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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보다 실천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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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투고 - 강도수 1983년 08월 18호
실천하지 않는 지식 행동하지 않는 양심, 그것은 사변적 유희거나 표백된 언어가 만들어낸 신기루에 불과하다. 잡다한 지식에 짓눌린 채 아만의 늪에 빠져 자기 좌표를 상실하고 행로를 찾지 못해 허우적거리는 나약한 식자들. 이들은 우리가 바라는 행원(行願)을 함께 살아주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옛 어른들은 한결같이 지행합일(知行合一)을 강조하지 않으셨던가?
위로는 진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이웃을 건지고자 하는 불자들에 있어서야 더 말한 나위도 없다. 부처님의 많은 제자중에 귀감이 되지 않는 분이 있으랴마는 그중에서도 우리들에게 가장 감명을 주는 분은 ‘쥬리 반특’ 존자자 아닐까 한다. 한 귀절의 게송조차도 외우지 못할 정도로 우둔했던 그가 부처님의 말씀을 따라 대중처소를 청소하다가 드디어 아라한의 자리에 올랐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감동적이다. 우둔하다고 경멸받던 그분은 대중처소를 늘상 쓸고 닦아 내면서 마음의 때와 먼지를 동시에 닦아내어 대도를 증득하셨던 것이다.
그렇다. 우리들은 너무 알려고 하는데만 열중한 나머지 조그만한 일 하나도 실행을 못하고 있는게 아닐까? 우리들이 안다고 해야 얼마나 알 것이며 현명하다고 해서 얼마나 현명할 것인가? 오늘 여기 이렇게 서있는 자리가 어딘지도 모르고 내일 어디로 갈 것인지도 모르는 우리가 아닌가? 나아가자, 행동하자, 쓸데없는 분별심을 내어 따지고 가려내고 앞뒤만을 재고 주위만을 국집(局集)하는 동안 ‘흰쥐와 검은쥐’는 우리 생명의 동아줄을 갉아버리고 말 것이다.
종교생활의 궁극 목표는 선각자들의 각행(覺行)에 의지하여 자신을 다스리고 그들의 드높은 인류애를 본받아 생활 속에서 그 진리의 길을 실천함에 있다고 하겠다. 성인들이 자기 자신의 깨달음에만 그쳤다면 우리들의 예경대상으로서 받들어지지 못했으리라. 그들은 한결같이 모든 인류 나아가서는 모든 중생의 고통을 슬퍼하면서 구제의 손길을 내미는데 인색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종교생활의 의미는 실제로 베푸는 자비정신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경전을 통하여 부처님의 간절한 목소리를 들으면 가슴을 저미는 듯한 감동이 온다.
「비구들이여 천도하기 위해 길을 떠나라 보다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한 길을 둘이서 가지말라…」
「눈에 보이는 자이거나, 보이지 않는 자이거나 멀리 있거나 가까이 있거나, 이미 태어났거나 앞으로 태어날 일체의 생명 모든 사람들에게 행복이 있으라 평화가 있으리 은혜가 있으라.」
진리를 깨닫고 생명의 실상에 눈뜬 곳에서는 자비가 샘물처럼 솟아난다. 작은 나의 껍질을 벗어버릴 때 세상의 일체중생이 모두가 한몸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생명의 참모습을 자각할 때 이웃의 아픔은 곧 나의 아픔이 된다.
우리들의 방을, 뜨락을, 골목길을 한번 더 닦고 쓸자. 거리에 흩어진 휴지라도 한장 더 줍고 산야에 즐비한 유리조각 하나라도 더 줍자. 그리고 가난하고 병든 우리들의 이웃들에게 달려가서 같이 웃고 같이 위로해주자. 우리들 역시 그들처럼 가난하고 병들었고 외롭기 때문에 우리 이웃들에게 언제나 따뜻한 미소를 보내자. 그들에게 보내는 나의 작은 미소와 따뜻한 손길은 이웃에서 이웃으로 파문처럼 끝없이 번져갈 것이다.
「넘어진 것을 일으키심과 같이 덮인 것을 나타내심과 같이 헤메는 자에게 길을 가르키심과 같이 어둠속에서 등불을 가지고 와서 ‘눈 있는 자는 보라’고 말씀하심과 같이 부처님께서는 온갖 방편으로 저희들의 눈을 띄워 주십니다.」
이와 같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웃들과 함께 나누자. 우리 모두 아직까지 그 법(法)을 몰라 나아가지 ath하고 있으니까. 어둠 속에서 방황하며 두려움에 떠는 이웃들과 함께 손을 잡고 걸어가자. 우리 모두 역시 아직도 전도(轉倒)된 꿈속의 공포에 떨고 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