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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소외와 승가의 본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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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리포트 - 편집실 1995년 10월 164호
현대인의 소외

익히 아는 바와 같이 현재 우리가 사는 사회는 자본주의 체제이다. 그것의 다른 표현으로 자유 민주주의, 산업 사회 또는 정보화 사회라 하지만 결국에는 자본주의 생산 구조 안에서의 다른 표현이다. 어떤 이들은 산업사회의 고도화에 덧붙여 후기 산업사회라고도 하고 더욱 유식한 학자들은 그것을 포스트 모던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저러나 본질적으로는 자본이 노동력을 상품으로 포장하여 이윤을 극대화 하는 자본주의 체제를 바탕으로 존재한다.
상품 생산은 사회적 성격을 갖고 있으나 그 상품을 소유하는 것은 개인이다. 이를테면 세탁기를 생산하는 공장에서 부지런히 노동을 하여 사회적 생산량을 늘리지만 노동자는 그 세탁기를 가정에 두려면 일단은 시장에서 구입하여야 한다. 이런 모순은 기본적으로 인간을 이중적인 생활속에 있게 한다. 소유를 위한 노동은 인간을 소외의 뜰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오늘날 물질의 풍요함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생활은 여전히 상대적인 빈곤에 허덕이고 있으며 정신적 공허함의 팽배 역시 사회의 구조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자본의 운동은 계속해서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내야 하고 개인은 그런 새로운 상품을 소유하기 위해 더 많은 노동을 해야 한다. 따라서 현대의 개인은 국민으로 불리고 있지만 실상은 국가로부터 소외된 상태에 있을 뿐이다.
그런 개인이 과연 소외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해 정확하게 인식하는가 하면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가령 어떤 재벌 회사에 다니는 노동자-그가 생산직이든 또는 사무직이든간에-에 대해 회사는 자긍심을 갖도록 다양한 ‘환경’ 을 제공해 준다. 사원 주택을 제공한다든가 그 회사의 제품을 저렴한 가격에 살수 있는 혜택을 준다든가 또는 프로야구단 등의 운동 단체를 운영하여 일체감을 조성한다든가 하여 마치 자신이 고용된 회사 이름만으로도 어깨가 펴질 수 있도록 환상을 심어 준다.
그것은 마치 교통사고 현장에서 이제 막 죽음을 당하고 있는 부상자의 일그러진 얼굴을 찍어 사진기자상을 받은 기자와 같이 ‘인간`으로서 보다는 `개인의 명예’를 부각시키기 때문에 인간의 소외를 못 느끼는 것이다.

현대에서의 종교

소외 이론을 공식화했다는 프릿츠파펜하임(1920~54)의 표현을 빌리면 “개인이 자신의 이익 추구와 전혀 관련이 없는 모든 것으로부터 소외되었다는 사실을 반드시 자각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그가 언제나 자기지신의 자아로부터 소외 되었다는 것을 의식하거나 또는 그것을 불안한 경험으로 느끼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이탈의 결과로서 소외된 인간은 때때로 대단한 성공을 거두기도 한다. 이러한 성공이 계속되는 한, 일종의 무감각이 생기고 이러한 무감각으로 말미암아 그는 자기 자신의 소외를 자각하기 어렵다. 위기에 직면했을 때에만 그는 자신의 소외를 느끼기 시작한다”고 하였다.
생생한 현장 사진으로 기자상을 받은 기자가 정작 자신이 교통 사고를 당해 고통을 겪고 있는데 시진 기자의 플래시가 터지고 있다면 그때 비로소 자신이 받은 영예가 결국에는 소외의 흔적이었음을 뼈저리게 느낄 것이다.
현대인은 늘 소외된 사실을 절실하게 인식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격화되는 삶의 경쟁에서 자신의 도태를 불안해 하고 있다. 그 불안의 요인은 두말할 것도 없이 상품이 지배하는 사회에 기본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소외’ 에서 온다. 그 결과 현대인은 은연중에 치열한 경쟁 대열에서 한발 떨어져 고고하게 살아가는 초월자를 기리는 심리를 갖고 있다. 말하자면 일종의 보상심리라고나 할까.
퇴옹당 성철 대종사가 열반에 들자 누구라 할 것 없이 추모의 정을 아끼지 않았던 까닭도 여기에 있다. 평상시에는 스님의 존재에 대해 크게 의식하지 않았던 일반인들조차 ‘우리 시대의 정신적인 지주`로 받아들인 것은 자신이 느끼고 있든 아니든 간에 ‘소외’ 에 대한 인정을 나타내고 있다.
사회 발전에 따라 필연적으로 종교의 형식과 내용이 변화되었다. 과거 중세의 미신처럼 세계가 신의 의지에 따라 창조되었다는 ‘거꾸로해석’ 을 전제로 인간을 옭아매던 교리나 형식은 용납되지 않는다. 물론 아직도 미신적 세계관을 고집하며 인간의 건강한 의식을 갈아 먹는 종교나 종교인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입지는 차츰 약화되고 있다. 이직 미신적 세계관으로 생활을 영위하는 종교인이 있다는 것은 인간의 소외를 재생산하는 사회의 구조가 해결되지 못
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극과 극은 통한다는 말처럼 ‘물신物神과 미신迷信’은 서로 상부상조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종교의 본분은 무엇인가? 말할 것도 없이 현대인의 이탈된 자기 모습을 되찾게 하는 일에 있다. 소외된 인간이 미처 깨닫지 못하는 물신숭배의 환상을 떨구게 하여 참으로 자유인이 되게끔 하는데 있다.

