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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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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의 방 - 고은 1990년 08월 102호
가정법은 가장 인간적이다. 그것이 아무리 어리석은 가정을 포함할지라도 그렇기 때문에 인간적이다.
만약 4월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래서 그 혁명의 여파로 해인사의 오랜 수구세력이었던 대처승 측에서 그 변혁기를 통해 이때다 하고 들고 일어나 나의 가사를 찢어발기면서까지 나를 큰방 선정(禪定) 자세에서 술취한 젊은이들을 시켜 질질 끌어내어 구광루(九光樓) 돌계단 밑까지 머리통을 다치는 것도 나몰라라 하고 납치해다가 내 굴복을 받으려고 하지 않았던들, 아마도 나는 이제까지 치문(緇門)에 그대로 머물렀을지도 모른다. 정작 그 당시는 나의 은사 효봉스님이 해인사에서 곤욕을 치른 일이 생각나서 상좌인 나도 그런 곤욕인가 하고 생각했건만 차츰 시간이 지나자 내 가사가 대처승 측의 깡패들에게 찢어져 버린 것은 내 삶에 대한 어떤 상정을 불러일으키기 십상이었다.
아무튼 청담스님이 주지였고 그의 권속들이 살림을 맡고 있는 중에 내가 괜히 교무직을 맡았으나 나는 단식 21일의 정진을 한다든가 희랑대나 백련암에 올라가 있다든가 할 때에서 정작 강원 대중과 퇴설선원 대중을 감싸는 일 밖에는 별로 소임거리도 없었다.
그러다가 혁명이 나자 그동안 신부락과 그 밖의 곳에 칩거 이산했던 변설호스님 계열과 일제 식민지시대의 친일승려 계열의 대처승들이 들고 일어났는데, 그때 청담스님 권속은 다짐을 지게에 지기도 하고 몇 개 보따리를 들기도 한 채 달아나 버린 것이다. 남은 살림꾼은 나 밖에 없고 강원조실 강고봉스님은 이미 대처측과 내통하고 있고 선방스님들도 앗 뜨거라 하고 바랑 지고 산문을 날쌔게 나가버렸다. 그렇게 결가부좌 틀고 하루 여덟 시간 이 뭣꼬 하고 앉아 있던 선방 중진수좌들이 그렇게 신속한 발걸음을 놓을 줄은 나도 미처 몰랐다.
나는 선방에 남아 있는 수좌 몇 분과 강원 학인들을 모아 해인사를 사수하자고 선언하고 대처승들이 쳐들어 온다는 당일 큰방에서 선정농성에 들어갔다. 그 당시 나는 단식정진을 끝낸 얼마 뒤여서 심신이 제법 허황했으나 어디 그 따위 사정으로 꼬리를 사릴 수 있겠는가.
나는 끄떡하지 않고 입정했다. 방안은 삼엄했다. 감히 대처측에서 와서도 나를 함부로 건들지 못했다. 그러나 해가 뉘엿뉘엿한 즈음 그들은 술동이를 마당에 서너 동이나 갖다놓고 깡패들에게 마구 취하게 했다. 그들이 취해서야 내 위엄 앞에서도 무인지경으로 되어 나를 끌어낸 것이다. 나는 해인사 주지직인을 손에 꼭쥐고 있었다.
대처승 대표가 나더러 해인사 양도증명서에 도장을 찍고 내 서명만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면 나한테 크게 후대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래 나는 “너 이 늙은 것들!” 하고 소리쳤다. 그리고 나서 “보시오, 여기 직인이 있소. 그러나 내 뜻이 아니라 당신들이 강제로 찍는다면 그건 분명히 위조서류가 되는 것이요. 이 사실을 잘 알아서 처리하오!” 하고 다시 한번 큰소리를 쳤더니 그들은 더이상 나를 협박 회유할 수 없었던지 체념하고 돌아가며 다른 방도를 강구하자는 것이었다. 나는 가사가 엉망으로 찢긴 것은 물론이거니와 머리통이 깨어져 피범벅이 되었으나 그때의 위법망구의 마음 하나는 무쇠덩어리였다. 차츰 시국이 정상화되어 대처승들이 다시 썩 물러가고 치안관서에서 와서 조사할 때 나는 끝내 그들의 이름을 거명치 않고 불문에 부치라고 오히려 부탁했다. 이에 경찰이 약간 감복해서 고개를 주억거리고 물러갔다.
그런 뒤 서울 총무원도 혁명으로 뒤숭숭했고 어디 하나 범상한 곳이 없었다. 해인사도 공중에 붕 떠 있는 형편이었다. 이때 산중회의가 소집되었다. 산내 암자들의 노장과 심지어 두어군데의 비구니 처소에서도 원주들이 모였다. 거기서 당장 해인사를 이끌어 갈 주지를 선출하자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중앙교무원·종무원·총무원 체제의 인사발령 이전의 주지 선출방식이 되살아난 것이다. 이 산중원로회의에서 내가 논공행상 반, 노장들의 애고(愛顧) 반으로 주지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그때 내 나이 겨우 스물일곱이었다. 그래서 주지보다는 주지대리가 좋겠다 했다. 허어 이 무슨 꼬라지인고! 세상에 일초가 주지노릇을 하다니!
