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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의 사도 바울, '최보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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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유종교 산책 - 황선명 1995년 10월 164호
‘최 보따리’ 는 동학2세 교조인 해월 최시형을 일컫는 별명이다. 최제우가 참수형을 당한 뒤 동학도들은 정부의 모진 탄압을 피해서 모두 지하로 숨어드는데 그 가운데에도 특히 수운의 유업을 이어받아 지리멸멸한 교단을 재건 할 책임을 짊어진 최시형은 관헌에 쫓기는 몸이 되어 소백산 깊숙히 은신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이때를 가리켜 천도교에서는 은도시대隱道時代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숨어서 도를 전파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말이 은도시대이지, 삼십여 년에 걸친 장구한 세월이었다. 최시형의 ‘보따리’ 라는 별호는 그래서 생겨났다. 괴나리 봇짐에다가 해어지면 갈아신을 짚신을 수십 컬레 매달고 최보따리는 삼십여 년 동안 소백산골 구석구석을 누볐다. 그러면서 스승 최수운의 가르침을 전파하고 몸소 실천하는 데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오늘날 널리 알려진 「동경대전東經大全」의 원판본은 은도 시절에 강원도 인제에서 최시형에 의해 판각된 것이라한다.
최시형을 한국의 사도 바울이라고 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로 그럴 만한 까닭이 있다. 사도 바울운 바로 기독교를 반석에 올려 놓은 인물이다. 신약성서의 삼분의 이가 모두 사도 바울의 서한문이라는 점만 보아도 만일 그가 없었더라면 기독교가 오늘날과 같이 세력을 떨칠 수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마찬가지로 최시형이 없었더라면 동학이 그나마 명맥을 이어서 동학혁명의 기틀을 마련했을지 참으로 의문이다.
바울은 본디 예수를 생전에 만난 적이 없으며 따라서 그의 제자라고 말할 수도 없다. 사도 행전 9장 18절에 보면 바울이 다마스커스에서 그리스도 교인들이 집회를 갖는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을 죽일 심산으로 시리아 사막을 가로질러가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갑자기 히늘에서 “사울(바울의 본명)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뇨’
하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그의 눈에서 `비늘이 뚝 떨어지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한다. 그 뒤로 사울은 바울이라 이름을 고치고 기독교의 전파에 힘써 지중해 연안을 네 차례나 여행하면서 나중에 로마에 가서 순교 했다고 한다. 최시형의 행적을 보면 사도 바울보다도 더 큰 고난을 이겨낸 자취가 역력하다. 사실 바울은 최시형처럼 로마관헌에서 쫓기는 몸은 아니었다. 또 그의 주위에는 늘 추구 세력이 감싸고 돌았다. 그런데다가 그는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당당히 행세할수 있는 실력자 였으며 그리이스어를 능히 구사할 줄 아는 지식인이었다.
그와는 반해로 최시형은 근본을 모르는 무식자였다. 어려서 제지소製紙所에서 일했다는 게 이력의 전부인데 어디서 그런 위대한 통솔력과 혜안이 우러나왔는지 실로 그 자체가 기적이다. 그는 동향인이자 동년배인 최제우의 가르침에 깊이 감화를 받고 경상慶縣이라는 이름을 시형時亨이라 고쳤는데, 때가 되면 뜻을 펼치게 된다는 뜻이니 은도시대의 활약을 미리 예견한 이름인 듯하다. 해월海月은 아호이다. 최수운의 문하에 들어선 해월은 정신 수양과 마음 공부 못지 않게 글 공부에도 진력해서 어지간한 선비들 뺨치는 유식자가 되었으니 이 역시 기적이라 아니 할수없다.
오늘날 천도교에서 말하는 양천주설養天主說이나 향아설위법向我說位법과 같은 독특한 신앙관은 서양 철학자 스피노자의 범심론을 무색하게 만드는 인간중심의 종교 사상으로 평가받아 마땅하다. 전자는 내 마음 속에서 하느님을 키워야 한다는 사상이고 후자는 제사를 지낼 때도 사람인 ‘내’ 가 중요한 것이니 나를 향하여 제사상을 차리라는 부분이다. 실로 여기에서 천도교의 종지인 인내천 사상이 우러나온 것이라 하겠는데 일개 시골뜨기 영감의 머리에서 어떻게 이처럼 진보적이고 위대한 사성이 우러 나왔는지 혀를 내두를 정도이다.