자세를 바로 하여야

굳이 사회를 총체적으로 인식하지 않더라도 종교인들은 정신적 지도자 임을 자처한다. 특히 현대에 있어 불교로 대표되는 동양의 종교 또는 사상에 대해 차츰 중요하게 인식하는 이면에는 환상을 지양히려고 요구하는’ 인간의 휴머니즘에 대한 갈망이 배여 있다. 어떤 이들은 불교야말로 가장 과학적인 종교 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그말은 자칫 물신 신앙적 오해를 사게 한다. 오히려 과학의 이름으로 인간을 끝없는 경쟁의 벼랑으로 모는 일체의 사회적 현상을 부정하고 새로운 사회의 정신을 형성할수 있는 대안으로서 불교의 가능성을 찾고 있는 것이다. 진정 불교가 과학적 종교이기를 바란다면 출가 사문은 사회에 대한 인식이 바로 서야한다. 물신의 손짓에 현혹되어 자신을 소외시키고 있
는 현대인에게 흔들림 없는 정신적 지도자로 바로 서야한다.
우리가 출가자의 정신을 강조하고 깨어 있는 자로서의 경책을 아끼지 않는 까닭도 한편으로는 본래 면목을 확고히 찾는 것이며, 한편으로는 대중의 정신적 길잡이로 부족함이 없기 위해서이다. 굳이 ‘상구보리 하화중쟁 의 뜻을 달지 않아도 이미 머리를 깎고 잿빛 옷을 입기로 작정한 그 순간부터 기존의 사회가 강요하는 질서를 부정하는 선언이다. 우리는 세탁기를 저마다 소유하기 위한 경쟁 사회 (Gemein-schaft)를 거부하고 단 한대의 세탁기라도 함께 쓰는 공동체(Gosselschaft)를 선택했다.
승가공동체의 질서 속에서 인간의 본•래면목을 참구한다는 것은 인간의 정신을 도처에서 덮고 있는 정신적 압제에 대한 도전이다. 그 길을 자처한 출가자가 오히려 소외된 인간의 군상을 닮으려고 한다면 그는 승가의 정신을 근본으부터 망치는 마군이다.
우리가 공부를 히는 데 있어 인접 학문을 습득하는 것은 체體를 더 풍부히 하기 위한 용用의 수단이지 그의 반대는 성립이 될 수 없다. 역시 도시 등지에서 대중과 일상 생활하는 것도 승가의 기본생활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지켜져야 한다. 곧 승가공동체가 추구하는 목적을 위배하는 파격이란 어떤 명분을 달더라도 미화할 수없다.
그렇기 때문에 승가의 교육은 엄격한 질서를 요구한다. 마찬가지로 교육자는 더욱 철저해야 한다. 사회의 교육을 얼치기로 본받는다든가 교육자의 자질에 추호라도 흠집이 있어서는 안 된다. 행자 교육에서부터 인접 학문을 배우기까지 승가 정신의 투철한 체득이 제대로 실현되지 않는다면 대단히 심각한문제이다. 사회에 대한 인식을 바로 하고 정신의 지도자로 바로서기 위해서라도 승가 교육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그런 차원에서 ‘소쩍새 마을`과 관련하여 중앙승가대의 일부 관계자들이 뒷돈을 챙긴 사건은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중대한 사안이다. 승려의 교육을 담당한 기구의 일원이 세속적 비리를 저지른일이 대체 있을수 있는 일인가 그것은 승가공동체의 정신을 근본부터 흔들수 있는 행위이며 승가를 사회의 소외 구조에 편입하는 정신적 압제에 다름 아니다.
대중의 공양 답해 법공양을 주는 위치가 무엇이며 현대사회 속에서 승가 정신의 구현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철저히 되새길 필요가 절실하다. 그것을 회피한다면 대중에게 환상적인 행복을 줄 뿐 현실적인 행복을 주지 못하는 종교 또는 종교인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