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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 백암산 백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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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의 풍광과 진경 - 이호신 1995년 10월 164호
한 줄기 소낙비가 그리운 팔월 초순, 전남 장성군 북하면 약수리 백양사 길목은 연일 사정 없는 불볕더위로 녹음마저 숨에 절인 듯 지쳐 있었다. 장성댐이 마치 늪지처럼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터라 이곳 논농사의 어려움을 생각하며 산문을 항해 오르는 걸음 또한 무겁다. 백양사를 그리려고 미리 여러 자료집을 뒤적이고 가람의 형세를 가늠해 보아서인지 첫 길임에도 꽤 낯설지 않았다.
길목의 왼쪽 계곡에 물이 넘치면 작은 폭포를 이룰 법도 한 쌍계루의 전망이 아쉬운데 극락교를 넘어서자 이내 천왕문에 이르렀다. 대가람 백양사大伽藍白羊寺는 해강 김규진의 글씨이고 벽에는 가을빛이 짙은 백양사 전경이 그려져 있다.
범종각과 종무소 앞에서 맞이한 거대한 보리수나무가 우화루 사이에서 불국토의 상징으로 다가오는데 스님들의 요사인 열선당을 끼고 대웅전에 이르자 온 날이 장날인지 때마침 단청 불사로 그만 철망에 갇힌 꼴이어서 아쉬움이 갑절이다.
이어서 칠성각과 극락보전을 돌아보고 대웅전과 마주한 명부전에 털썩 주저 앉으니 아뿔싸! 가람 배치에만 신경쓰느라 잊었던 백암산 백학봉이 어느새 천혜의 바위로 자리했는지, 빠뜨린 눈을 그제서야 비벼 떴다. 이른바 학바위로 불리는 수려한 암봉은 백양사 형국에 있어 연꽃 봉우리에 행당되는 것으로 주변 산자락은 마치 백학봉을 향해 흘러 내리고 있는 것만 같다.
해가 넘어가기 전에 서둘러서 산중암자 가운데 제일 높고 역사가 오래 된 운문암雲門魔을 먼저 오르기로 했다
이 곳 천연기념물로서 보기 드문 비자 나무숲이 도열하고 조릿대가 살강대며 한나절의 열기를 식혀 준다. 암자에 당도하자 서옹 큰스님의 활달 한선필의 현액이 지친 기운을 돋구어 준다.
마침 운문암은 하안거 해제를 하루 앞둔 대중들이 저녁 공양중이었다. 오던 길을 굽어 보자 산 아래 용맥이 굽이쳐 흐르며 백양산 봉우리를 향해 치닫는데 봉우리 아래로 큰절이 가물거리며 보인다. 스님의 배려로 백양사에서 제일 작은 체구의 서옹 큰스님을, 그것도 단식 참선중에 뵙고 보니 선열의 가피에 힘입은 듯 안중의 근심은 한갓 바람과도 같다. 오늘날의 시대 문제는 무엇보다 `참사람의 길’로 풀어가야 한다는 말씀을 가슴에 담고 물러 나오자 어느새 사자봉 능선 위에 보름달이 걸려 있었다.
큰절 청운당에서 잠이 깬 이튿날 아침엔 대숲 속에서 다홍빛 배롱나무가 하늘거리며 어떤 것은 무더기로 물 위에 떨어진 것이 그림 같고, 수련이 만개한 연못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화폭에 담아 보았다.
새날의 우물을 찾아 목을 축이고 돌아보자 우물 뒤의 향적전과 강원인 화엄전이 보이고 대웅전 뒤뜰에는 팔정도를 상징한 팔각팔층탑이 이채롭다. 또 그 곁에 세운 ‘백양사석가사리탑비명병서白羊寺釋迎舍利搭陣銘井書’는 해서체로 된 추사 김정희 글씨의 집자로서 오늘의 백양사를 있게 한 만암 대종사의 노고와 발원을 헤아리게 하였다.
백양사 뜨락에는 나무마다 명찰을 달고 있는데 살펴보니 영산홍, 매실나무, 석류, 반송, 백당나무, 동백나무, 자목련, 눈향나무 등이 눈에 띄고 특히 비자나무는 이 곳이 집산지임을 쉽게 알게 하였다.
큰법당에서의 하안거 해제 법회를 끝으로 산문을 빠져나와 전경을 살펴 보려고 스님들께 맞은편 산길을 물었으나 도무지 감이 잡히지를 않는다. 하는 수없이 짐작반으로 산을 올랐으나 키를 넘는 가시덩굴에 시야를 놓치고는 땀범벅이 되어서 도로 절마당으로 내려서고야 말았다.
허탈감에 싸여 산문을 떠나던 길에 우연히 국립공원 관리 담당자를 만나 마침내 백양사 전경이 한눈에 드러나는 산중턱을 찾게 되자 지친 육신이 영혼의 희열을 억누르지 못한다.
현장에서 먹을 풀면서 어두워질 때까지 치어다보고 바라본 백암산 백양사는 천혜의 명소로 연꽃이 피어나는 형국 속에서도 화심에 들어와 앉았다. 이 조화로운 산천에 의지한 가람을 내 무딘 붓 끝으로 그려냄이 도리어 산사의 정
경을 왜곡할까 한편으로 두려워졌다. 일제에 의한 「조선사찰 삼십일본산 사진첩」에서 보여주는 1920년대 백양사
가람이 지금껏 크게 변함이 없는데, 단지 나무가 많이 들어서고 산문 초입의 초가 마을과 밭이 사라졌을 따름이다.
백양사는 사계절 중에서도 만추의 풍광이 경이롭다거늘 나의 첫 걸음은 시작일 뿐, 남은날의 기약속에서 다시 붓을 들고 찾을 것이다. 아마도 지금쯤 백양사 산천은 가을 채비로 불붙기 시작 했을 것만 같다. 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