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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주의의 원종(圓宗) 설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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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상 수상작 - 김호성 1989년 07월 89호
Ⅳ. 원종에 대한 임제종
① 원종의 성격과 임제종의 성립
원종의 성격은 “불교연구회의 발전적 해체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조직되었으며, 일본색을 탈피한 조선불교에 맞는 실질적인 교단의 통할 기관으로서 설립되었으며”) 또 “한국 승려들의 꾸준한 포교활동과 종단운영에 대한 자주의식의 발로였다고 할 수 있겠고, 더 나아가서는 종래의 억불정책의 이미지를 쇄신하여, 한국불교가 확고한 전통사상과 맥락을 같이 하게된 것이다.”)고 평가되어 왔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본고에서의 고찰에 의한다면 그와 같이 긍정적으로 성격을 규정짓는 것은 대단히 부적절한 것으로 비판받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실제로 원종의 전신(前身)인 불교연구회의 성격부터가 일본 정토종에의 참여에 의해서 알 수 있듯이 친일적인 것이었으며 당연히 불교연구회의 회원이 그대로 참여하고 있는 원종의 성격을 자주적인 것으로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원종의 성격을 평가함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원종 성립 초기의 성격에 대한 문제인데, 김순자씨와 같이 그것을 자주적인 것으로 평가한다면 불교연구회(친일)→초기 원종(자주)→후기 원종(친일)로 될 것이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것처럼 초기 원종 역시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낭인 다께다에 의해서 설치, 조종, 지도 받은 꼭두각시 집단이며, 통감부의 인가를 얻고자 애쓰고 있었던 것이므로 결코 자주적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연구회(친일)→초기 원종(친일)→후기 원종(친일)에 이르면서 시종여일(始終如一)하게 친일적 성격을 띤 것으로 평가되어야 옳을 것이다.
본고에서는 원종의 성격으로서, 원종의 일본인 고문 다께다의 책략에 촛점을 맞추어서 논지를 전개시켜온 바 그가 원종의 초기부터 의도적으로 계획. 추진하여 성립시키고 추대를 받아 고문이 된 것이므로, 이미 원종의 일본 제국주의 꼭두각시 집단으로서의 성격이 분명해졌다고 생각되며 다시 한번 더 강조해 둔다.
원종의 성격이 이처럼 분명해지자, 원종에 대항하여 조선불교계 내의 저항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원종의 조동종 연합진을 기폭제로 하여 한용운, 박한영, 진진응 등이 주동하여 전라도 승려들을 중심으로 증심사에서 승려대회를 열고자 하였으나, 홍보 부족으로 대회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에, 1911년 1월 15일에 영남과 호남의 승려들을 모아서 송광사에서 총회를 열고, 원종을 부정하고 임제종(臨濟宗)을 세우게 되었다. 우선 임시
종무원을 송광사에 두고 선암사의 김경운(金擊雲)스님을 관장으로 선출했으나, 연로하였으므로 한용운이 관장대리가 되었다.
임제종은 광주등지에 포교당을 설립하는 등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1912년 5월 5일 쌍계사에서 제2차 총회를 열고, 임시 종무원을 범어사로 옮겼다. 이와 같은 반원종(反圓宗)의 임제종 운동은 원종측에는 대단히 큰 충격으로 작용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다께다는 이 임제종 운동에 대응하기 위하여 「원종육제론」을 저술했음은 앞에서 언급한 그대로 이다.

②임제종 운동의 의의
원종이 조동종과 연합하고자 했을 때, 조선불교는 조동종이 아닌 임제종이라고 하면서 원종의 행위를 ‘매종역조‘ (賣宗易祖)라고 비난하며 임제종을 설치한 이들의 전통인식에도 사실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조선불교를 임제종이라고 한 것은 태고보우(太古普愚)가 중국 임제종의 석옥청공(石屋淸珙)에게서 법을 이어왔기 때문에, 태고보우의 법손(法孫)인 조선불교는 임제종이라고 부르짖었던 것인데, 비록 그렇다고 하더라도 서산(西山) 이후의 산가승단(山家僧團)이 임제선 일맥(一服)으로만 일관한 것은 아니며 선교를 겸수하였던 것이다. 다만, 원종보다는 임제종이 좀더 조선불교의 전통에 의지하려고 했었다는 비교우위에만 인정될 뿐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종에 대한 임제종의 의의를 선종 내부의 문제로만 사사화(私事化)시킬 수는 없으며 그렇게 될 경우 올바른 평가를 내릴 수 없게 된다.
