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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승가대학 종범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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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김영옥 1995년 10월 164호
추분을 며칠 남겨 놓지 않은 이즈음에 지상에 내리찍는 햇빛의 의미는 녹록한 것이 아니다. 혹독한 물난리를 겪은 뒤로 가을걷이를 포기한 곳도 없지 않지만, 이즈음의 하루 햇볕은 벼 백만 섬을 익히는 소중한 것이다.그 가을걷이 속에는 내년에 심을 볍씨의 종자도 포함되어 있을 터 아닌가.
자연 절기로는 이러한 때인 지난 9월 15일, 경기도 김포군 김포읍의 금정사 경내에서 중앙승가대학 신축 캠퍼스 기공식이 있었다. 중앙승가대학 명예학장인 석주 큰스님 ,월주 총무원장, 송산 승가대학장등 여러 스님을 비롯하여 , 정계와 관계 인사들이 고루 침여한 가운데식은 세 부로 나뉘어 성대히 진행되었다. 중잉승가대학의 새 캠퍼스 마련은 곧 학력만 인정 받는 각종各種 학교가 아닌, 정규 대학으로서의 면모 일신을 뜻하니 , 불교계 최대의 숙원 사업의 하나가 이루어지게 되는 뜻 깊은 자리였다. 1부의 고불식과 2부의 기공식에 걸린 시간은 두 시간 남짓, 점심 공양과 함께 3부의 뒤풀이 공연이 끝난 뒤에 만난 종법스님은 이미 땀까지 들인 얼굴로 고요하였다.
승가대 불교학과 교수인 그가 강의를 시작한 것은 80년 9월부터였다.
79년에 “중앙승가학원”의 이름으로 시작된 돈암동의 보현사 시절부터 80년도와 영화사 시절 그리고 81년도부터 자금까지의 개운사 시절을 함께 해 오면서 “힌국의 승려 교육현장”을 몸소 체험한 형편으로 또 다른 감회가 있을 법한데 그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다.
“그 동안 몇 번 이 곳에 와 봤지요.”그래서 그렇다는 밀씀이신가. 산중에 자리한, 천 년이 넘는 역사의 고찰 분위기에 익숙한 스님들로서는, 가까스로 마련한 부지이기는 하나 아쉬움이 없을 수 없겠다. 아직은 오가기도 수월찮은 여건에다, 무엇보다 쉼 없는 비행기 이착륙 소리가 낯설고 걱정스럽다.
“비행기 소리도 많이 들어야 다른 웬만한 소리에도 구애 받지 않는 강인한 힘이 생깁니다. 새나 울고 하는데 있다가 갑자기 비행기 소리를 들으면 당황하게 돼요.”
그러면서 스님은 잠깐 웃었는데, 깎은 듯이 고요한 얼굴에서 불현듯 나오는 스님의 웃음에는 사람을 무장 해제시키는 맑고도 밝은 힘이 있다. 그러나 산중사찰 찾으면 으레 듣곤 했던 풍수지리적 요건은 어떠한지에 대한 우문에 스님은 곧 다시 “깎은 듯”해졌다. “풍수라는 게 부처님의 법으로 볼 때는 그게 다 자업자득이고 인과응봅니다. 완력으로 현실을 바꿔 나가는게 불교지요.”
법문 한 자락이었다.

46년생으로 올해 쉰살인 종법스님은 태어난 곳은 청양이나 육이오전쟁이 일어나자 ‘살길을 찾아’ 부모 형제들과 함께 공주군의 두메로 들어가 화전을 일구며 살았다. 마곡사가 머잖은 그 속에서 아랫마을 아이들과는 달리 .열 채 남짓 되는 이웃집 아이들과 함께 “삼차 대전이 일어날 것이므로” 서당 공부만 했다.
