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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어떤 삶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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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거수상(山居隨想) - 효종 1983년 01월 11호
우리들은 평범한 일상 속에서 그날그날을 영위하다가, 때로는 자기를 되돌아보기도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까하는 의문을 가져보기도 한다. 이런 문제에 부딪칠 때, 혼히 우리는 가까운 벗이나 선배, 스승 이런 분들께 도움을 청하지만, 가슴 후련한 대답을 별반 들어볼 수가 없다. 그 이유는 뭘까? 누구든지 대답이야 하겠지만, 그 대답이란 그들 자신의 인생에 대한 생각을 말한 것 뿐이지 묻는 당사자의 인생문제는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누군가 「인생은 영원히 고독한 존재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마찬가지로 필자도 그와 갈은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다. 단지 이 사랑의 인생에 대한 생각은 이런 것이니 보는 분은 참고를 바란다는 조그만 욕심에서 몇 자 적을 뿐이다.
정말 인생이란 뭘까? 이것만큼 어려운 질문도 없을 것이다. 죽고 난 다음은 커녕 1분 뒤의 내 인생이 어떻게 될 것인가도 모르는 주제에, 이련 거창한 문제를 어떻게 알 것인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불가능하고 알 수가 없는 문제이기에 그것만큼 쉬운 문제도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아침이면 일어나고, 밥 먹고, 세수하고, 직장 나가고, 밥이 되면 잠자는 등등의 일이 곧 인생이기 때품이다. 따라서 인생이란 말은 다른 말로 바로 「삶」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또 가장 시시한 문제가 「삶」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가 되버린다. 하지만 그렇지만은 않다. 나선비구경(那先比丘經:Milinda-panha라고들 하는데 東晉시대에 한문으로 번역됨) 에 보면 무시무시한 고통을 받는 지옥중생들도 죽으라고 하면 싫어한다는 얘기가 나온다. 이처럼 이세상 사람이나 지옥중생이나 모두 죽음을 싫어하는 것을 보면「삶」은 무척이나 중요하고 고귀한 것임에 틀림없다.
삶은 이렇게 시시하기도 하고 중요한 것이기도 하지만 현실의 삶이란 괴롭기기가 그지없다. 눈이 있는 사람이면 일간신문을 한 번 보라. 국제적으로 포성과 죽음의 아우성이 들리고, 국내에론 무수한 사건들이 머리를 어지럽힐 것이요, 한 개인에겐 신체적 고통과 정신의 갈등이 거듭거듭 쌓여 있어 어떤 때는 밥맛도 잃을 지경이다. 그래서 설사 기쁨 날이 조금 있다손치더라도 괴로움의 전주곡인양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괴롭기만한 이 삶이 훌륭한 사람들을 키워 내기도 한다. 아니 어쩌면 인류의 역사는 이 괴로운 삶 속에서 발전되어 가는지도 모른다. 이 괴로움의 심연속에서 좌절하지 않고 바로 서셔 꿋꿋하게 생의 도약을 할 때 그 인생의 값어치는 빛나기 때문이며, 이 괴로움의 극북은 인생의 참다운 길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런데 왕왕 이 길은 너무나 외롭고 힘든 길이기에 외면해 배리고 편안한 삶을 위해 극복보다는 회피를, 부정보다는 타협을, 인내보다는 굴복을 택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습관을 잘 들이면 그렇게 어려울 것도 없다고 생각된다. 그 습관이란,
첫째, 미래에 대한 크낙한 믿음을 갖는 습관을 들인다. 어떤 이는 요즈음의 사회를 불신(不信)의 시대라고 꼬집는다. 사랑이 사람을 믿지 못하면 사회와 국가의 발전은 바랄 수 없다. 그 중에서도 미래에 대한 믿음, 즉 “미래에는 반드시 우리가 잘 살 수 있다”는 신념이 없다면 오직 하루 먹고 하루 사는 얼에 만족하게 되어 짐승과 다름없는 「옷 입는 동물」이 된다.
불교를 믿는 사랑도 마찬가지다. 부처되기가 어렵다고 먼저 생각할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기필코 부처가 되리라는 굳은 신앙심이 항상 앞서야 고해(苦海)를 건너는 배의 속도가 빠를 것이다.
둘째, 지식을 남용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고등교육을 받고 나면 그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봉사 해야 하는데, 때로는 “지식의 횡포”를 놓는 이들이 있어 안타깝다. 한 예로 을사보호조약 때 나라를 팔아 먹는데 도장을 찍었던 다섯 사랑 중의 한 사랑이 「不可不可」라는 넉자를 써서 이등박문(伊훌빠文)에게 건네자, 이등박문은 「不可不 可」 즉 「어쩔 수 없이 동의한다」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 후 많은 이들이 그 대신(大臣) 에게 매국한 행위를 꾸짖었더니 그 대상이 하는 말인 즉 「不可 不可」 즉 「절대로 동의할 수 없다」란 뜻으로 쓴 것이라고 해명하였다고 한다.
정말 이련 식으로 “지식의 유회”를 해야만 하는 것인가? 그렇게 산다고 해서 그 사람은 천 년이나 살른지 모르겠다.
셋째, 지혜를 바로 쓰겠다는 신념을 갖는 습관을 들인다. 한마디로 봉이 김선달처럼 되어서는 안되겠다는 것이다. 어리숙한 사람들을 속여 대동강물을 팔아 먹고도 자기의 합리화만 내세우면 그에게, 기지에 찬 걸물이라고 찬사를 보낸 때도 있지만 이 시대의 지혜있는 이라면 제발 남을 등치는 그런 일은 결단코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지혜는 “지금의 위기는 제 2의 석가·예수·공자·소크라테스를 부른다”는 야스퍼스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할 것이다.
만약에 이러한 정신들이 신앙으로 굳건해진다면 설사 당장 내일 지구의 폭발이 온다해도 그 정신은 길이 남아 영원과 함께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