원종의 성격이 제국주의 지배를 위해 그 전위인 조선낭인 다께다가 설치, 경영 방식이나 조선불교의 통제를 통한 정신의 지배라는 목적에서는 동일한 것이었다
다섯째, 이와 같은 원종의 성격은 조선 승려들의 자각에 의한 자주적인 종단이었다고 결코 평가할 수 없으며, 따라서 원종은 초기에는 일본색을 탈피한 자주적 종단으로 출발하였으나 한일합병으로 인한 꼭두각시 집단으로 인식될 때는 그에 대한 임제종운동의 성격도 반(反)제국주의적 맥락을 띠게 되는 것으로 새롭게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그와 같은 차원에서 논자는 임제종 운동의 역사적 의의를 다음 두 가지로 정리하고자 한다.
첫째, 노약(老弱)한 조선불교, 잠자던 조선불교에 일대 경종을 울린 한국불교사상 최초의 조직적인 운동이자 의식운동으로서 이후 모든 근대적 불교운동의 연원훤이 되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만해 한용운이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음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조선불교에 청년운동이 있는 것은 역사적으로 소고(爛考)하건대 시일이 그다지 없지 아니하다. 그 남상(濫觴)으로 말하면 지금으로부터 약 20년 전 조선불교의 역사적 패이지를 돌려놓은 유명한 임제종 운동………그리하여 조선불교 청년운동은 입으로 전하고 마음으로 받는 훈련 기간의 잠재세력으로 십 년의 성상(星霜)을 지나다가 경신년(1920) 6월에 불교중앙학교 학생을 중심으로 경성에서 결성되어 유수한 사찰에 지회를 두게 되었으니, 이것이 구체적 형식으로 나타난 것이 불교청년 운동이다.“
즉, 임제종 운동의 정신이 불교청년 운동으로 계승되었음을 회고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임제종 운동 참여자들 스스로 자각적인 의식을 갖고 있었는지는 분명한 근거 자료가 없으나, 일본 제국주의의 꼭두각시 집단인 원종에 대응하여 반대운동을 전개했다는 것은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한 항일(抗日)의 의의까지 갖는 것이다. 서울에 임제종 포교당을 내면서, “임제종의 도덕을 세계에 포교할 목적으로” 했다는 것은, 비록 나라는 빼앗겼으나 조선의 존재, 독립의 의지를 임제종을 통하여 세계에 알리고자 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처럼, 제국주의의 종교침투에 대항하여 민족의 전통적인 불교를 옹호했다는 것은, 임제종 운동의 반제국주의적 민족불교의 성격을 나타내 주고 있는 것이다.

V. 맺음말
① 문제의 정리
이제 ‘들어가는 말(I)‘에서 제시한 여섯 가지의 문제에 대하여 그 고찰의 결과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
첫째, 원종의 고문 다께다는 단순히 조동종의 한 승려로서 원종의 고문에 있었던 자가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과 지배를 위해 아시아주의의 논리로 무장하여 침략과 전위(前衛)로서 활약한 우찌다(內田良平)의 흑룡회(黑龍會)에 소속된 조선낭인이었다.
둘째, 조선낭인 다께다는 원종의 성립 이후에 비로소 고문으로 추대 받아서 취임한 것이 아니라 원종 성립을 처음부터 그 스스로 계획하고 실현시켰던 것이다. 그는 1907년 「권불교재흥서(權佛敎再興書)」를 써서 조선불교의 일본화를 의도하고 있거니와, 조선불교의 보다 효과적인 통제를 위해서 원종과 같은 통일기구를 만들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성립 과정에서도 통감부에 보내는「청원서(請願書)」,「의견서(意見書)」 등을 작성하고 있다.