절과의 인연의 불씨는 아마도 마곡사였으리라. 초막에 사는 화전민 아이의 눈에는 그 절집이 대궐이었다. “이런 별천지에서 사는 사람들은 어떤 공부를 하는가. 여기서 공부하면 필경 대단한 것을 얻으리라.” 아이의 생각이 그러하였다. 또 하나의 불씨는 마을 근처의 암자에서 살면서 아이들에게 천자문을 가르친 어느 고절한 스님이었으리라. 그 스님은 그를 일쑤 마곡사로 데려가서는 절을 하게 했다. “얘야 왜 절인 줄 아니? 절을 해서 절이다.염불 신앙을 하던 스님으로서 밤 새워 염불을 하곤 했던 스님은 “갈 때”를 미리 알고, 극락세계 서방정토가 있는 서쪽으로 머리를 둔채 마지막을 맞았다. 그가 입산하기 전이었다.
나이 열여덟에 “문득” 출가하여 갑사로 갔으나 그는 곧 다시 통도사를 찾는다. 삼남이녀의 형제 가운데 맏이였지만 그는 부모님이 ‘맏상주’를 포기할 무렵에야 생사만 알렸을 뿐이다. 그 무렵의 스님 마음은 그로부터 많은 세월을 보낸 뒤에 세워진 것일, 불교에 대한 그의 지금 생각으로 짐작만 할 따름이다.
“이 세계에는 여러 가지 다른• 문화가 있는데, 문화란 관념적으로 만들어 낸 생각이 형상화된 것입니다. 건축, 공예, 그림 , 문학 따위가 모두 그렇지요. 불교가 참 좋은 것이 , 바로 그 관념 자체를 건드렸다는 점입니다. 지금의 문명 발달 추세로는 천 년이 지난 뒤의 삶의 구조를 예측하기 힘든데, 변하지 않는 것은 인간의 심리 작용일 것입니다. 무엇을 추구하고, 이루어지면 싫증이나 허무감을 느끼고, 그러나 또 추구하는 마음의 순환 말이지요. 이게 수만 년 동안 되풀이되어 온 것 아닙니까. 일반문화가 욕구, 희망, 의지 따위를 채우는 과정의 집적이라면, 불교는 욕구 그 차제에 대한 점검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것입니다. 그 자체의 부질없음을 깨우쳐서 무한한 정신 세계의 고양으로 도했던 게 불굡니다.” 통도사에서 벽안스님을 은사로 수계하였다. 이미 사서를 떼고 갔으니 통도사의 강원 생활은 어려울 게 없었다. 강원 과정을 끝내고, 두세 해가 지난 뒤인 70년에 스물 다섯의 나이로 강사가 되었다. 그 이듬해 강원의 강주가 되기 전까지 사미과와 시집과를 대상으로 치문, 초벌침자경문, 서장, 도서절요, 선요 따위를 가르쳤다.
그 일은 어렵지 않았으나 그의 재주를 눈여겨본 은사스님이 그를 위해 마련한 상당 법문자리는 여간만 부담스럽지 않았다. 청법이니만큼 노스님들의 깍듯한 삼배 절을 받고 법상에 올라 앉은 자리라 식은땀이 날 수밖에 없었다. 글을 잘못 새기거나 허튼소리로 객기를 부린다든지 하면 은사 스님은 어흠 하고 기침을 하신다. “은사스님이 법문을 들어 주면 상좌의 법문이 늘지 않을 수가 없다’는 산문의 가르침을 몸으로 체험한 셈이다.
그렇게 시작하여 대학에 몸담고 있는 지금껏 많으면 한 달에 열 번까지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설법을 했다.
그의 말법은 어조의 높낮이가 골라 듣기에 편하고, 내용은 옮기면 바로 글이 될 만큼 군더더기가 없고 정연하다. 설법의 내용은 84년에 신문 지상에 발표한 글들과 함께 「불교를 알기 쉽게」라는 제목의 책으로 묶여 나왔는데, 출판사의 광고 문안임을 감안하더라도, 부처의 십대 제자 가운데서 설법에 가장 장한 자로 손꼽힌 부루나에 비견될 만큼 뛰어났던 것이다. 이 책은 불교 전반에 대한 이해의 길잡이로서 사부대중의 아낌을 받아 여러 차례 중간되었다.