그러나 나는 그 과도기간 동안 해인사를 정상으로 되돌려놓고 난뒤 주지대리 겨우 2개월 만에, 꿈에나 나타나는 내 찢어진 가사에 마음이 자꾸 가게 되어 이윽고 가야산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예로부터 가야산세가 무골(無骨)이어서 문취는 끝이 좇지 않다 했다. 그래서 이곳 주지가 제대로 물러선 적이 별로 없었다 한다. 우선 우리 조계종을 일본에 팔아먹으려다 실패한 회광(晦光)도 거의 쫓겨나다시피 했다. 그뒤로 최범술 화상도 예외가 아니고 어느 스님 어느 스님도 그랬다.
그러나 나는 서울에 와서 해인사를 잘 지켜다는 소문이 자자해서 당장 속리산 법주사 주지로 나가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가난한 강화 전등사 주지를 자원하고 그곳 주지 추담스님을 법주사 주지로 천거했다.
추담스님은 평소 나이와 상관없이 나와는 자별하게 지내는 처지였다.
왜냐하면 그는 내 문학에 대한 호의를 가진 신문사 지국장 출신의 스님익 때문이다. 추담스님은 방 안에 못을 많이 박기로 이름이 나 있다. 전등사 주지실에 내가 들어가서 못을 빼는 일부터 했다. 그런데, 세상에 쌀 한되 남겨두지 않고 다 비어두고 간 것이다. 뒤에 들으니 법주사를 떠날 때도 법주사 밑 점포 임대료를 장차의 6년분까지 다 받고 떠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다시 한번 슬퍼졌다.
나는 전등사 주지를 겸하면서 불교신문을 창간해서 행원(行願)―오늘의 숭산―스님이 사장이 되고 내가 초대 주필이 되어 신문을 발행했다. 그전에 나는 중앙선원에서 탄허스님의 도움으로 옛날에 있었던 만해 한용운스님 주재의 월간 「불교」를 재창간해서 창간호 편집까지 다 마쳤는데, 그만 비용 조달이 틀려져서 영영 그만 둔 적이 있었다. 아참, 그때 그 창간호 공백란을 메우려고 시 한편을 써 준 것을 나를 돕던 문학지망의 중견공무원 신도 한 분이 보고 탄복하여 그것을 서정주씨한테 보여 내가 문단에 나오게 되었다.
나는 사라호 태풍이 가야산까지 훑고 간 직후 해인사에 입방했다. 그래서 해인사에서 3년 가까이 방부를 들여 때로는 가야산도 오르고 때로는 학인들 데리고 일주문 밖 청소울력에 나서서 떡도 사준 적이 있었다.
그런데 30여 년이 지나 오늘 해인사를 생각할 적에 회랑대 모기 이야기가 잊혀지지 않는다. 그때 내 사숙 한 분이 그곳에서 금강경깨나 폈다 덮었다 하며 지냈던 일도 떠오른다.
또 하나는 홍제암 물소리다. 그때 홍제암에는 비구니 대중들이 있었는데, 모두 삭도질이 서툴러 내가 머리를 깍아준 적도 있다. 그 암자에서는 한여름 장마가 지난 뒤의 물소리 한번 세상 떠나가는 것 같이 굉음덩어리다. 곁에서 큰소리로 불러도 처음에는 잘 들리지 않는다. 그러다가 그 물소리 한 열흘쯤 듣고 한달쯤 듣고 나면 어느덧 그 물소리가 귀에 들어오는지 마는지 모르게 된다. 바로 내 앞에서 누가 소근거려도 그 말소리를 들을 수 있게까지 된다.
홍제암의 그 우렁찬 물소리도 귀에 익을대로 익어 요사(了事)의 지경이라도 되면 그 있고 없고를 여의고 마는 것이다. 나는 지난번 「해인」지 1백호 기념법회에서 축사를 해달라기에 바로 이 홍제암 물소리처럼 「해인」의 소리가 제망찰해 중생의 마음에 익고 익어 소리가 나지 않는 소리로 되라고 축원했다. 어찌 그것이 무공적(無孔笛)의 도리와 다를 바이겠는가.
나는 이번에 한길문학사에서 제1회 독자수련회로 ‘고은의 문학세계를 탐구한다’라는 행사를 하는데, 이곳 해인사를 꼭 순례지의 하나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내 처녀시집 「피안감성(彼岸感性)」의 시 대부분을 해인사 큰절의 내 정진처소에서 썼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내가 하고 싶은 말 한 마디가 있다. 나는 이제까지 사회불교를 주창해 왔다. 그런데 사회불교만으로 안될 근거가 또한 있다. 그런 점에서 해인사가 대구나 서울에 있지 않고 가야산중에 있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가. 하지만 그런 절을 돈 몇푼 주어야 들어가는 이 싸가지 없는 방식을 하루 속히 없애버려야 한다. 그래야 절이 정권에 놀아나는 일도 없고 총무원장이 어용기관으로 날뛰는 수작도 없을 것이다. 입산이란 입고 있던 속옷도 다 벗어버리고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입산은 단 한번이 아니라 열반에 이를 때까지 거듭되어야 한다. 한데 지금의 입산은 무엇인가. 장군죽비 쉴 날이 없구나 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