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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으로 가는 길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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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삼매 - 일타 1983년 11월 21호
진리를 탐구하려는 욕구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기술 이외의 방법, 자유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자연히 밀려나가기 마련이라 했다. 그래서인지 나는 문득, 만사 꿈 가운데 일 아님이 없음을 깨닫고, 홀연히 걸망하나를 젊어지고 천하의 명산대찰을 찾아 나섰다.
천지로 집을 삼고 백운으로 벗이 되어
높은 산 깊은 골을 몇 굽이나 지냈던고
연운중첩(連雲重壘) 천 만리에 어느 곳이 성지런가.
선지식을 찾아 도(道)를 묻고 명산대찰의 성지도량을 찾아 불보살 앞에 기도했다. 그리고 제방선실(諸方禪室)의 선각도반(先覺道伴)들과 좌선삼매의 수련을 쌓았다. 자기수련과 방하심(放下心). 여러가지 크고 많은 자제(自制)와 금욕을 포함한 나날의 훈련은 육체의 요구를 최소한 압축해서 그 매력을 돌이켜 보다 높은 활동영역으로 향하게 하려함이였다. 자가 일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웃을 위해서, 현세에서의 욕락보다 더 높은 가치가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 내 자신의 육체적 고뇌에서 초탈할 필요를 느끼게 했던 것이다.
출가한 사람은 세간적 학문이나 또는 박학다식(博學多識)만을 위한 것 또는 능변가로서 명성을 드날리려 하는 것은 변소에 단청을 하는 격이라고 했다. 그것은 마치 진흙덩어리를 칼로 자르는 거와 같아서 진흙은 아무 쓸데도 없는 것을 칼날만 무디어짐과 같다고도 했다. 출가하여 중노릇한다는 것이 작은 일이 아니다. 안일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요 명성을 얻기 위해서도 아니요 재물을 모으기 위해서도 아니다. 그것은 생사의 밧줄을 끊기 위해서요 삼계(三界)의 고통에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함이라 했다.
선승의 생활에서 좌선의 목적은 혜안(慧眼)을 개발하는데 있다. 그래서 공안(公案)에 의해 기어코 그 껍질을 벗겨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공안(화두)이란 참구해서 해결케 하는 일종의 문제인데 한가지 공안에 투철하면 기타의 공안은 실질상 선의 궁극실증에 하등의 지장을 초래하지 않는다. 공안을 실참(實參)한다는 것은 선방생활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특징이라 할 것이다. 선실의 정숙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공안 하나에 심적 정련을 극도로 기울여 은산철벽과 같이 전후제단(前後際斷)이 된 곳에서 신명을 다해서 활로를 개척해야 하는 것이니 소위 백척간두에 진일보(百尺竿頭 進一步)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선(禪)의 심리적 과정의 경험은 사회 어느 부분에서라도 얼마간 비슷하게 통하고 적용이 되는 과제일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공안을 참구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며 선의 생활이 어디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인가를 알게 한다. 수도승들은 산사에서 허송세월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여기에서 그 도덕적, 정신적 영력(靈力)을 발달시키고 또한 그들 존재의 신바를 발견하기 위하여 특수한 방법으로 훈련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선 생활이 적당한 빛을 보아서 이것이 잘 현대인들의 정신적 욕구에 호응하고 또한 그것이 과학이나 기계의 힘에 의해서 부단히 전변(轉變)하는 오늘날의 산문적(散文的)타성과 천박한 영합주의의 한 가운데 있어서 어떻게든 선(禪)의 진리는 보존되어야 하겠다. 선의 생활은 공(空)의 진리를 즉각적으로 파악해서 이 진리가 온갖 시련, 의무, 분쟁으로 가득찬 실제생활의 모든 방면에서 실증되어 마치 단비가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의 구별없이 평등하게 내리는 것처럼 대자대비의 마음이 스스로 우러나게 될 적에 이때 비로서 선공부는 다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사람이 지상에 있어서 성취시켜 얻는 가장 존귀하고 가장 높은 수양이라 할 것이다.
우리가 만일 보살도의 이상에 접근하려고 한다면 전력을 다해서 참구해 볼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만약 일생이 부족하다면 백천만생을 걸려서라도 이 「무공용(無功用)의 생활」을 증득하는데 최대의 의의를 인정하는 것이다.
초원의 백합들은 이러한 생활을 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세계의 보다 위대한 정신적 지도자들은 누구나 이런 생활에 젖어 있다. 보살의 모든 큰 서원은 여기로부터 비로소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