그는 한때 총무원 중앙상임포교사 소임을 맡은 적도 있다. 그러나 “절법은 포교의 한 부분”으로서 , 자신은 “설법은 했어도 포교는 안 했다”고 굳이 밝혀 놓는다. 포교란 “마을속에 살면서 그들과 함께 생활하고 기도하면서 해 나가는 불사”인데 , 그는 큰절에 살면서 법회가 이루어진 곳에 가서 설법만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지나쳐 갈 법도 한 일에서 조차 이렇게 “짚고 넘어가는” 그의 일상적 태도는 학승으로 살을 불이기 전 초발심 때에 뼈를 세워준 벽안스님의 가르침 덕분일 듯하다. 경봉스님의 맏상좌로서 통도사 주지 , 그리고 종회의장 및 동국대학 이사장직을 맡기도 했던 벽안스님은 무엇보다 “사리가 아주 밝으셨던 분”으로 그는 회고한다. 행정승으로서 교학에 큰 관심을 보였던 분은 아니다. 처소에 경봉스님 글씨의 “청백가풍淸白家風” 이라는 현판을 걸어 두었던 은사 스님에게서 “철저함과 명확한사리 분별력”을 배웠다.“은사스님의 기본 철학은 `발전’ 보다는 `화합’ 이 우선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화합이 깨지면 발전이 필요 없다는 거지요. 발전 위주, 능률 위주를 앞세우는 젊은 사람들이 어느 시대에나 있기 마련이고 보면, 조화로운 발전을 위한 바탕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은사 스님을 생각할 때마다 되새겨 보게 됩니다.”

종범스님이 지금 승가대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은 조게종사 한국불교사, 원효사상, 불전연습의 네 과목이다.
부속 기관인 불전국역연구원에서는 유마경을 강의하고 있다. 학교에 몸담고 있는 처지인 만큼 그의 관심 영역은 연구와 강의가 되겠는데 , 그가 요즘 천착하고 있는 것은 조선 불교의 사상사이다. 팔십년대에는 강의와 설법에 치중했지만. 구십년대부터는 연구에 더 골몰하고 있는 셈이다. 89년도에 조게종사를 가르치면서 교재이자 연구의 밑자료로서 「조계종사자료집」을펴 낸 것을 시작으로, ‘나옹 선풍과 조선 불교’ , ‘조선 시대 선문법통설에 관한 고찰’ , ‘저산대사의 돈점관’ , ‘조선 중, 후기의 선풍에 관한 연구’ , ‘임제 선풍과 서산 선풍’ ‘태고 보우의 선풍에 관한연구’ 등 한 해에 두세 편의 논문을 발표하는 왕성한 연구 활동에 진력하게 된다.
