허선사는 무애행(無碍行)으로 많은 일화를 남기므로 그를 추종하던 선납(禪納)들은 경허선사의 외부적인 흉내만을 내기를 보통으로 하였다.
이러한 불교교단적인 분위기 속에서 1900년대 초기에 일본불교가 급속히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한국불교는 왜색화(倭色化)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1910년 만해 한용운은 두 차례에 걸쳐 승려의 취처 허락과 식생활의 자유에 관한 건의서를 정부에 제출하였다. 그럼으로써 일부 몰지각한 승려들의 취처문제를 합리화시켜 주는 구실을 제공하게 되었다. 또한 1913년에 탈고한 「불교유신론」에서

“대개 승니의 취처를 금하는 것은 인구의 중식을 막는다. 승니가 혼인하여 일가를 형성하고 생산에 종사하여 순산을 갖게 된다면 불교의 교세를 발전시키는데 크게 유효할 것이다. 뿔만 아니라 불교는 원융무애한 교인즉 인생의 어떠한 일도 그것이 악사(惡事)가 아닌 이상 금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부처님은 자질이 낮은 자를 위하여 방편으로 취처하는 것을 금하였을 뿐이다.”

라는 종전의 건의서의 내용을 거듭 강조하였다. 이와 같이 만해스님이 건의서를 내게 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이 당시 우리 불교계에서는 일본불교의 영향을 입은 승려들 가운데 노소를 불문하고 비구계를 지키는 승려는 매우 적었으며, 본산주지 중에도 은밀히 취처하는 자가 늘어만 갔다. 그러다가 1929년 경에는 각 본사에도 사법(寺法)을 개정하여 주지자격에서 비구계 수지조항과 독신의 관계조항을 삭제한 사찰들이 80%이상이나 되었다.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도 용성선사의 지계생활은 털끝만큼의 어김도 없었다. 일찍이 선사는 한국전통 율맥(律脈)을 이은 선곡율새(禪谷律師)에게서 비구계를 받음으로써 그 율맥을 계승하게 되었다. 즉 선곡율사의 율맥은 조선 후기 서상수계(瑞祥受戒)로 유명한 대은 낭오(大隱朗旿;1780-1841)의 율맥을 전승한 것이다. 그러므로 용성선사가 선곡율사에게 비구계를 받고 이를 계승시킨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와 같은 율맥은 오늘날 조계종의 가장 권위있는 율맥으로 용성선사의 제자들에게 전수되어 지금도 맥맥히 이어져 오고 있으니 천만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선사는 만해스님이 승려취처 허가에 관한 건의서를 낸 16년 뒤인 1926년에 두 차례에 걸쳐 승려취처 금지에 관한 건의서를 총독부에 제출하였다. 즉 여기에는 범어사 주지 백용성이 발기인이 되고 석왕사 주지 이대전, 해인사 주지 오희진, 선학원 대중 검남천스님 등 127명이 연명으로 서명하게 되었다. 1926년 5월에 낸 건백서를 살펴보면,

“삼천년이 가깝도록 비구의 대처식육(帶妻食肉)설은 듣지 못하였더니 근자에 와서 무치마속(無恥魔屬)의 무리들이 마음을 오욕에 물들어서 부처님의 정법을 멸하게 하여 대처식육을 행하며, 청정한 사원을 마구니의 소굴로 화하게 하여 참선 ·염불 ·간경 등을 전폐하니……’

라고 하고 있다. 이와같이 부처님의 법에 없는 행과 생활을 꾸짖으면서 참선 ·염불·간경 등은 하지 않고 청정한 사원이 마구니의 소굴로 변하고 있음을 개탄했다. 이어서 출가 2부중(二部衆)과 재가 2부중을 말하면서 각자의 할 일을 엄연히 구분하고 있다. 즉,

“지금은 출가의 대중으로서 청정한 사원에 있으면서 처를 두고 육식을 먹으며, 자식을 양육하여 청정도량을 오염시키며, 참선 ·염불·강당을 전폐하고 있음은 불가의 대적(大賊)이니라……”

라고 하여 그 시대의 사찰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또 이는 승려 본래의 길을 망각하고 선방과 염불당·강원 둥을 폐지하고 처자권속을 두고 있는 승려들은 불가의 대적이라고 규정하고 있으니, 용성선사의 청정생활과 지계사상이 얼마나 확고부동한 가를 보여주는 일단면이기도 하다. 또 이어서,

“승려된 자는 지계수도함이 당연한 본분사이거늘 어찌하여 사법(寺法)을 개정하여 대처자로서 주지되기를 당국에 희망하리요. 그 부끄러움은 말로써 다할 수 없다. 당연히 끊어야 될 것을 끊지 아니하면 그 난(亂)을 초래할 것이니 마땅히 절대로 대처승려와 대처주지를 금지하여 지금의 폐해를 없애고 뒷날의 한탄스러움이 없게 해야 할 것이다.”

