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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언어로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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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림을 위한 사색 - 현기 1989년 07월 89호
민중의 언어는 일에서 태동된 언어입니다. 일에서 깨어난 언어야말로 진실한 언어입니다.
민중들의 언어는 꾸밈이 없습니다.
꾸밈이 없는 언어는 사물의 본질에 가까이 가게 합니다.
따라서 민중의 언어가 모든 사람들의 언어가 될 때 새로운 사회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보살님, 며칠 전의 전화 통화에서 남해 보리암으로 기도를 떠날 계획이라고 하셨는데, 다녀오셨는지 궁금합니다. 오년 만이라고 하셨었지요. 왜 갑자기 기도하실 마음을 내었으며, 왜 보리암을 택하셨는지요. 보살님의 신행을 지켜 본 저로서는 너무도 급작스러운 결행이신 지라 선뜻 이해가 되질 않았습니다.
기도란 본래 부처님에게서 무엇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 부처님 앞에서 일상의 참회를 통하여 발원과 서원을 바로 세우기 위함이지요. 더욱 간단히 말하면 부처님과 나와의 대화시간인 것입니다. 여기서 부처님과 나는 구원자와 구원받을 자로 존재함이 아니라 부처님은 살아 있는 이 세계의 거울이요 나는 그 거울 속에 현재의 실상을 비춰보는 것입니다. 곧 세계(부처)와 나와의 대화 속에서 내가 가야 할 올바른 길을 찾아내는 것이 기도인 것입니다. 그러나 요즈음 유명한 기도처로 몰려드는 사람들의 모습 속에는 다분히 부처의 영험을 기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영험의 근저에는 항상 개인주의와 출세주의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험있는 부처를 찾아다니느라 온갖 고생을 다합니다. 그들은 기도처를 기도하는 장소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영험의 기
도터로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소유한 것(권력, 명예, 돈 등)이 많으면 많은 사람일수록 이러한 생각을 더 깊게 갖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소유한 것을 지켜내기 위해서일까요. 그러나 지난번의 편지에서 잠깐 언급하였듯이, 소유한 것이 적으면 적은 사람일수록 그의 기도는 부처를 대상화시키거나 우상화시키지 않습니다. 그들의 기도는 꾸밈이 없습니다. 그들의 기도는 일상의 생활을 있는 대로 드러내 보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부처는 이미 불교의 부처가 아니고 그들의 한이며(창조적 의미에서) 세상의 염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이미 이름지어진 부처가 아니요, 현실에서 잉태되는 부처가 자리하게 됩니다. 조선 후기의 미륵 신앙은 이렇게 하여 태동된 것이 아닐런지요. 아무튼 가진 자들의 기도가 일반적으로 개인주의와 출세주의를 쫓는 신비적 형식이라면, 가난한 자들의 기도는 전체 현실 속에서 나타나는 모순에 대한 한과 염원으로 표출되는 것 같습니다.
보살님, 보살님께서 기도를 떠나신다기에 잠깐 생각해 본다는 것이 너무 비약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어차피 이즈음 세태에서 종교는 현실을 왜곡하고, 지배에 종사하고, 대중의 자주적 능력을 마비시키는 형식과 의식이 더 많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데, 굳이 기도에 의미를 붙이는 것이 억지인 듯합니다. 아무쪼록 이번의 기도에서 많은 발견과 깨달음이 있기를 기원하는 뜻으로 받아들여 주십시요.
