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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지리산 실상사 불교유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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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찰의 명보를 찾아서 - 이태호 1995년 10월 164호
증각 홍척스님의 실상산문과 후백제 연호가 새겨진 편운화상 부도

이태호 • 황호균

고려시대 유물과유적 금당지, 강당지. 목탑지, 부도

실상사에 드러나 보이는 고려시대의 유물과 유적들은 별로 많지 않다. 중심 축에서 조금 벗어나 보이지만 축선 방향은 나란해서 또 하나의 부원으로 여겨지는 목탑지를 비롯해, 동국해 박물관의 발굴 조사 결과 고려 초기까지 올라갈 수 있는 유구라고 하는 보광전 지하에 보이는 금당지, 땅 위에 드러나 보이는 초석으로 보아 만세루터로 여겨지는 쌓탑 앞쪽의 강당지-내소사의 연래 루가 1914년에 실상사지에서 옮겨 왔다는 이야기가 전하는데 확인할 길이 없었다. 실상사에서 누각으로 보이는 유구는 이 만세루지밖에 없다-들이 그것이다. 이는 금당지와 석등 그리고 쌍탑과 함께 선종의 초기 가량 구초를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유구이다. 또 절 뒤편 마을로 가는 길가에 놓인 팔각원당형의 부도(높이 3.2미터, 보물 제36호)도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실상사에 고려시대 유적과 유물들이 통일신라나 조선시대에 견주어 현저하게 적은 까닭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다만 후백제 연호를 쓴 편운 화상 부도로 보아 왕건이 개국한 고려 정권 아래서 온전히 불사를 할 수 없을 정치적 현실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정도의 추측은 그리 억지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더욱이 고려말 14세기 후반에 남원 지방은 아지발도를 대장으로 하는 왜구의 노략질이 극심하였고, 이성계가 황산대첩에서 왜구를 격파한 공적을 기리기 위해 조선 선조 십년 1577년에 세운 황산대첩비로 미루어 왜구에 의한 문화재 훼손으로 추정해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왜구 노략질로 인한 고려 유적과 유물의 인멸은 상대적으로 많이 전하는 통일신라시대 유물의 존재 이유를 설명하기에는 불충분하다. 다만 홍척스님 탑비 비신의 파손 정도는 방불하겠다.

