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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적 가치관의 재정립 中 - 사법인(四法ED)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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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논단 - 도수 1983년 05월 15호
(2) 제법무아(諸法無我)
일체만법이 가변성을 갖는다는 것은 어떤 것이라도 고정불변하는 것은 없다는 것을 이미 의미하고 들어간다.
상주불변하지 않는 것에 “나”라고 집착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것이 제법무아이다. 다시 말해서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얘기는 서로유기적인 상관관계에 놓여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며 그것은 곧 만법이 서로 관계 속에 존재한다는 불교의 연기관에 상통하고 있다.
인간을 놓고 보더라도 육체는 여러가지 요소의 가합(假合)에 불과하며, 마음 역시 내 생각, 내 주관이 언제나 한결같이 이것이 내 모습이라고 단정지어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회에 있어서도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표현이 가리키듯이 사람은 혼자서 존재할 수가 없는 법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사회의 주체적 존재임과 동시에 사회의 객체적 존재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 사회에 의해서 규제받는 바가 적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제법무아는 곧 공동체 의식을 주지시키는 것이며 자연히 무아적 행동을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아라고 하는 고정 불변의 독립된 실체가 있다고 집착함으로써 나와 사회와의 관계를 어떤 주종의 관계 또는 대립적 관계로써 일방적으로 파악함으로써 이른바 대승불교의 소승적 타성은 유감스럽게도 끈질기게 지탱해 왔던 것이다.
현실이란 곧 사회역사를 말한다. 그러니 역사나 사회를 외면한 채 현실구원을 외친다는 것은 자기기만일 수 밖에 없으며, 추상성 관념성의 차원을 넘어설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즉 객관적 상황의 연관성 속에서 전체적 실상을 구조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연기관이며, 모든 인간을 자아와 한 몸이라는 차원에서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 무아행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현실적 고뇌가 생리적 고뇌에 앞서는 과제임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며 소위 보살도 정신이 절실한 이 시대의 상황을 인식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3) 일체개고(-切皆苦)
불교에서 문제의 해결은 고(苦)의 철저한 인식으로부터 출발한다. 그것이 없이는 해탈을 지향하는 동기의식이 희박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불전에 따르면 싯달타의 고뇌는 사문유판(四門遊觀)을 통하여 절정에 달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인간의 고뇌, 자신의 고뇌에 대하여 정면으로 맞닥드림으로써 그는 도피적 세계에 안주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출가의 행위로 보였다. 그러나 앞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석가모니와 똑같은 깨달음을 소위 괴로움의 바다인 이 사회가 지금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많은 불교인 조차도 불교적 고뇌의 정체가 인간들의 지극히 보편적 생멸현상인 생, 노, 병, 사, 가 전부라는 사고영역을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존에 대한 본질적 궁극적 질문만이 인간의 고뇌로써 역사사회에 거론될 수 없다는 사실은 부인의 여지가 없다.
생, 노, 병, 사에서 조차도 현실적이고 구조적인 모순에서 빚어지는 많은 고통들이 그것을 장식하는 것을 우리는 목격할 수가 있는 것이다.
선사시대부터 인간과 자연에 던져진 본질적, 궁극적 질문들이 물론 인류와 더불어 그 전통을 같이 할지도 모르지만 역사사회의 무게가 급격히 가중되어가는 현실은 그러한 질문과 고뇌에 자신을 떠맡길 여유나 조건이 되어 있질 못한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현실을 해결하기 위한 근원적 질문들이 경직되어 받아들여짐으로 해서 역사현실에 반영되지 못한 채 관념적 사고 활동에 그치고 있음이 불교의 비역사화를 추진시켜 왔음을 우리는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중생이 살고 있는 현장의 고통을 철저히 분석하고 진단함으로써 그것을 해결하려는 의지를 발휘하여야만 불교가 출현한 가치는 회복될 수가 있는 것이다.
역사사회적 객관세계와 현실구조적 자아와의 모순이 운명적으로 해석되어질 때 역사는 배회를 거듭할수 밖에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고통의 초자연적 인식은 인간사회에서 설득력을 상실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중생이 없는 부처는 우상이다. 중생의 현실적 고통을 외면할 때 그 부처는 사회구조 속에서 지배자의 시녀로 전락한다. 불교이념의 역사관이 고의식(苦意識)과 만날 수 있어야 불교가 역사사회에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서 개인적, 근원적 고통만을 고의식의 전부로 파악하고 그러고 그것의 해결이 객관사회의 문제해결이라고 생각한다면 불교는 결코 사회현실의 에너지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