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덕(普德)화상은 고구려 보장왕 때의 고승이다. 고구려는 소수림왕 2년에 불교를 받아들여 대대로 불법을 융성시켜 왔으나 27대 영유왕대에 이르러 도교를 받아들이면서 불교를 차츰 멀리하였다. 그 다음 보장왕은 본격적으로 도교를 숭상하여 이제까지 신봉해 오던 불교를 멀리하고 도교의 경전만을 배워 강설하는 것이 사회풍조가 되고 말았다. 심지어는 불교 사원을 폐지하고 도교의 도관(導管)으로 만들어 승려들을 박해하고 백성들에게도 쌀을 다섯말씩 바치도록 하는 오두미교(五斗米敎)를 시행하여 백성들의 원망이 높았다. 그리하여 혜편(惠便), 혜자(惠玆), 승륭(僧隆), 혜관(慧灌) 등의 고구려 고승들은 수행하고 교화하던 절을 도교에 빼앗기고 신라, 일본으로 떠나기도 하였다.
이러한 현실을 안타까이 생각한 보덕화상은 왕에게 나아가 간하였다.
-상감마마 이 나라는 처음부터 ㅂ루교를 받아들여 부처님의 자비, 화합정신이 보급되어 상하군신이 화목하고 백성들이 복되게 지내왔습니다. 그런데 상감께서는 도교를 받아들인 후 불교를 박해하니 백성들의 존경을 받던 고승들이 나라 밖으로 떠나게 되어 민심이 분열되니 나라의 앞날이 걱정입니다.
-듣기 싫소. 음식도 바꿔 먹어야 구미호를 돋구는 법이고 의복도 새 것으로 바꿔 입어야 청신한 맛이 있는 법이요. 그러니 화상도 내가 하는 일이 못마땅 하거든 이곳을 떠나면 될 것이 아니요.
이말을 들은 보덕화상은 이렇게 생각했다. <나라가 어지러우니 임금의 눈도 흐려지는구나. 아무리 간하여도 소용이 없이 없으니 이것 역시 천운(천운)이다. 내가 떠나는 것만 같지 못하다.>하고는 절에 돌아와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내일 일찍 이곳을 떠나야 겠으니 모든 준비를 하도록 하여라. 그리고 너희들 중에 수도할 만한 좋은 도량을 보아 둔 사람이 없느냐?
-몇해 전에 찾아본 남쪽의 완산주 고달산이 좋아 보였습니다.
-그러면 내일부터 그곳에 옮겨가서 살아야 겠으니 그리 알아라
그 이튿날 새벽에 한 제자가 일찍 일어나서 도량석의 염불을 하며 주변을 살펴보니 살던 절은 그대로인데 주위의 산천은 아주 딴판으로 바꿔져 있었다.
어리둥절해진 제자가 스승에게 쫓아가 말씀드렸더니,
-간 밤에 내가 신통력으로 우리가 살던 평야의 반룡사를 이곳 완산주 고달산(高達山:지금의 전주 고덕산(高德山))으로 옮겨왔으니 이상하게 생각할 것 없다.
이 때가 고구려 보장왕 9년(650년)의 일이다. 수행과 학식이 뛰어난 보덕화상은 특히 열반경에 통달하여 열반종(涅槃宗)의 종조가 되었으며 유명한 원효대사가 보덕화상에게 열반경을 배웠다고 한다. 다음의 이야기도 보덕화상의 넓은 도량을 보여주는 일화 한가지.
보덕화상이 머무는 곳에는 화상이 명성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그때마다 화상께서는 상좌에게 이르되,
-내고향에서 손님이 오셨으니 잘 대접해 보내라.
하고 부탁하신다. 상좌들은 그대로 곧이 듣고 잘 대접해서 보내지만 손님이 올 때마다 고향사람이니 잘 대접해서 보내라는 말씀에 의문이 가서 손님들에게 물어봤더니 고향은 아니라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한 상좌가 스님께 가서 여쭙되
-스님! 이후부터는 고향사람인지 아닌지를 똑똑히 분간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그래야만 진짜 고향 손님께 좀더 잘 대접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너희들이 모르는 소리다. 우리 인생이 알 수 없는 곳에서 나온 것이 같고, 죽어 돌아갈 때에도 알 수 없는 곳으로 가는 것이 같으니 어찌 다 고향사람이 아니겠느냐. 또 모든 생명은 부처님을 어진 어버이로 하는 한 자식이 아니냐. 그리고 출가한 사람이 찾아오는 사람은 차별하여 대접해서는 안되느니라. 내 절에 찾아오는 사람은 빈부귀천을 가리지 말고 평등하게 대접하도록 하여라.
하고 말씀하시므로 상좌들도 감동하여 그 뒤로는 모두다 고향사람이라는 데 의문을 갖지 않게 되었다.
소개되고 있는 벽화 그림은 해인사 큰법당의 벽화입니다. 위 벽화들은 12년 전에 현 해인사 주지 명진스님이 그당시 교무소임을 보면서 전체적인 구상을 하여 대구의 조정우 거사가 그림을 그리고 일타 스님께서 글씨를 쓰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