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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공간에서 야단법석을 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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뜰앞의 잣나무 - 동봉 1989년 07월 89호
야단법석을 쳐야 한다. 한바탕 벌여야 한다. 내적 공간과 외적 공간이 분리된 곳에서가 아니라 안팎이 없는 공간, 하늘과 땅이 맞닿은 공간에서 부처를 뽑는 작업, 부처를 찾아내는 시험을 쳐야 한다. 부처를 길러내는 사업을 해야 한다. 부처님에 의해서 중생이 길들여지는 게 아니라 중생들에 의해서, 중생 속에서 부처를 찾아내는 것이다. 부처가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 아니라, 뭇 중생이 부처를 길러내는 것이다.
부처를 찾아내는 작업은 반드시 법당(法堂)을 필요로 할 것이다. 법당이란 글자 그대로 진리의 곶집이기 때문이다. 진리가 뒹구는 곳, 진리가 박혀 있는 곳, 숨겨져 있는 곳이 법당이다. 사방이 벽으로 가리워지고 불상이 안치된 곳만이 법당은 아니다. 진리의 탐구, 불법의 교화가 진행되는 곳은 어디나 다 법당이다. 우리는 너무나도 법당 자체만을 추구해 왔다. 한정된 면적을 가진 법당, 내적 공간과 외적 공간이 차단된 법당, 어느 누구의 소유로 지명된 법당을 찾아왔던 것이다.
바로 여기서 소유권의 다툼이 비롯되었다. 자기의 소유로 만들고 싶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은 먹물 옷을 입은 스님에게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가 없다. 봉은사, 신흥사, 선암사, 대흥사, 보문사들에서의 사태는 모두가 소유권에 대한 인간의 본능이 빚어낸 조금은 낯뜨거운 일들이었다. 그러한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야단법석을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하는 데서 시작된다 하겠다. 사찰이란 사개념이 아니다. 사찰은 중생 모두가 부처가 될 수 있도록 보존하고 키워야할 중생 모두의 것이다. 따라서 사찰은 분명히 공개념에 속하며, 사원의 부지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요즈음 부동산 투기가 심하게 일고 있는데, 토지는 공개념이지 어느 특정인의 소유개념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잘 생각해 보자 태어나면서 이마에 토지 소유권,부동산 소유권을 써 붙이고 나오는 사람은 없다. 죽을 때 부동산을 갖고 가는 사람도 없다. 어느 하나도 가져가지 못한다. 동산(動産)도 어떤 의미에서는 모두가 함께 누려야 할 공개념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데, 하물며 부동산이야 말해 무엇하랴. 우리의 선조들 중에는 이러한 사실을 잘 아는 분들이 많다. 여말 선초의 사대부들이 행한 부의 축적과 권력의 횡포는 대단한 것이었다. 이러한 시대에서 비록 권력에 의지하기는 했어도 모두 함께 나누어 갖는, 그리고 더불어 사는 삶을 실천하려고 노력하였던 분이 바로 위대한 선각자 신돈(辛旽)화상이다. 그는 균전제(均田制)의 실천자요, 교정일여(敎政--如)의 덕치(德治)를 부르짖었던 위대한 고승이었다. 우리는 초기 조선조사대부들, 특히 갖고 있던 수많은 토지를 신돈화장에게 빼앗긴 부르주아 지주계급들이 조작한 역사에 의해 신돈화상을 요승(妖僧)으로만 배워 왔다. 우리는 유생들에 의해 저질러진 그러한 왜곡된 불교역사, 불교 문화사만을 배워 왔기 때문에 불교가 이 땅의 민중들에게 얼마나 큰 일을 했는지는 모르고 있다.
자, 불교를 보자. 열려진 공간에서 야단법석을 떨었던 것을 보자. 지금도 은해사니 해인사니 하는 대가람에서는 큰 행사때 괘불(掛佛)을 밤에 내걸어 모시고 법회를 진행하곤 한다. 아무나 와서 참여할 수 있는 야단법석이다. 닫혀진 공간, 제한된 공간에서는 아무나 참여할 수 없는 경우도 있지만 열린 공간에서는 무한하다. 누구나 와서 부처를 뽑는 과제를 쓰고 응시할 수가 있는 것이다. 가진이, 못가진이, 귀한이, 천한이, 배운이, 못배운이, 시골사람, 도시사람, 가축, 곤충, 새 들이 모두 함께 참여할 수 있다. 시원한 바람, 뭉게구름도 참여할 수가 있다. 이와 같이 누구나 함께 참여할 수 있는 것이 야단법석이다
중국에 고봉원묘(高蜂原妙. 1238-1295)라는 고승이 있었다. 그는 한 산을 열고 가람을 세워서 주지로 취임하여 개당보설(開堂普說)을 하게 된다. 현재 강원(講院)의 사집과(四集科) 텍스트의 하나인 「고봉화상선요(高峰和尙禮要)」의 첫 대문에 이 보설이 나온다. 보설이란 상, 중, 하의 모든 근기 중생에게 두루 이익을 입히는 교설을 말한다. 그러므로 특히 개당보설에는 그 설하는 이의 기본적인 사상이 함축되어 있기 마련이다.