조선시대 유적과 유물-동종, 극락전, 아미타극락회상도, 약수암 목각탱화

조선시대의 유물과 유적으로는 동종, 극락전, 이미타극락회상도, 보광전, 약수암 목각탱화를 들 수 있다. 먼저 동종을 살펴 보자면 강회 삼십삼년 갑술(1694)년에 만든 동종은 팔백 근이며 동쪽 유곽과 동북부 보살 사이의 중간 지점에 침점으로 새긴 일본과 한반도 지도를 줄로 문질러 버린 자욱이 뚜렷하다. 이에 대한 일화가 실상사에 전하는데 그것은 실상사가 흥하면 일본이 망하고 일본이 흥하면 실상사가 망한다는 자못 호국적인 소망이 담긴 내용이다. 일제 때에 시 주지 스님이 종 하대부에 새긴 일본 지도 가운데 동경을 타종봉으로 때리면서 일본이 망하라고 기도한다는 소문이 나자 일본 경찰이 주지 스님을 잡아다가 문초를 하였고 이에 스님은 오히려 흥하라는 기도였다고 둘러대니 주지 스님을 별 수 없이 풀어 주었다. 그 뒤 줄칼로 일본지도를 깎아 버렸다고 한다. 1913년부터 1916년까지 실상사 주지로 계셨던 포광 김영수선생의 글에는 이에 대한 언급이 전혀없는 점과 일본 지도를 새긴 방식이 음양각이 아니라 침으로 점점이 찍어 그린 것은 제작 당시부터 의도하였던 바는 아닌 것이 분명하다. 일본지도를 타종하여 일본을 망하라고 기원한 호국적인 인식은 1920년대 이후의 일인 것만은 확실하다.
지금은 철불이 모셔진 극락전 건물은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인 주심포계 5량식 단충 맞배지붕 건물이다. 정면은 가운데 칸의 너비가 3.15미터로 두 짝 분합문을 달았고, 양 옆 칸의 너비가 1.70미터로 외짝 분합문을 달았다. 내부는 바닥에 마루를 깔고 뒤쪽 고주 사이에 후불벽을 설치하고 그 앞에 불단을 배치하였다.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5호로 지정된 19세기 건물이다.
극란전에 봉안된 아미타극락회 상도는 홍색 물감을 들언 비단 바탕에 금선으로 그림을 그리고 부분적으로 약간의 채색을 가한 금선묘 계열의 탱화이다. (세로 247미터, 가로 243미터)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관음과 대세지 및 지장보살을 비롯한 여덟 보살과 두 제자, 설법을 들으려고 구름을 타고 모여드는 열두 구의 사방불이 묘사된 간단한 배치를 보여준다. 밝은 홍색 바탕색과 부분적인 채색의 조화가 뛰어난 세련된 색채 감각에 탄력 있는 긴장된 선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1749년에 화사의겸 등 다섯 사람이 공동 제작하였다.
실상사의 암자연 약수암 보광명전에는 나무로 깎아 만든 아미타불탱화를 모셨다.(가로 183미터, 세로 181미터, 보물 제421호) 비교적 작은 장방형의 목판 한 매에 높은 돋을새김으로 조각하였다. 이 목조탱화는 현존하는 여섯 점의 조선 후기 목조 탱화 가운데 가장 간략한 배치 구도를 보여 주고 있다. 이 탱화는 아미타불과 여닮 보살과 두 비구가 표현 되었다. 곧 화면을 상단과 하단으로 나누어 하단 중앙에는 본존불을 중심으로 네 보살과 두 비구를 배치하였다.
본존불인 아미타불만은 거신광배와 연꽃을 등에 진 사지좌에 결가부좌한 자세인데, 이 시대에 유행하던 목조불감 안의 불상들처럼 따로 조각하여 끼워 놓았다. 두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댄 아미타연으로 따로 조각하여 끼워 놓았다. 주위에 서 계신 여덟 보살 가운데 관음보살은 보관에 화불을 모시고 보병을 들었으며, 지장보살은 승려의 머리에 석장을 짚고 계신다. 합장한 두 비구는 아난과 가섭으로 생각된다. 이 목조탱화는 원만한 상들의 단순한 배치 구도라든가 정교한 세부 조각 등 당시 성행하던 목초불감의 불장들과 비교되는 작품으로서, 조선 후기 목조탱화의 기준작품이 된다고 할수 있다.
이 밖에도 절에는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88호인 실상사 양안(토지대장)인 위토 개량성책과 백장밤 청동은입사 향로(만력 12년, 1584) 및 조선 후기 부도 다섯 기가 전한다. 절 입구에 우뚝 서 있는 석장승이 흥미로운 눈망울을 굴린다. 본디는 네 기였으나 한 기는 홍수에 떠내려가고 지금은 세 기만 전한다. 민속자료 제15호인 상원주장군(신해년, 1731)과 대장군(용정 3년 을사, 1725)을 비롯한 축귀장군이 남아 있어 장승의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이다. 장승 외에도 입석 두 기가 전한다. 하나는 해탈교에서 보면 절 오른편의 논에 석축을 쌓고 그 위에 입석을 세운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실상사 뒷마을 입구에 거대한 자연석으로 세운 입석이 그것이다. 이러한 입석과 장승은 조선 후기에 불교와 민간 신앙의 조화로운 현장 유적인 셈이다. 서진암의 석조지장, 나한상들도 비록 제작 연대는 조선 후기로 떨어지지만 토속적인 맛이 물씬하다. 실상사와 백장암, 약사암을 포함한 일원의 89,486제곱미터가 사적 제309호로 지정 되었다.