그가 말한 대로, 조선 불교는 근대 불교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을 뿐만이 아니라, 신라, 고려 불교를 계승한 것이므로 한국 불교사를 총체적으로 조명하는 데 매우 중요한 시기이다. 그러나 신라, 고려 불교에 비해 조선 불교에 대한 학문적 관심은 상대적으로 빈약하여 한국 불교학의 균형 잡힌 성장을 위해서도 극복해야 할 과제인 만큼, 그의 관심과 천착은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연구 행위의 내용을 짐작케 하는 것은 아직까지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조계종 종조 문제에 대한 그의 견해이다. “지금까지의 논의가 지나치게 피상적이어서 불교사 연구가 진행되어 조계종의 실체가 해명되면 저절로 사라질 것”이라는 것이다. “조계산 송광사를 조계종으로 적고있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조계산 수선사라고만 되어 있을
뿐입니다. 보조가 조계산을 열었던 만큼 우리나라는 구산 선문이 아니라 조계산을 추가해서 십산 이라고 해야
할것입니다. 보조스님은 정혜 결사를 통하여, 선과 염불을 분리하는 등 선풍을 정리하고 선의 이념을 고취시켰다는 점에서 선종 사상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분이죠. 그러나 그 이전에도 조계 선풍이 존재했던 만큼 종조라고는 볼 수 없어요. 태고스님도 선풍을 중흥시킨 조사는 되지만, 조계 선풍의 선사 가운데서도 태고스님의
후손이 아닌 사람도 많아요.” 그리고 그는 그런 논란 자체에 대해, ‘조선시대 선문 법통설에 대한 고찰’의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경책한다. “불교의 법통은 받은대로 보존할 수밖에 없는 혈통이 아니며, 한 사람에게 받아서 한 사람에게만 전할수 있는 왕통이 아니다... 법통은 원천적으로 자오지증의 바탕위에서 형성되는 일이다... 이러하기에 법통에는
전수보다는 오증惜證이 중요하다.
자오자증한 도인들에게 신물信物 수수는 한낱 미변사요, 외변사에 불과하다. 석존이 누구로부터 신물을 받을 리가 만무하고, 지눌어나 원효도 다른 이로부터 신물을 전해 받고 다른 이로부터 물려 받은 법만을 옹호하고 선양한 분들이 아니다. 이들은 모두 `학무상시學無常師, 자오자증’의 입장에서 고인들의 법풍을 폭넓게 수용하셨다. 종승은 본인이 주체가 되어 사승關乘하고자 하는 법을 스스로 사승하고 선영하는 일이다.
한국 불교 교육의 빈곤을 그는 “연구부재”에서 찾는 사람이다. 승가 전통에 알맞은 “색깔 있는 연구”의 방법은, 문헌학에 근거를 두되 사회적으로, 생활적으로 활용할 방안을 모색하는 미국식보다는, 문헌을 검통하고 정리하는 면에서 크게 앞서 있는 일본식을 참고한다-그러나 일본의 상업화되고 세속화된 불교 교육의 생명력을 많이 잃고 만 점은 유심히 경계한다.
그리고 우리의 “전통적 방법”의 모색에 깊이 천착한다. 원효 등 우리나라의 수많은 고승들의 저술 행위의 전제가
‘질천을 이루기 위함, 수도와 교화를 더 진실하고 올바르게 하기 위함’이었음을 소중히 끌어안는 사람이다.
일반 불교 학자와 승려 학자를 구분 짓는 잣대가 되는 것도 바로 이점이다. 승려들은 학문을 하되 , 그것은 수행의 방법으로서 수행 과정의 하나라야 한다는 것이다. 남으로부터 어떤 평가를 받든지 간에 , ‘자기 소신과 자기 원력에 의해 학문적인 결과를 내 놓아야 한다’고 그는 믿는다. “공부하는 학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산중이라는 특수 영역이 없어져 버리고 평준화된 문화속에 놓여 있는지금, 이 사회 속에서 불교를 지키거나 일리고 전하기 위해서는 일반 교양 습득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세속화 되어서는 안 되죠. 그건 아무 의미가 없어요. 그 위에 전통적인 수도의 교양을 마음과 몸으로 익히는 게 불교 교육의 생명입니다.”
대중은 없지만 그는 대개 아침 여섯시쯤이면 일어나 혼자 예불을 드린다-그가 묵고 있는 곳은 정릉의 조그만 암자이다. 그리고 일 주일에 사흘 승가대에서 강의를 하거나, 하루는 두 시간쯤 버스타고 전철 타고 수원의 가톨릭 대학에 나가 대학원생을 상대로 강의를 한다. 설법은 청해 오면 한 달에 두세 번쯤 응한다. 그리고 보통 열한시 반쯤에 잠든다. 그의 생활은 단조로운 편이다. 그러나 그 생활이 짜내는 베의 무늬는 단조롭지 않다. 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