어떤 수좌가 고봉화상에게 방거사(願居士)의 오도송(悟道送)을 인용하여 물었다. 방거사는 중국의 불교역사 가운데 재가불자 우바새로서 충분히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선각자로서 인도의 유마거사, 우리나라의 부설거사와 더불어 삼대거사로 꼽히고 있다. 다음은 방거사가 마조 도일선사(馬祖道一禪帥)를 참예하여 도를 깨닫고 지은 게송이다.

시방이(十方)이 함께 모여
낱낱이 무위(無爲)를 배우나니
이것이 바로 부처를 뽑는 마당이라
마음 비워 금의환향하도다.
十方同聚會 箇箇學無爲
此是選佛場 心空及第歸

“스승이시여, 여기에 사람을 위한 사상이 함축되어 있습니까?”
“암, 있구말구!”
“그렇다면 어느 구절에 담겨 있습니까?”
“처음부터 한 구절씩 다시 물어 보게.”
“어떤 것이 ‘시방에 함께 모임‘입니까?”
“용과 뱀이 섞여 있고 범부와 성현이 뒤섞여 참여한 것이다.”
“어떤 것을 ‘무위를 배운다‘ 하겠습니까?”
“입으로는 부처와 조사(祖師)를 삼키고 눈을 건곤(乾坤)에 두루 놓은 것이다.”
‘어떤 것이 ‘부처를 뽑는 마당‘입니까?”
“동서가 십만이요, 남북은 팔천이다.”
“어떤 것이 ‘마음을 비워 금의환향‘함입니까?”
“용모를 움직여 옛길을 드날리고 적연한 경계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언구(言句)마다 제종(請宗)에 계합치 않음이 없군요.”
“자네는 어느 구절에서 자취를 보았는가.”
“억!”
“이놈, 결국은 막대기로 달을 치고 있구나.”
여기서 특히 주의해야 할 점은 이 고봉화상의 대답 속에 담겨진 의취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부처를 뽑는 선불장(禪佛場)은 고봉회장의 대답처럼 동서와 남북이 탁트인 곳이다. 십만이니 팔천이니 하는 숫자 놀음에 놀아나는 바보가 될 필요는 없다 그것은 무한히 넓다는 의미이므로 온갖 세계가 다 부처를 뽑는 마당이다. 그래서, 안팎이 막힌 공간이 아니라 탁트인 공간이며, 구름이 끼고 비가 내리면 모르되 맑게 개인 날이라면 하늘과 대지가 맞닿은 곳에서 누구나 참여할 수 있도록 베풀어지는 백일장이다 여기서 부처와 조사를 논하고 우주와 인생에 대한 실체를 한 눈에 파악하는 것이다. 무위(無烏)란 무제약적 원리다. 누구나 불성을 지닌 여래장체성(如來藏體性)이라면 세상에 굽힐 게 없고 파악하지 못할 게 없다. 부처도 조사도 우리와 같은 생리적 구조를 갖고 있는 똑같은 인간이다. 생리적 구조가 같다고 하면 사고하는 능력도 동일하다. 무엇 하나 뒤질 게 없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부처는 번뇌가 사라진 진여자성체(眞如自性体)요, 우리 중생은 번뇌가 함께한 진망화합체(眞妄和合体)이다. 그러나 이 차이는 실로 엄청나다.
수좌가 다시 고용화상에게 물었다.
“스승이시여, 그 얘기는 그만하고 오늘 여기 서봉(西峰)에 시방이 함께 모여와 부처를 뽑는 마당을 여셨으니 마침내 어떤 상서(祥瑞)가 있습니까?”
“산하대지와 삼라만상과 유정무정(有情無情)이 모두 성불하느니라.”
“다 성불한다면 무엇 때문에 저는 아직 부처가 되지 못했습니까?”
“네가 만약 성불했다면 어떻게 대지로 하여금 성불하게 할 수 있으리요.”
“그러면 제게 무슨 허물이 있습니까?”
“상주(湘州)는 남쪽에 있고, 담주(潭州)는 북쪽에 있느니라.”
“제가 참회 좀 해도 좋겠습니까?”
“좋다, 참회하라.”
수좌가 일어나 절을 하자 고봉화상은 느닷없이
“사자새끼는 흙덩이가 날라온 곳을 향해 달려들어 사람을 물지만, 개는 영악해도 흙덩이를 쫓는 것이다”
하였다.
말에 속지 말아야 한다. 특히 ‘말에 속지 말아야 한다‘는 이 말에도 속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서 한마디 덧붙인다.
“열린 공간에서 야단법석을 떨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