세째,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원종의 명칭, 유래에 대하여 여러 가지 논의가 있었다. 그러나, 논자는 다쩨다의 「원종육제론(圓宗六諸請)」에 나타난 원종주의(圓宗主義) 종교이념을 분석, 아시아주의의 종교적 표현인 원종주의 실현이 그의 목적(이념)이었다고 보고, 그런 차원에서 원종의 명칭 역시 그가 지었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해 보았다.
네째, 원종이 조동종과의 연합을 추진한 것은 한일합병으로 인하여 장래의 조선불교의 기반이 약화될까 우려해서 조동종과 연합을 하고자 비로소 시도한 것이 아니라, 원종 성립 당시부터 다께다의 의중에는 그러한 계산이 짜여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찰령으로 인하여 무위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는데, 총독부와 다께다의 입장이 서로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총독부의 무단통치에 의한 조선불교의 직접적 지배방식이다 다째다의 조동종을 통한 연합에 의한 우회적 지배에서 부득이 친일로 전락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종여일하게 일본제국주의의 조종에 이용된 꼭두갂시 집단이었던 것이다.
여섯째, 원종의 조동종 연합 추진으로 인해서 표면화된 원종 반대운동인 임제종 운동은 단순히 교단내부의 종통(宗統)의 차이로 인한 대립의 차원이 아니라 일제(日帝)에 대한저항, 반(反)제국주의적 민족불교운동이었다는 의미까지 갖는 것이었다. 그와 같은 임제종 운동은 조선불교 최초의 조직적인 의식(意識)운동으로서 이후의 불교청년운동의 최초의 연원이 되었던 것이다.

②역사적 교훈
원종측의 친일만이 아니라, 그 이면에 조선불교를 친일화하기 위해서 일본 제국주의의 집요한 공작이 있었다고 해서, 조선불교계나 원종 참가자들이 역사적으로 면책(免賣)되는 것은 아니다. 역사의 주체는 타(他)가 아니라 스스로〔自〕여야 한다는 측면에서, 원종이 오늘의 우리에게 주는 두 가지 역사적 교훈을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불교는 무엇을 힘으로 하여, 누구를 존립의 기반으로 삼0}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이다.
이회광 등 당시 원종에 참여한 사람들은 권력에 의존해야만 불교가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조선조 500년간 억압되었던 불교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앞에 놓이게 되자, 일본 제국주의에 친(親)하지 않으면 존립할 수 없으리라는 위기감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그 결과, 그 권력의 속성이야 어떻든지 무조건 그에 종속되길 바라며 인정받기를 간청하고 있는 것이다.
「유마경(維摩經)」에서는, 불교는 중생들을 의지하여 중생들을 힘으로 하여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는데, 이회광 등은 이 점을 깊이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중생이 보살의 불국토이다. 왜냐하면 보살은 교화될 중생에 수순(隨順)하여 불국토로 삼기 때문이다.”
둘째, 불교와 민족과의 관계에 대해서이다. 민족이 침략을 당해서 민족구성원인 대다수 민중이 고통 당할 때, 이회광등 원종 참가자는 함께 동사(同事)하거나 대수(代受)하지 아니하고 홀로만 살길을 찾았던 것이다. 그들은 민족과 민중이 고통당하는 속에서도, 불교 혼자만이 살 수 있는 길은 없으며 오직 민족. 민중과 동사하거나 대수하지 아니하면 다시 살 수 있는〔死中得活〕 길이 없음을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역시 「유마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분명히 설하고 있다.
“일체중생이 병들어 고통받고 있을 때에는, 나도 병으로 고통받는다.”
이렇게 볼 때, 원종을 통해서 남아 있는-각인(刻印)된-일본 제국주의의 유산은 권력지향의 어용성(御用性)과 민중과 민족의 현실을 동사하거나 대수하지 못한 반민중성(反民衆性)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한국불교는 ‘원종‘적 불교전통을 극복하고, ‘임제종‘적 불교전통을 굳건히, 더욱 새롭게 확립해 가야 할 것이다. 그럴 때 비로소 불교 내의 일본 제국주의적 잔재는 완벽하게 청산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