라고 하는 건의서를 제출하고 있다. 여기서 밝힌 바와 같이 지금 대처승려와 대처주지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그대로 남겨둔다면 그 난을 초래할 것이라고 하고 있다. 또 그로 인해서 뒷날 반드시 한스러움을 겪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선사의 주장은 결국 1954년 대처비구의 정화를 겪게 되었고, 그 피해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그해 9월에 2차 건백서를 제출하였다. 2차 건백서도 1차와 비슷한 내용이었으나 여기서는 세 가지의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는 당국에서 대처식육을 금하지 못할 바에는 대처승의 비구계를 취소시켜 재가자의 위치에 있게 할 것.
둘째는 대처식육하는 승려들이 사원을 장악하게 됨으로 말미암아 수행납자와 고참납자들은 점차로 쫓겨나게 되니, 차라리 지계납자들에게 몇 개의 본사를 할당해 주어서 청정한 사원의 전통을 유지하면서 지계납승들이 안심하고 수도케 할 것.
셋째는 그리하여 무처승과 유처승의 구분을 확실하게 할 것.
스님이 위의 세 가지 방안을 제시하였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오히려 이러한 승가의 청정과 민족의 전통성 유지에 대하여 동아일보 같은 언론에서는 반대의 입장을 취했으니 한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만약 이때 선사의 주장처럼 세 가지 조건 중 어느 하나라도 받아들여졌든지, 아니면 1951년 대처비구 정화 때라도 이 조건 중 어느 것이 채택되었다고 한다면 10년 동안의 투쟁은 없었을 것이다. 또한 그로 인한 막대한 피해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하튼 선사의 건백서는 한국불교 정화의 효시임에는 틀림없다. 만약 그때 어려운 상황 속에서 그대로 넘어갔다라고 한다면 오늘날 한국불교 조계종은 존재할 수 있었을 것이냐라고 생각할 때 정말 아찔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외에도 그때 당시 일부 선사들 사이에서는 계행을 지키지 않는 것을 무애행으로 생각하고 막행막식을 자행하던 이들도 꽤나 있었다. 특히 경허 ·만공· 해월 등은 모든 행에 걸림이 없었으나 이것이 용성선사에게는 아주 못마땅한 것으로 보였다. 오도(梧道)의 진리에 의하면 설사 견성오도를 하였다고 하더라도 계행을 지키지 않으면 외도라고 간주하고 있다. 특히 ‘영산회상에 행실없는 부처없고 소림굴 속에 거짓말하는 조사 없다’라고 하는 것이 선사의 생활신조였는지도 모른다.
그의 주장은 3학 가운데 계학(戒學)이 없이는 정(定)과 혜(慧)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타락되어가고 문란해져 가는 승단의 위계질서와 청정한 교단의 유지야말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길이며, 조사의 혜명을 계승하는 길이라고 여기면서, 스스로 「범망경」을 번역하여 유포하면서 교단 내의 계율을 부흥시키는 데 전력을 다 바친다. 또한 대각교당에서 계단(戒壇)을 차려 계를 설하기도 하며, 그의 제자 가운데 계율을 전문적으로 연구시키고 공부시켜 율사를 양성했으며, 율맥을 전수시켰던 것이다.
선사의 일생은 말 그대로 청정 그것이었으며, 청정한 계행과 정혜(定慧)의 합일체로 나타난 결과가 대각사상(大覺思想)의 실천행이었다. 그는 대각을 얻은 대각인이라도 청정(淸淨)이 없으면 사마외도라고까지 파계자들을 경책하고 꾸짖었다. 무엇보다도 교단은 사회와 국가를 위기상황에서 구제해 내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기 위해선 사회로부터 존경받고 신임받아야 하며, 그러기 위해선 종교인 본래의 면목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그러지 못했을 때 사회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된다.
일제의 어려움 속에서도 퇴색되지 아니하고 본분의 소임을 다하기 위해 일생을 교단의 정화운동에 바쳐온 선사의 선견지명이 없었다고 한다면 그나마 오늘의 불교는 완전히 사회로부터 외면받는 처지를 벗어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우리들은 이러한 선사의 뜻에 어긋나지 않고 있는지 한번 뒤돌아 보아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