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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를 살다 죽더라도 – 자장음사의 계율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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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화설명 - 편집실 1983년 07월 17호
신라 계율종의 초조(初祖) 자장율사는 어릴 때의 이름을 선종랑(善宗郞)이라고 하였다. 그의 아버지 되는 김무림(金茂林)은 소판(蘇判)이라는 높은 벼슬에 있었지만 일찌기 아들을 두지 못한 것을 한탄하다가 상보에 귀의한 후 돈독한 신심을 가지고 관세음보살님께 기도하기를 「아들을 낳게 해 주시면 불법의 홍포를 위해 출가시킬 것을 맹세합니다.」하는 원을 세우고 지성으로 기도를 하였다.
기도를 드린 얼마후 무렵의 부인이 하루밤 꿈에 큰 별이 품 속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잉태하여 한 아기를 낳으니 이 때가 신라 진영왕 29년 4월 8일 이었다. 부처님의 기도영험으로 태어난 선종랑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재주가 비상하여 그를 가르치는 스승들을 놀라게 하였다. 차츰 문장과 높은 학덕을 쌓은 선종랑은 청렴하고 슬기로운 선비로서 차츰 명성이 높아갔다. 그후 결혼하여 자식까지 얻었으나 이제까지 모시고 살던 부모님이 연거퍼 돌아가시는 슬픔을 당하게 되었다. 자식을 얻었으나 부모가 돌아가는 슬픔에 잠겨 있던 선종랑은 인간의 고뇌와 무상(無常) 에서 벗어나는 길은 바른 믿음으로 진리를 깨닫는 걸이라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처자권속을 이별하고 깊은 산속을 찾아 수도고행을 시작하였다. 입고있던 훌륭한 옷도 낡고 헤진 옷으로 바꿔입고 앉은 자리에는 가시덤불로 주위를 삥 둘러 조금만 졸거나 움직여도 찔리게하여 혼미한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때 마침 나라에서는 선덕여왕이 등극한 후에 공석 중인 재상자리에 적당한 인물을 물색하다가 산속에서 수도하고 있는 선종랑의 학품과 인품을 귀히 여겨 사신을 보내 불러오게 하였다. 그러나 선종랑은 여러차례 사신을 보내 간곡한 말로 입궐하도록 권하였으나 끝내 듣지않고 사양하였다. 왕은 크게 노하여 다시 사신에게 조서(詔書)와 함께 한 자루의 칼을 내어 주면서 이번에도 오지 않겠다 하면 그 목이라도 가져오도록 명하였다.
임금으로부터 명을 받은 사신이 선종랑에게 다시 찾아가 상황을 이야기 하였다. 그러나 선종랑은 침착하게 대답하기를,
-내 차라리 하룻동안 계율을 지키다 죽을지언정 파계하고서 백년살기를 원치 않노라(吾寧一日持戒而死 不顧百年破戒而生).
하고서 목을 내밀었다. 일이 이쯤 되자 사신도 차마 목을 베지 못하고 임금에게 돌아가 사실대로 아뢰었더니
-그렇게 불도를 위하여 순교하려는 사람에게 어찌 죄를 줄 수가 있겠느냐.
하시고는 출가를 허락하셨다. 그후 선종랑은 계를 받아 이름을 자장(慧藏)으로 바꾸고 더욱 수도에만 전념하게 되었다. 양식이 떨어져 없을 때에는 새들이 산의 과일을 물고와서 놔두고 가곤 했다. 계율에 철저하고 수행에만 전념하던 자장율사는 당나라에 유학가서도 그곳 황제의 지극한 존경을 받았다. 또 문수보살의 성지인 중국 산서성에 있는 청량산에 들어가 문수성상(文珠聖像)앞에서 지극한 마음으로 기도하였다. 기도를 시작한지 7일째 되는 날 꿈인듯 생시인듯 문수보살님께서 나타나서 그대는 계율을 잘지키는 사람이므로 내가 이제 석가부처님께서 친히 수하시던 가사와 사리를 그대에게 부촉하니 잘 받들어 모시라 하시고는 사라져 버렸다. 당나라 유학의 길에 오른지 어언 7년.
이제 스님께서는 그동안 노심초사하여 얻은 새로운 여러가지 불교지식과 본래 목적이었던 공부를 끝마쳤으므로 하루 빨리 신라의 민중에게 참다운 부처님의 진리를 전달할 사명감과 법열에 차서 부처님의 가사와 사리 그리고 신라에 없는 많은 경전과 불상들을 모시고 신라에 돌아오니 온 나라가 성대히 맞아들였다.
선덕여왕은 중국유학에서 돌아온 자장율사를 대국통(大國統)으로 삼아 분황사에 머물게 하고 전국승려의 율의(律儀)를 총섭(摠攝)케 하였다. 자장율사도 이러한 기회를 불법을 널리 홍포하고 기강을 바로하는 계기가 되게 하였다.
그리하여 전국 사찰에 영을 내려 보름마다 계를 설하고 포살(布薩; 보름마다 불자들이 모여 그동안에 참회하여 악을 제거하고 지은 죄가 있으면 선을 증장시키는 의식)을 시행하였다. 또 겨울과 봄에는 승과를 실시하여 승려의 자질향상을 도모하였으며 순사(巡使)를 두어 지방사찰을 두루 살피게 하고 일정한 법식으로 불상과 사찰을 장엄하게 하였다.
신라의 불법이 이때 비로소 질서가 잡히고 정돈이 되었다.
불법이 크게 일어남에 따라 온 나라 백성들이 거의 부처님의 계를 받아 지녔으며 속세를 떠나 출가하는 것을 집안의 큰 영예로 여기게 되었다. 자장율사는 문수보살로부터 부촉받은 부처님의 가사와 사리를 모시기 위해 통도사를 창건하고 계율종의 근본도량이 되게 하였으며 신라불교의 기틀을 확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