해월 최시형은 이필제李弼濟가 찾아와서 극성스럽게 부추켜대는 데도 결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시대의 기운을 거역할 수 없음을 판단하고 보은 장내에서 교조신원집회를 여는데 동의했다.
장내 집회는 명분상으로는 억울하게 죽은 교조 (천도교에서는 대신사大神師라고 말한다)의 원을 푼다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우리나라를 집어 삼키려고 호시탐탐하는 외세와 부정부패로 찌든 조정의 간담을 서늘케 한 쾌거였다. 그래서 구호도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와 ‘보국안민輔國安民`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도부의 노선이 대중의 거사를 주장하는 전봉준, 김개남의 남접南接과 평화적인 종교 운동에 국한시키자는 최시형, 손병회, 김연국 등의 북접北接으로 갈리면서 최시형은 나중에 동학혁명에 소극적이었던 것으로 평가를 받게 된다. 여하간 종교 지도자로서 폭력을 저주하고 평화적으로 시대의 고민을 풀어 보려던 지도 방침으로 해월 최시형은 ‘한국의 간디’ 라는 별호를 얻기도 했다.
갑오동학 혁명 뒤에 동학의 괴수로 관헌에 붙잡혀서 압송이 되는 가운데에서도 해월 최시형은 아는 체 하는 제자에게 어서 피하라는 뜻으로 눈을 깜박였다고 한다.
새벽닭이 울기 전에 `나를 세 번이나 배반할 것’이라고 수제자 베드로를 질타한 예수조차 본받기 어려운 성자의 모습이었다.
최시형의 극단적인 한 평생은 오늘날에 와서도 많은 문제를 생각하게 한다. 이미 앞에서 그를 기리켜 동학의 사도 바울 또는 한국의 간디라 칭한다고 했거니와 그는 우리 나라의 오천 년의 역사를 통해서 드물게 보이는 종교지도자임에 틀림없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는 신라시대의 원효나 의상과 같은 스님을 비롯해서 고려시대에는 보조 국사 지눌이라든지 대각 국사 의천 같은 스님이 있었다. 조선시대나 일제 때에도 숱한 종교 지도자를 배출한 게 사실이다. 프로테스탄트의 길선주 목사나 김교신 목사는 물론이고 얼마전에 작고한 함석헌 선생도 한국의 우뚝 솟은 종교지도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최시형에게는 우리 역사상 어떤 종교 지도자도 초월하는 탁월한 `힘’ 이 있었던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이렇다할 카리스마를 지니지도 않았으면서도 가혹한 시대 조건과 맞서 은인 자중으로 구름떼 같은 민중의 신망을 한몸에 모았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는 세계의 어떤 종교의 영웅도 감히 최시형을 따라 잡지 못한다. 앞서 말한 서양의 바울조차 그의 행적을 보면 성자적인 자비와 겸허한 정신으로만 일관한 게 아니었다.오히려 그의 전력이 그러하듯이 매우 전투적이고 사뭇 카리스마적인 권위로 대중 위에 군림한 흔적이 역력하다.그는 기독교의 포교를 위해서 정치와의 타협이나 시대에 아부하는 성향을 보이기도 했다.
그에 비해 인도의 간디는 은유와 겸손의 미덕으로 일관해서 신비적이고, 카리스마적인 성향에 두드러진 편은 아니었지만 수억의 인도 민중이 열망하는 독립이라는 정치적 목적 때문에 무조건 따랐다고 볼 수도 있다.
최시형이 처해 있던 상황은 전혀 그런 게 이니었다. 종교가 어쩔 수 없이 정치와 폭력의 수단이 되지 않을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조건에 맞서 은인 자중의 성자적인 은유와 겸허한 정신으로만 일관했다는 뜻이다.
이러한 점이 어느 종교 지도자도 따를 수 없는 최시형의 돋보이는 점이자, 역설적으로 그가 후배인 손병희만큼 역사적으로 평가 받지 못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