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국의 관등사(觀燈史)
관등행사는 일찌기 인도를 비롯하여 중국과 한국 등 불교문화권에서 널리 성행해 오던 불교의 독특한 행사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등(燈) 또는 불(火)에 관계되는 민속이 삼국시대 이전부터 그 나름대로 행하여져 왔으나 신라에 들어와서는 불교의 연등회(燃燈會) 행사 속에 동화되어 함께 행해 졌다고 한다.
신라 때에는 해마다 정윌 보름이면 황룡사를 중심으로 백고좌대회(百高座大會)라고 해서 덕 높은 고승 백명을 초청하여 법문을 듣고 공양을 올리며 연등회가 크게 베풀어 졌다고 한다. 이 연등회가 보다 국가적인 행사로 확대되어 11월에는 팔관회가 열렸는데 행사에는 왕이 친히 참석하셨다고 한다.
고려의 태조 왕건은 정치적 지표로 유언한 훈요십조(訓要十條)에서 불교를 숭상하고 연등회와 팔관회를 연중행사로 봉행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신라의 전통을 이어받아 고려초기까지는 정월 보름에 연등회가 성대하게 베풀어 졌지만 성종(成宗)대에 이르러 그 의식이 너무나 번잡하다 하여 한때 폐지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현종(顯宗) 원년에 다시 부홍하여 공양왕 원년에 와서 정월 보름에 행하던 연등회를 사월 초파일로 옮겨 행하게 되었다.
고려 때의 연등회는 국가적인 큰 행사였고 모든 백성들의 축제이기도 했다. 이 날이 되면 왕실을 비롯하여 집집마다 등불을 밝히고 관등놀이로 흥겹게 보냈다고 한다. 또 고려사에 보면 사월 초파일 수주일 전부터 어린이들은 연등의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종이를 오려 대나무에 달아 기를 만들어 가지고 성안을 누비고 다니면서 쌀이나 베를 구하는 호기(呼旗)풍속이 있었다. 공민왕은 이러한 아이들에게 베 백필을 하사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임금으로부터 연등비용을 하사받은 아이들의 기쁨은 참으로 컸을 것이다.
또한 정책적으로 핍박을 받던 조선시대에는 불교교단의 쇠퇴와 국가정책에 따라 연등회가 가끔 금지되기도 하고 권장되기도 하는 등 다소 기복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만간 속에 뿌리를 내린 아름다운 그 풍속은 오히려 일반화된 느낌이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경도잡지(京都雜誌), 열양세시기(列陽歲時記)등의 문헌이나 당시의 문인들이 남긴 문장이나 시에 의하면 조선시대 또한 연등회가 화려하게 베풀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연등행사의 거리 풍경은 오색찬란한 등의 행렬로 대낮 같이 밝았으며 갖가지 등을 구경하려고 서울 주변의 시골사람들도 다투어 몰려와서 저자를 메웠다고 한다. 또한 남산에는 휘황찬란한 연등행사의 장관을 구경하기 위한 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이러한 유풍은 구한말(舊韓末)까지도 지속되어 왔다. 그러나 근간에 이르러 이러한 국민 축제적 풍속은 점차 사라지고 사찰에서 불교도들만의 행사로 축소되어가고 있음은 퍽 애석하고 안타까운 노릇이다.
2. 관등의 의미
등(燈)은 범어(梵語)로 디파(Dipa)라고 하는 바 지혜를 상징한다. 지혜의 광명으로 중생의 무명(無明)을 밝혀준다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 바로 불교의 등공양이다. 불설시등공덕경(佛說施燈功德經) 에 보면 여러가지로 연등의 공덕을 찬양하고 있다. 삼보(三寶)를 믿고 조그만 등 하나를 바치더라도 그 공덕은 한없이 크다고 했다. 또 “등을 바치는 것을 연등이라 하고 마음을 밝게 하는 것을 관등이라한다”고 하였다.
우리는 비록 크고 화려하진 못하더라도 정성이 담긴 하나의 등을 밝혀야 하리라. 가난하지만 신심이 지극했던 사바티(舍衛城)의 가난한 여인의 작은 등불이 홀륭하고 화려한 많은 등들이 꺼져버런 뒤에도 홀로 남아 어둠을 밝히고 있었듯이 우리도 이 시대를 구제할 큰 서원과 정성으로 영원히 꺼지지 않을 마음의 등불을 밝혀야 하리라.
우리는 하루속히 탐내고 증오하는 어두운 마음을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정화해야 하겠다. 또 길을 잃고 헤메는 많은 이웃들에게도 바른 길을 안내하는 장명등이 되어야 하리라. 우리 모든 불자들은 이러한 관등의 의미를 분명히 알고 등불을 밝혀 “부처님 오신날”을 경축하고 아울러 자기 마음을 밝히는 계기로 삼아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