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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법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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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연재 - 김태형 1995년 10월 164호
조선 후기의 법난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라는 양대전란을 통해 승군 곧 군병불교 제도가 정착되고 이에 따른 중앙 조정과 지방관청의 탄압이 지속된 때이다.
이 시기에 있어서 조선 사회의 불교에 대한 탄압의 특징을 크게 구분하면, 첫째 풍수사상에 의한 탄압, 둘째 부당 조세부과의 탄압, 셋째 불교 문화재에 대한 훼손 행위로 나눌 수 있다.
조선 후기 사회의 특징은 양대 병란으로 인한 사회 신분구조의 급격한 변화를 들 수 있다. 곧 왜란과 호란 이전의 사회가 소수 유교 엘리트들이 집권한 신분 피라미드가 정삼각형을 이룬 사회였다면 후기는 중인 이상의 계층이 증가한 종형鐘形 구조를 보인다.
이러한 사회 구조 속에서 중앙행정 관료직으로의 진출을 통한 입신立身을 꿈꾸는 신흥 양반층들은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던 인맥과 재력의 한계로 인한 좌절을 느끼고 있었다. 과거 시험이라는 출세의 등용문은 이미 기존 권문세가들의 손아귀에 장악되어 출세의 길이 막힌 신흥 양반층들은 결국 요행을 바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와중에 나타난 것이 바로 음택풍수陰宅風水이다. 음택풍수는 쉽게 말해 묘지풍수를 말하는 것으로 조상의 묘자리에 따라 후손의 부귀공명이 좌우된다•는 풍수다.
그러나 한국 풍수의 원조이며 완성자라고 할 수 있는 도선스님의 풍수는 조선 후기의 음택풍수와는 매우 다른면을 보이고 있다. 도선스님이 일행스님으로부터 전수 받았다는 비보설에 대해 「동사열전」에서는 ‘부처님은 정신과 육체의 모든 병을 다 고쳐 주는 대의왕大醫王이다. 그의 가르침으로 봄을 다스리면 각종 재난과 질병이 사라지고 마음을 다스리면 번뇌가 없어지며, 산천 토지를 다스리면 흉함과 해로움이 변하여 길함과 이로움으로 바뀐다 고 했다. 또한 한반도의 지세에 대해 정동쪽에 위치한 삼한三韓의 지세地勢를 보면 여러 산들이 험악한 형세로 이루어진 데다가 물살 또한 급하기 짝이 없다.(중략) 혹은 미약한 것이 끊어져 격格을 이루지 못하는 형국이 있어 이는 병이 많은 사람과 같다` 고하였다. 이렇게 병든 산하를 치유하려면 부처님의 교법을 약쑥으로 삼아 땅과 물의 병을 치료해야 하며 그 방법으로는 병든 땅의 형국을 보아 부도나 탑을 세우고 절을 지어 그 숫자가 삼천팔백 개에 이르면 한반도 산천의 병통과 흠은 말끔히 사리질 것이라고 하였다.
도선스님의 비보설에 입각한 풍수사상은 개인의 영달을 위해 내린 처방이 아니라 대승적 차원의 호국적 요소가 강하였다. 이러한 스님의 사상은 후대에 와서 크게 변질되어 음택풍수로 전법 되었고 그 결과 전국의 수많은 사찰들이 신흥 양반들의 출세를 위한 터전으로 변해 갔다.
이런 풍수로 인한 폐해 가운데 대표적인 곳이 유홍준씨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도 나오는 충남 예산 가야산의 `가야산 방화 사건. 과 남연군의 묘’ 이다. 님연군은 흥선 대원군 이하응의 이버지로 흥선은 고종을 보위에 오르게 하려고 당시 유명한 지관의 계책에 따라 가야사를 불지르고 그 자리에 묘를 썼다고 한다.
이 밖의 사례를 보면 선덕여왕의 지기삼사知幾三事로 유명한 경주 사천왕사 터, 경주 남산서쪽 기슭의 창림사, 경주 남산 용길사 터, 삼소관음三所觀音의 일화로도 유명한 경주 중생사 터 등이 있다.
날로 극심해지는 양반들의 명당 찾기 행렬에 맞서 한 사찰의 스님들은 양반들이 사찰에 무덤을 쓰면 몇몇 스님끼리 계를 조직하여 그 무덤을 파헤쳐 시체를 깊은 계목에 내다 버리고 멀리 도망가는 따위의 저항을 하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 사회상을 보면 영정조 이후부터는 전국각지에서 크고 작은 민란이 자주 발생해 사회의 혼란이 극심했다. 영정조대의 조세제도 합리화 정책은 당대 조정에서만의 공염불에 지나지 않았다. 앞서 밝힌대로 사회 신분구조의 변화로 인한 조세부담 계층의 현격한 감소는 중앙과 지방 관아들의 재정 결핍을 초래하는 결과를 낳았고 이는 조세 부담 계층에 대한 과중한 조세로 이어졌다. 이런 와중에 부패한 지방 관료들은 중앙으로의 진출을 위한 치부에 혈안이 되어 필요 이상의 조세를 부과했으며 그 여파는 승단에까지 미쳤다.
한 예로 통도사의 스님들이 관아와 양반들의 토색질에 대해 경상도 수군 절도사에게 보낸 호소문을 보면 ‘양반접대와 각종 잡역 때문에 눈코 뜰 새가 없다. 관아에서는 각종 종이를 만들어 내라고 끊임없이 독촉을 하여 밥 먹고 잠잘 틈도 없다. 또 지역紙投으로 인해 한때 사, 오백 명이던 승려의 수가 지금은 사, 오십 명에 지나지 않는다. 그나마 노약자를 제외하면 이, 삼십 명이 남는데 이들 또한 밤낮없이 종이를 만들고, 양반들의 가마를 메고, 짚신과 미투리까지 토색질을 해대 견딜 수 없는 상황이다` 라고 하였다.
이처럼 관과 양반들의 토색질이 심해지자 스님들은 잡역을 피해 환속을 하거나 산속 깊이 은둔 하거나 통도사의
스님들처럼 관이나 권세가들에게 호소하는 등의 방법을 동원하기도 하였다.
한편 병자호란 이후 등극한 현종이 후시원의 관급토지가 모두 사라진 상황에서 이렇다 할 만한 수입원이 없던 각 사찰에서는 신도들의 시주나 스님들이 자체적으로 계契(관음계, 지장계, 염불계, 철성계, 미타계, 어산계 둥)를 조직하고 계금契金을 취합하여 불사 비용으로 충당하면서 사찰의 재원을 마련 하였다고 한다.
중앙과 지방 관료, 양반들의 혹독한 수탈을 겪으면서 때로는 매질을 딩하고, 옥살이를 하고, 천대와 멸시를 받아 가면서 피눈물 나게 모은 삼보정재를 못난 후손들은 쓸데 없는 종권 다툼의 송사로 탕진했던 한 때가 있었으니 참으로 부끄럽기 짝이 없다. 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