보살님, 저희 사무실이 대학로에 있는 것은 잘 아실 것입니다. 차에서 내려 사무실까지 가려면 온갖 술집, 찻집을 거쳐가야 합니다. 이곳을 지날 때마다 저는 무식함을 느끼게 됩니다. 수많은 간판 중에 제가 알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한글 간판 두어 개 정도뿐이니까요. 어떤 간판은 우리말이 전혀 없어서 읽을 수조차 없습니다. 그래도 알파벳은 아는지라 띄엄띄엄 읽을라치면, 같이 가던 사람이 그것은 프랑스어라나요. 만약 어떤 사람이 여기서 만나자고 한다면 저 같은 사람은 앞에 두고도 찾지 못할 정도니, 여기가 도대체 어느 나라 땅인지 분간을 하지 못하겠습니다. 못 배운 것도 서러운데, 거리마저 나를 배신한다 생각하니 가슴속에서부터 분한 마음이 일어섭니다.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제일 필요한 것이 의식주와 언어라면, 저는 이 거리에서 만큼은 분명 언어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저를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간판뿐이 아닙니다. 유학생들이나 지식인을 만나면 간간히 튀어나오는 그놈의 외국말들 때문에 뜻을 잘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도 자존심 때문에 아는 체하고 넘어가지만, 알기는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또 있습니다. 신문에 난 책 광고가 제법 그럴듯하여 서점에 가서 책을 사보면, 도대체 무슨 말을 한 것인지, 앞장을 겨우 이해하고 뒷장으로 가면 뒷장에서는 앞장을 잊어버리고, 도대체 너무 어려워서 읽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실 사회인들 쪽에서보면 불교의 언어만큼 어려운 언어가 어디 있겠습니까. 큰스님 법문도 초심자가 대하면 귀신 호두 깨먹는 소리이겠지요.
보살님, 제가 아는 스님 한 분이 법문 중에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호텔하면 크고 넓고 깨끗한 것으로 생각하고 여인숙하면 구질구질하고 더러운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그리고 조깅하면 아래, 위로 멋진 운동복에 머리에 띠를 두르고 사쁜사쁜 뛰는 산뜻한 모습을 연상하고 뜀박질하면 허리춤을 부여잡고 고무신을 질질 끌며 뛰어가는 모습을 그리는 것 같다. 그리고 토일렛 하면 거울과 세면대가 있고 화장지가 준비되어 있는 깨끗한 곳으로 생각하고, 측간이나 뒷간하면 신문쪼가리에 구더기가 득실득실한 냄새나는 곳으로 생각한다. 호텔을 번역하면 여인숙이나 여관이 될 것이고, 조깅은 아침 뜀박질이 될 것이고, 토일렛은 측간 통시가 될 터인데, 무엇 때문에 사람들이 다르게 연상하는가.”
이것은 1945년 이후 미국이 이 땅을 지배하면서 미국의 문화를 유학생, 선교사 학교 등을 통하여 교묘하게 심어 놓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이 민족을 용이하게 지배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들의 문화를 이식시킨 것이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미국 문화의 침투 속에서 민족적인 것은 미개한 것, 미국적인 것은 훌륭한 것이며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도록 길들여졌기 때문이며, 이렇게 사십여년이 흘러오자 언어까지도 미국의 노예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보살님은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저로서는 올바른 지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이 땅의 언어는 병들어 있습니다. 지배자들에 의해 반공이데올로기의 병에 들어 있고, 미국 문화에 의해 노예 병이 들어 있고, 자본주의 병폐에 의해 상품화되어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종교인의 언어, 지식인의 언어, 교수들의 언어, 지배자의 언어 등, 그들은 저마다 스스로의 언어를 폐쇄하고 있습니다. 다만 한가지 개방되어 살아 있는 언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민중들의 언어입니다. 민중들의 언어는 꾸밈이 없습니다. 꾸밈이 없는 언어는 사물의 본질에 가까이 가게 합니다、
보살님, 요즈음은 너나 활 것 없이 자식들의 교육에 대해 너무도 열성적이라 온 가족이 교육병에 들 정도입니다. 그러나 예전에는 이 땅의 농민들이 배움이란 그저 말하고 쓰고 셈할 줄만 알면 되는 것이라고 푸념(?) 섞인 논조로 자식들에게 가르치던 시절이 있었음을 생각합니다. 물론 이 말속에는 남들처럼 자식을 학교에 보내지 못하는 설움이 표현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또한 이 말 속에는 막연한 설움뿐만 아니라 지식인들에 대한 거부감이 농축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거부감은 그들의 일을 통해서 바라본 지식인들의 한계를 발견해 낸 모습이었겠지요. 그래서 그 설움은 자식을 편하게 살게 해주지 못하는 슬픔이며, 거부감은 일하는 자만이 세상의 근본이 될 수 있다는 확신과 깨달음이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낫 놓고 ㄱ 자 모른다는 속담 속에서도 지식인과 일하는 자의 모습이 확연히 드러납니다. 일하는 자의 입장에서 보면 낫을 놓고 ㄱ 자를 묻는다 하여 ㄱ 자가 먼저 생각되어질 리가 없습니다. 낫을 자기 일의 도구로 먼저 생각함은 당연하겠지요.
