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일체개고(-切皆苦)
불교에서 문제의 해결은 고(苦)의 철저한 인식으로부터 출발한다. 그것이 없이는 해탈을 지향하는 동기의식이 희박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불전에 따르면 싯달타의 고뇌는 사문유판(四門遊觀)을 통하여 절정에 달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인간의 고뇌, 자신의 고뇌에 대하여 정면으로 맞닥드림으로써 그는 도피적 세계에 안주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출가의 행위로 보였다. 그러나 앞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석가모니와 똑같은 깨달음을 소위 괴로움의 바다인 이 사회가 지금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많은 불교인 조차도 불교적 고뇌의 정체가 인간들의 지극히 보편적 생멸현상인 생, 노, 병, 사, 가 전부라는 사고영역을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존에 대한 본질적 궁극적 질문만이 인간의 고뇌로써 역사사회에 거론될 수 없다는 사실은 부인의 여지가 없다.
생, 노, 병, 사에서 조차도 현실적이고 구조적인 모순에서 빚어지는 많은 고통들이 그것을 장식하는 것을 우리는 목격할 수가 있는 것이다.
선사시대부터 인간과 자연에 던져진 본질적, 궁극적 질문들이 물론 인류와 더불어 그 전통을 같이 할지도 모르지만 역사사회의 무게가 급격히 가중되어가는 현실은 그러한 질문과 고뇌에 자신을 떠맡길 여유나 조건이 되어 있질 못한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현실을 해결하기 위한 근원적 질문들이 경직되어 받아들여짐으로 해서 역사현실에 반영되지 못한 채 관념적 사고 활동에 그치고 있음이 불교의 비역사화를 추진시켜 왔음을 우리는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중생이 살고 있는 현장의 고통을 철저히 분석하고 진단함으로써 그것을 해결하려는 의지를 발휘하여야만 불교가 출현한 가치는 회복될 수가 있는 것이다.
역사사회적 객관세계와 현실구조적 자아와의 모순이 운명적으로 해석되어질 때 역사는 배회를 거듭할수 밖에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고통의 초자연적 인식은 인간사회에서 설득력을 상실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중생이 없는 부처는 우상이다. 중생의 현실적 고통을 외면할 때 그 부처는 사회구조 속에서 지배자의 시녀로 전락한다. 불교이념의 역사관이 고의식(苦意識)과 만날 수 있어야 불교가 역사사회에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서 개인적, 근원적 고통만을 고의식의 전부로 파악하고 그러고 그것의 해결이 객관사회의 문제해결이라고 생각한다면 불교는 결코 사회현실의 에너지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