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그 자체만으로도 매우 부당한 것이다. 현담의 교체론이 법상유식의 재탕, 특히 본성론적 측면의 재탕이라는 증거는 「法茒」에 나타난 四重出體와 현담 교체론을 대조해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교체론에 관한한 유식과 화엄은 동일한 사고방식을 갖고있다. 이것은 화엄교학이 ‘독립된 방식으로 완결된 유식교학의 보편성‘에 힘들이지 않고 의존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한 증거에 불과하다. 화엄의 독자성은 교판에 의한 五敎會通의 방법과 理性과 事相의 無礙라는 새로운 방법으로 특정 지워진다. (사실 이 또한 天台의 변용, 심하게 말하면 天台와 法相의, 그리고 몇가지 잡동사니 이론들의 얼치기식 짬뽕이 화엄교학이 아닌가도 싶다.) 현담교체론도 유식교체론의 본성론적 해석에 첨가된 無礙와 海印 정도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취집현현의 한 측면만을 始敎로돌리고, 그 본성론적 해석을 원교의 원융으로 독자적인 해석인 양 가장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화엄교학의 교체론은 두 가지 커다란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 하나는 유식교체론에 대한 부당한 자의적 해석이요, 또 하나는 본성론적 전환이 안고 있는 맹점이다. (본성론적 교학의 허구성을 드러내 놓는 일이야말로 이 글을 쓰는 가장 큰 목적 중의 하나이다. 본성론적 사고방식의 폐해는 교체론같이 구체적 당면 문제로부터 촉발된 부분에서 특히 극명하게 드러난다. 경론의 확실성 해석의 기초와 그 기술 적 전략 따위를 구체적으로 물어야 할 상황에서 眞心의 無漏나 보편성, 本性에 기초한 事相의 무애함 따위로 얼버무리는 것은 문제 해결을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는 태도와 같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名句나 이에 기초한 논리, 分齊나 作對를 통한 구조적 분석 및 종합 등의 구체적인 수단들을 거리낌없이 사용한다. 이 수단들은 현실적으로 한계를 갖고 있지만 본성론적으로 밖에 보장되지 않는다. 본성은 오히려 이 한계를 지닌 수단들에 의해서만 입증된다. 이것은 분명한 모순이다.) 오랜 세월 동안 우리 불교의 한 지주를 형성해온 화엄교학이 이러한 부당한 기초 위에 형성되어 있다는 사실은 경이스러운 일이다. 당시에야 정당하다고 받아 들여야 할 정당한 이유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그 정당성의 기준이 상식적으로도 붕괴된 오늘에까지 그 부당함이 묵인된 채로 화엄교학의 권위가 무비판적으로 곳곳에 만연되어 있다는 사실은 더욱 놀랍다.
(나)說者와 聽者를포괄하는 唯心- 一乘의 두가지 四句
본질과 영상을 상대시키는 해석은 인식작용에 대한 유식교학 특유의 구조적 분석방식에 의존하는 것이다. 聞者(讀者라 해도 상관없다.) 내부에서 전변한 見相二分의 現前性을 기반으로 聞者 외부에 의타기한 因으로서의 본질(외적대상)을 가르침으로 假立하지만 현실적인 가르침의 수행은 문자 내부에서 전변하는 文義相으로 이루어진다. 다만이 文義相의 근거를 본질교와의 관계에서 찾는 것이며 본질교 자체에 대해서 문제삼지는 않는다. 이때 이 관계를 본성의 보편성 위에 확립하려는 시도가 본성론적 전환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현담에서는 문자 내부에서의 唯心義를 밝혔듯이, 이를 說者에게까지 확장하여 眞心이라는 포괄적인 원칙 아래 묶어 버린다. 이것이 說聽全收의 두 가지 四句이며, 四敎의 唯心義와 圓敎의 唯心義를 구별했던 야심의 전말이다. 가르침이란 행위가 설청 양자의 상대적 작용으로 이뤄진다는 점에서, 양자를 하나의 테두리 속에서 해석하는 것이 합리적이며, 유식의 해석으로부터 일보 전진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다만 본성론적 眞心의 확대적용에 불과하며, 상대시킨 두 개념을 무애의 원칙에 따라 논리적으로 해소해 가는 의례적인 회통방식의 반복일 뿐이다. 相郞과 相入의 無礙로 해명되는 眞心의 보편성이 등장하지만, 이는 心眞如의 보편성을 부연 설명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튼 현담에서는 同敎와 別敎, 相郞과 相入의 두가지四句로 나누어 설명한다. 물론 여기서는 眞心을 주제로 삼고 있기는 하지만 그 해석의 골격은 理事無擬, 事事無擬體와 동일하므로 세세한 해명은 해당 항목으로 미루고, 두가지 四句만을 간결히 소개하고자 한다. (그 기본 논리는 의리분제의 四法界觀에 의존한 것이며 각 句마다 經論의 문귀들을 해석, 근거로 내세우고 있다.)
㉠同敎四句一 相郞義一理事無礙로 해석한 眞心과 가르침
즉, 대화의 상대자인 佛과 樂生은 眞心을 共有하고 있으므로 眞心이라는 理의 측면에서 설과 청, 불과 중생이라는 事法은 차별이 없다는 것(眞心을 매개로 설청, 불중생은 相卽 無礙)
㉡ 別敎四句一相入義一事事無礙로 해석한 진심과 가르침
「探玄記」에서 배워온 이 두四句는 원래 같은 내용을 부연한 것이다. 원래 相卽相入은 理를 매개로 한事와 事의 관계를 설명하는 방법이다. 이를 이사무애와 사사무애로 배대한 것은 同敎와 別敎라는 교판에 따른 분류를 의식한 탓인 듯하다. 이렇게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된 경우들의 나열은 그 속에 흐르는 사고방식과 의도를 이해하기 전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고 그만큼 오해의 소지만을 안고 있을 뿐이다. 여기서는 다만 그 사고방식의 골격이라 할 수 있는 法界觀의 원리들이 이미 완결되어진 형태로 가르침에 보편성을 부여하고 있다는 점만을 밝혀 둔다. 가르침에 선행하여 해석의 원칙들이 존재한다는 사실, 즉,理와 敎의 역전은 본성론적 교학의 중요하고도 필연적인 양상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