이 속담은 무식한 것, 무지한 것을 비유하고 있지만 질문을 받는 사람은 농촌사람을 전제하고, 묻는 사람은 일정 정도 교육되어져 있는 사람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따라서 ㄱ 자를 모르는 사람의 무지보다는 교육되어져 있는 관념의 한계를 먼저 지적해야 할 듯합니다.
오늘날 지식인의 한계가 바로 습득된 지식으로 사물을 규정하려고 하는 데 있음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바로 교육을 많이 받으면 관념이 커지고 단단해지지요. 그래서 언어는 규격화되고 고정되어 있습니다. 철학이 모든 관념의 벽을 허무는 작업이요, 본질을 캐내는 작업이라고 하면서도 철학의 언어들이 더욱 복잡해지고 어렵게 되는 것은 관념의 허물과 본질을 논리로서 얻어내려 하기 때문이 아닌지요. 그래서 저는 민중의 언어야말로 관념화되지 않고 본질의 언어, 일의 언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민중의 언어는 일에서 태동된 언어입니다、 일에서 깨어난 언어야말로 진실한 언어입니다. 일하는 자는 일 속에서 사유하고 일 속에서 말하고 씁니다. 그러므로 일과 사유와 언어는 분리되어질 수 없습니다. 일을 떠난 사유가 관념이고, 관념은 언어를 추상화시킵니다. 민중이 살아 있는 실체이며 변화의 실상이듯, 민중의 언어는 결코 어렵거나 정체되지 않습니다.
보살님, 비록 언어는 사회적으로 약속된 기호이지만, 기호를 통해서 연상하는 사물이나 일은 개인이 갖고 있는 사회적 신분에 따라 따르게 느껴집니다. 제가 민중의 언어를 강조하는 것은 민중의 언어야말로 꾸밈과 논리에서 벗어나 현장에 가장 가까이 가 있는 삶의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민중의 언어가 모든 사람들의 언어가 될 때 새로운 사회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민중불교운동도 경전의 해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요, 논리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경전에 쓰여진 언어의 우상성을 타파하고 불교 스스로가 민중이 되어서, 거기서부터 창출되는 불교적 힘이 민중불교운동이 되어야 합니다. 민중불교 철학이나 이념, 이론 등은 그곳에서 잉태되어야 합니다. 모든 “민중” 운동의 이론은 논리가 아니라 현장의 실천이어야 합니다. 석가 입멸 후기 불교의 이론이 아무리 완벽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민중의 현장 속에서 창출되어진 것이 아니기에 때론 공허하고 관념적인 느낌이 드는 것이 아닐런지요.
보살님!
일과 언어의 통일을 이루기 위하여 좀더 적극적으로 역사의 현장, 민중의 현장으로 들어갑시다. 공해와 병에 찌든 언어, 노예가 되어 버린 언어를 구제합시다.
내내 평안하시길 빕니다. 아울러 보살님 생활과 집이 언제나 기도처가 되기를 간절히 빕니다 모든 기도의 언어들이 민중에 대한 사랑과 일치를 이루기롤 지극히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