실상사를 나서면서

살상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선종 산문답게 국보 한 점, 보물 열한 건 열두 점, 지방문화재가 다수 전하지만 총림으로서의 규모를 제대로 갖추지 못하였다. 그런데 다행히 선우도량 스님들에 의해 얼마전에 화엄학립이 개설되었으며, 백장암의 선방이 예전의 명성을 되찾고 실상사에 공부하는 풍토가 조성되면 저절로 율원은 갖추어 질 것이니 실상총림實相義林을 다시 볼 날도 머지 않을 것이다.
구산 선문 가운데 최초로 개창된 실상산문의 실상사를 나서면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본다. 먼저 홍척과 수철스님의 탑비에 비신이 없는 이유가 궁금하다. 홍척스님의 경우는 지금까지 비신이 없고 수철스님의 탑비는 조선 후기 1714년에 원래의 비문을 참고로 다시 새겨 세웠는데 이를 토대로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은 수철스님 탑비의 비신은 마모 되었는지 아니면 누군가에 의해 고의적으로 피손 되었는지가 분명하지 않다. 마모되어서 다시 새겼다면 곡성동리 신문 태안사의 적인 혜철스님의 탑비처럼 옛 비신이 주변에 남아 전해야 하는데 그렇지도 않고, 수철스님의 탑비를 세울 무렵에는 이미 홍척스님 비신의 비문조차도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제자의 것만 세우고 스승의 탑비는 중건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상상해 볼 수 있는 가정은 실 상사 주변인 남원 운봉지방에 두 차례의 왜침에서 찾아진다. 홍척스님의 비신은 고려말 아지발도를 두목으로 하는 왜구의 창궐에서, 수철스님의 비신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의 일본 정규군의 침략에 의해 파손 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은 억측만은 아닐 것이다.
다음으로 중심축인 금당지, 석등, 쌍탑, 만세루와 목탑지의 기람 배치 구도의 부조화에 대한 문제이다. 동국대 박물관에서의 발굴은 아주 부분적인 벌굴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좀더 본격적으로 전면적인 발굴을 하지 않고서는 구산 선문 가운데 최초로 개창된 사찰인 실상산문 실상사의 가람 배치는 물론 초기 선종 생활사를 명쾌하게 밝히지 못할 것이다. 쌍탑과 석동은 9세기이고 금당지는 고려초이며 만세루지와 목탑지는 적어도 고려라는 추정만 가지고 실상산문 개창 당시의 가람 구조나 그 이후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의 가람구조 변천에 대한 추정은 생각지도 못할 일이다. 얼핏 보면 지금의 금당과 목탑지는 실상산문 개창 당시의 유구 위에 세워진 중창 유구라고 하기에는 구조상 많은 문제를 가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땅을 들여다 보면 쌍탑과 금당지의 중앙에 석등이 자리하고 쌍탑 외각 기단석면이 금당지의 바깥 주초석과 나란한 점이 9세기 창건시의 가람 구조로 보아도 무방하며 금당지는 고려초에 그 자리에 중창한 유구로 생각된다. 더욱이 목탑지는 급당지나 석등 그리고 쌍탑과 축선이 나란해 주원과 관련된 부원의 목탑지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쌍탑 앞에도 역시 고려시대까지 시대가 올라 갈 것 같은 정면 3미터의 다섯 칸과 측면 6미터의 한 칸짜리 만세루같은 강당지의 초석이 보이는데 쌍탑 안쪽 기단 모서리와 강당지 외곽 초석과 나란한 점이 강당지, 쌍탑, 석등, 금당지가 한 세트 중심축임이 분명하다. 그래서 실상사는 백장암과 더불어 지금까지 행해져 온 형태로의 복원 중창 불사를 한다면 자칫 귀중한 자료가 지하에 묻혀진 한국 최초의 선종가람을 파괴할 가능성이 충분하기에, 좀더 충분하고도 장기적인 안목으로 발굴도 하고 여러 전문가들의 중지를 모아 조계종이 통일신라 말의 선종에 그 뿌리를 두는것처럼 말반 무성할게 아니라 적극적인 사고와 자세를 보여 줄때이다.
