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경주에 들를 때면 차창가로 가없이 펼쳐지는 천년사직 영고성쇠의 잔영을 대하며 자신도 모르게 회상에 잠길 때가 많다. 곳곳이 누워 있는 여인의 풍만한 젖가슴 같은 유명무명의 능원(陵園)과 고색 창연한 사찰, 이끼 낀 석축과 흩어진 기와조각, 그리고 한 개의 돌, 한 줌의 흙, 아니면 하다 못 해 한 그루의 나무와 이름 모를 한 포기의 꽃잎에 이르기까지 그 옛날 찬란했던 서라벌의 역사와 맥박이 뛰논다. 경주시와 경주군 일원은 그야말로 세계 역사상 보자 드문 천연 지하박물관이라 해도 손색이 없으리라.
몇 해 전 박종해(朴宗海), 정민호(鄭旼浩) 시인과 함께 남천가에 아담한 한옥을 짓고 불교예술에 심취해 있는 신라인 윤경렬(尹京烈) 선생댁을 찾아갔을 때다. 그날도 윤선생님은 여느 때와 같이 훤 두루마기 차림에 고무신을 신고 성성한 백발의 노안(老眼)으로 열심히 불상을 조각하고 있었다.
이처럼 예술을 대하는 그분의 자세는 그야말로 ‘일도삼례(一刀三禮)’, 바로 그것이었다. 일도삼례란 불교에서 나온 말인데, 석공이 예술품인 불상이나 불탑을 조각할 때 한 번 깎고 세 번 절을 한다는 의미이다. 비록 싸늘하고 무정한 하나의 돌일지라도 석공이 산파(産婆)의 칼을 들면 돌과 석공은 일심동체가 된다. 석공의 피와 혼이 돌에 흐르고 돌의 호흡이 석공의 가슴에 와 고동친다. 적어도 우리 조상들은 그런 경건한 자세와 신앙으로 자연을 대하며 살아왔다. 그것은 곧 신라인의 자연관이다.
신라의 자장법사가 당나라에서 불법을 구하고 돌아와 황룡사에 구층탑을 세울 것을 암금님께 주청했을 때다. 선덕여왕은 여러 신하들에게 이 일을 의논하자 신하들은 “백제에서 명공(名工)을 청해 데려와야겠습니다” 하였다. 이에 보물과 비단을 가지고 백제로 건너가 초청하게 했다.
이리하여 아비지(阿非知)라고 하는 석공이 청을 받고 와서 나무와 돌을 재고, 이찬(伊湌:2관등) 벼슬에 있는 용춘(龍春)이 그 역사(投事)를 주관하였고 아비지를 도운 소장(小匠)들이 이백 명이나 되었다.
처음에 절의 기둥을 세우던 날 밤 석공은 고국 백제가 망하는 꿈을 꾸고 이상한 예감이 들어 일을 멈추었는데, 갑자기 천지가 진동하고 뇌성벽력이 치며 사방이 어두워지더니 어떤 노승(老健)과 장사(壯士) 한 사람이 금전문(金殿門)에서 나타나 그 기둥을 세우고는 자취를 감추었다. 석공 아비지는 그만 고국 백제의 국운이 다 되었구나 생각하고 그 탑을 완성시켰다. 구층탑은 구한(九韓), 즉 신라 변방의 9종의 이민족을 격퇴하려는 염원이었다.
탑을 세운 뒤 천지가 형통하고 삼한(삼국)이 통일되었으니 어찌 탑의 영검이라 아니하겠는가. 그뒤 고구려왕이 신라를 침범할 계획을 하다가 말했다.
“신라에는 세 가지 보배(신라 3보)가 있어 침범할 수 없다고 하니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황룡사의 장륙존상(丈六尊像)과 구층탑, 그리고 진평왕의 천사옥대(天賜玉帶)가 그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고구려왕은 침범할 계획을 그만두었다고 한다.
또 불국사 대웅전 앞뜰에는 두 개의 탑이 나란히 서 있다. 동쪽은 국보 20호인 다보탑이요, 서쪽은 국보 21호인 석가탑이다. 모두 통일신라시대(8세기)에 건립된 석탑으로 현대에 와서 모두 해체 복원되었지만 다보탑이 우아하고 섬세하여 그 탑신(搭身)의 아름다움이 여성미의 극치라면, 석가탑은 웅대하고 장중한 남성미의 극치라 할 수 있다.
특히 높이 8.2m의 이충 기단(基擾)의 방형(方形)인 석가탑은 화강암으로 된 삼층석탑으로 그 기단의 웅대함과 탑신의 아름다움이 서로 잘 조화되어 당시의 대표적 작품으로 꼽힌다.
석가탑을 다듬어 세울 때, 그 성스러운 불사(佛事)에 여자의 출입은 금물이었다. 불사를 맡은 석공의 아내인 아사녀(阿斯女)는 영지(影池)에 탑의 그림자가 비칠 때까지 날이면 날마다 연못가에 나와 학수고대하며 기다렸다. 탑신에 매달린 남편의 모습이라도 보고 싶은 애절한 심정이었다. 홰치는 새벽, 달 뜨는 저녁, 오매불망(寤寐不忘) 기다렸으나 끝내 사랑하는 낭군님의 그림자는 영영 나타나지 않았다. 기다림에 지친 그녀는 마침내 연못에 몸을 던졌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안 석공은 슬픔 속에 하늘을 우러러 울부짖다가 아내의 환상을 돌에 새겼다.
이토록 비련 속에 다듬어진 탑이 석가탑이다. 그의 아내가 그토록 연못가에 앉아 기다림에 몸부림쳤으나 끝내 그림자가 비치지 않았다 하여 일명 무영탑(無影港)이라고도 불리우는 탑이다.
흔히들 사랑은 국경과 이념을 초월한다고 한다. 그 숭고한 사랑을 초월하여 입신(入神)의 경지에서 빚어낸 것이 곧 불탑예술의 정수인 석가탑이요, 이것은 곧 신라인의 예술관이었다.
아~아 신라의 밤이여
불국사의 종소리 들리어온다.
지나가는 나그네여
걸음을 멈추어라.
고요한 달빛 어린
금오산 기슭에서
노래를 불러보자
신~라의 밤 노래를.
가수 현인(玄仁)이 애수어린 가락으로 부른 ‘신라의 달밤‘ 을 흥얼거리며 불국사의 백운교, 청운교의 계단 섬돌을 올라 자하문(紫霞門)에 들어서서 탑을 대하면 이내 자신도 모르게 경건하고 엄숙한 심정으로 고개가 숙여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석공의 투철한 예술정신인지 아니면 그녀의 애달픈 러브스토리 때문인지 그것은 나도 모른다.
동해의 찬연한 일출을 바라보며 무언의 염화미소(鹽華微笑)를 짓는 토함산 석굴암 불상과 함께 서라벌의 혼이 깃든 불교예술의 금자탑은 신라인의 면면한 예술의 맥으로 천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일도삼례(一刀三禮)의 경건한 예심(藝心)으로 우리들의 가슴속에 한으로 흐르고 있다. 어미를 부르는 슬픈 에밀레종과 불국사의 은은한 풍경소리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