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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의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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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트 - 황충상 1989년 07월 89호
이상한 만남의 전경이다. 수녀와 스님이 웃으며 다가섰다.
“나오셨군요, 스님.”
“약속을 잊을 까닭이 있습니까”
“고마와요. 저쪽 벤치로 가 좀 앉지요.”
두 종교의 법복이 나란히 벤치에 앉았다.
“사람들이 이상한 눈빛으로 우리를 보는군요.”
스님이 발치로 눈길을 떨구며 어색한 듯 말했다.
“왜 거북하세요. 자리를 옮길까요?”
“아닙니다. 저들이 우리를 보고 어색해 하는 것 같아서요.”
수녀의 눈과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스님을 만나고 있으면 자비심이 어떤 것인지 느껴져요.”
그윽한 눈빛으로 스님이 수녀를 바라보았다.
“수녀님과 이렇게 함께 있으면 성모 마리아의 사랑이 이런 것이 아닐까 어렴풋이 알 것 같아요.”
자비와 사랑의 눈빛이 반짝 마주치는 순간 스님과 수녀가 동시에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이내 침묵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고즈넉한 침묵. 지극히 평온하다고 느낌 받는 그때, 침묵의 숨결이 일었다. 아, 이것이 관세음보살과 성모마리아의 숨결이 아닐까. 그럴진저, 그 숨결은 온누리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다.
벚꽃이 만개한 사월의 성당 뜰, 스님과 수녀가 앉아있는 정경은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다.
좋은 그림은 감상하는 사람의 가슴을 열어 놓게 만든다. 그리고 그 가슴속에서 살아있는 그림이 된다.
“오늘 스님을 나오시게 한 건 마지막으로 보여드릴게 있어서예요.”
“마지막이라니요. 어디로 떠나시나요?”
수녀는 대답 대신 커다란 검은 가죽 백을 열고 대학 노트 한 권을 꺼냈다.
“스님, 이 노트 첫 장에 씌인 글을 한번 읽어 봐 주실레요.”
스님은 건네 받은 노트의 표지를 넘겼다.
‘사랑하는 지성에게 뚜르게네프의 시를 적은 마음의 노트를 바친다.‘

너는 울었다, 나의 불행을 보고.
나도 울었다, 나를 슬퍼하는 너의 동정이 가슴에 사무쳐.
그러나 너는 너 자신의 불행 때문에 운 것이 아닐까
너는 너 자신의 불행을 내게서 보았을 뿐인 것이다.
-너는 울었다

스님이 시를 읽는 동안 수녀는 숨을 죽이고 스님의 반향을 살폈다.
“참으로 좋은 시군요 부처님 말씀과도 통하는 시예요 ”
스님의 시 감상은 너무나 담담했다. 그 담담한 반향이 수녀의 어떤 기대치를 무너뜨렸음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수녀의 얼굴이 그토록 창백할 까닭이 없으리라.
문득 스님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이 빛바랜 대학노트는 어떤 인과의 사연을 담고 있는가.
“다음 장도 읽을까요?”
“아니요, 됐어요.”
스님은 무연한 표정으로 돌아가 표지를 덮고 노트를 수녀에게 넘겼다. 수녀는 손을 가볍게 떨며 노트를 백속에 넣었다.
“스님, 조금 전에 어디로 떠나냐고 물으셨죠?”
“마지막으로 보여 줄 것이 있다고 해서 그렇게 물었습니다.”
수녀의 얼굴에 공허한 웃음이 스치고 지나갔다.
“스님, 제가 문제를 하나 내지요. 떠나지는 않는데 머물지 않고, 머무는데도 이미 떠나버린 것이 있어요. 그게 뭐죠?”
어느새 꺼내 들었는지 스님의 손에는 단주가 돌아가고 있다.
“묵주와 단주는 같습니까?”
이 무슨 뚱단지 같은 동문서답인가. 그러나 수녀는 스님의 물음에 진지하게 답했다.
“같습니다.”
“그렇다면 수녀님의 물음에 대한 답은 단줍니다.”
“완전한 선문답이군요. 우매한 수녀를 위해 주석을 부탁드립니다.”
스님은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제 손에서 돌아가고 있는 것은 단주가 아니라 제 마음입니다. 답이 좀 선명해지셨습니까?”
“마음. 예, 정확히 맞추셨어요.”
“그런데 수녀님,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어요. 노트를 바치는 대상은 있는데 정작 바친 사람은 기명을 하지 않았네요.”
맑기만 하던 수녀의 눈에 파문이 일면서 생기가 돌았다.
“스님, 이 노트는 본디 그 주인에게 돌려지기를 희망한답니다.”
순간 스님의 손에서 단주가 맺었다. 그리고 심상치 않은 정적이 스님과 수녀를 한 동아리로 묶었다.
순수한 정적. 마침내 스님의 입에서 신음처럼 한 여자의 이름이 불려졌다.
“지성이 … ”
수녀 아가다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이건 꿈이 아니야, 환희의 표정, 그 볼에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스님은 이제야 오년 전 본인으로 돌아왔어요. 저 성당 뜰, 기억나세요?”
스님은 깊은 명상에 잠길 때처럼 지긋이 눈을 감았다.
“시월 이맘 때, 저 뜰에서 데모 선봉에 섰지. 그리고 병원에서 깨어났을 때 뇌에서 꺼낸 최루탄 파편을 보였지만 나는 아무 것도 기억할 수 없었지요. 기억 상실 그 요양 차 산사를 찾은 것이 오늘에 이르렀다는 기억의
끈이 이어져요.”
수녀의 손이 스님의 손을 잡았다.
“우린 이제 어쩌지요?”
스님과 수녀는 마주보았다.
“이대로 좋을지 우리는 돌아가 답을 얻어야 해.”
수녀와 스님이 벤치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스님은 관음의 미소를 짓고, 수녀는 성모 마리아의 미소를 지으며 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