셋째로는 편운스님의 부도에 후백제 연호를 사용하게 된 계기와 실상사에 고려 불적이 없는 이유와는 어떤 상관 관계를 가진 것일까 하는 의문이다. 정개 십년 경오년은 견훤이 전주에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 왕이라 자칭하던 효공 오년으로부터 십 년째 되던 경오년과 같고, 당시 후백제 견훤의 영역인 이곳 운봉 지역의 지리적 요건에서 비롯된 것으로 고려 왕초를 개국한 왕건이 후백제 연호를 쓴 실상사를 그냥 두지는 않았을 것이고, 이러한 정황이 실상사에 고려시대의 불교 유적과 유물이 거의 없는 점을 웅변해 주지 않을까 억측해 본다. 하지만 이러한 정치적 박해와 나아가셔 조선 초인 세조 십사년인 1468년 무렵부터 1679년에 벽암스님의 중창까지 폐사된 이유 그리고 정유재란 때 소실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는 고증할 길이 없다.
넷째로 동종과 철불에 얽힌 이야기에서 실상사를 호국 사찰이라고 하는 호국기원에 대한발생 연대 문제이다. 17세기 동종에 새긴 일본 지도를 타종하면서 일본이 망하라고 기원했다는 이야기와 사천 근이나 되는 9세기 철불은, 일본 후지산이 지리산 천황봉을 훔쳐보기 때문에 우리나라 기가 빠져나간다며 이를 방지하려고 천왕봉과 일직선상으로 이 곳에 안치했으며, 나라의 큰위기 때 온몸에 땀을 흘리거나 어느 때는 온몸이 방광하는 이적을 보인다는 이야기가 있다. 17세기 동종에 침점으로 새긴 기법은 제작 당시의 의도라기보다는 후대에 첨가된 그림이며 철불의 경우는 쌍탑과 관련된 금당지에 놓일 불상으로 지금 약사전이 9세기 당시의 위치가 아니기 때문에 적어도 17세기 이후 늦으면 포광 김영수 선생이 주석한 1919년 이후에 촉발된 조선독립운동의 정신과 관련 지어질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왕실과 귀족에 결탁하여 타락할 대로 타락한 교종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새로운 개혁운동이 바로 구산 선문인 것으로 알려져 왔다. 통일신라의 교종 불교가 백성의 고통은 외면한 채 왕족과 귀족의 지배 이데올로기의 도구로 전락할 때 중국 당나라의 서당 지장 스님에게 남종선을 배워 온 선승들이 앞다투어 귀국한다. 이들은 사람의 운명이란 태어날 때부터 결정되었다는 운명론적 인식의 교종 불교가 종래 귀족과 왕실의 기득권을 인정해 주는 정권유지의 도구로 전락할 때, 선종은 마음이 곧 부처이기 때문에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사상을 제공하였다. 당 무제의 폐불사건 이후에 중국 선종 승려들은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말라(一日不作一日不食) ’ 는 철저한 자세로 수행에 임했던 데 비해 통일신라 선종 승려들은 교종 불교가 종래 귀족과 왕실의 기득권을 인정해 주는 정권 유지의 도구로 전락하였던 폐단을 그대로 답습하여 왕실이나 지방 호족과 밀착히여 경제적 풍요를 누리는 등 진정한 사회 개혁에 이력 못한 까닭은 무엇인가? 그들(선종승려)의 뿌리가 교종의 화엄종 승려였기 때문에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때문인가? 아니면 경주 중심의 정치 세력 구도에서 지방 분권적 호족 세력의 성징을 재빨리 간파하여 이들의 비호를 받아 귀국한 승려들까지도 있는 등 진정한 사회 개혁에는 이르지 못하고 지방 호족의 충실한 이념적 지지자로서의 역혈이 구산선문의 실체인가. 더구나 구산 선문은 교리적으로 모순인 탑과 불상을 즐겨 만들었는가 하면 불장은 주로 철불을 앉은 모습으로 그것도 2미터가 넘는 커다란 장육상으로 제작하는 등 다소 이율 배반적인 모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중창 불사와 발굴 그리고 성보 문화재 보수공사에 대한 읍소

지난해부터 주지 소임을 맡은 운산스님이 복원 중창 모연문을 민들어 중창 불사를 추진중이고 건물을 신축하기 전에 발굴 조사를 전문 기관에 의뢰할 계획이라는 반가운 소식도 들린다. 하지만 또 하나의 걱정은 구산 선문의 최초의 가람인 실상사를 단 몇 개월 동안만 발굴하고 난 뒤 건물을 신축하려 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중요한 절터를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발굴할 만한 전문적인 기관은 문화재연구소밖에 없는데, 그 문화재연구소도 전국적으로
폭주하는 발굴 업무 때문에 전문 인력이 태부족한 실정이 우리의 현실이다.따라서 중창 불사의 계획 단계인 실상사를 비롯해서 형식적인 지표 조사를 면죄부로 밀어제낀 장흥 보림사도 함께 그 획기적인 방안이 총무원 차원에서 모색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