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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암 명진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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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이윤수 1989년 07월 89호
옛문헌에 이르기를 ‘형세가 천하에 뛰어나 그 지덕(地德)이 해동에서 짝이 없어 참으로 수도에 정진할 곳’이라는 소백산맥의 한자락 가야산, 그곳에 화엄대도량 해인사가 자리잡고 있다. 해인사는 불교계의 큰어른 종정스님께서 머물고 계시며 고승대덕의 숨결이 면면하여 오늘날에 이르도록 그 향성(香聲)이 짙어만 가는 곳이다,
한동안 가물었던 대지 위에 비가 뿌리던 날, 비에 젖은 대가람을 뒤로 하고 길상암으로 향했다. 비 오는 날의비구름은 가야산과 해인사의 골 깊은 인연을 매개하는 듯한, 놓쳐서는 안 될 ‘장관’이기도 하다.
홍류동 계곡의 적송이 아름드리 숲을 이룬 곳을 지난 길상암 어귀에서, 출타했다가 돌아오시는 명진스님 일행을 뵈었다. 앞서 걸어가시는 스님 뒤로 시자들이 주욱 뒤따르고 있었고, 계단 앞에 이르자 절에서 자라는 사내아이들이 달려나와 합장하며 스님을 맞는다. 팔백개나 된다는 야트막한 돌계단을 오르는 스님의 모습은 뒷모습으로만 상상해야 했다.
그러나 삼배를 을린 뒤에 마주한 스님은 무척 엄격하고 꼿꼿한 성격일 게라는 섣부른 짐작과는 달리 부드러운 몸가짐을 하신 스님은 다정다감하고 나긋한 음성으로 말문을 여셨다.

명진스님은 팔십이년부터 팔십사년말까지 해인사에서 주지 소임을 맡아 보았다. 본디 주지라는 소임은 형식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절의 대표성과 상징성을 두루 지니는 자리라 하겠다. 한때 법보종찰 해인사의 주지 소임을 맡았던 스님은, 그런 주지자리를 놓고 아직까지도 분규를 일삼는 일이 흔한 불교계를 탓하며, 주지직이란 구멍난 자리를 ‘땜질’하여 원활하게 만드는 소임일 따름이라고 하신다.
“주지 소임을 소구스럽게 여기지 않고 마치 권위와 명예의 상징으로 생각한다면 오산일세, 산사로 한발자욱씩 발걸음을 떼어 놓으며 입산하던 그때의 마음가짐으로 살아야지, 그 심정을 죽는 날까지 곱씹지 않고서는 수행자라 이름할 수 없어, 주지라는 것은 별것 아니라 땜질하는 사람일 뿐이야.”
그래서 스님은 자고나면 분규가 벌어져 불교계의 장래를 먹칠하는 현실 속에서,
“나와 남이 둘 아니니 우리 모두가 참회하는 일부터 시작하자.”고 하신다.
때때로 삼직일을 보기도 했던 스님이지만 주지 소임은 쉬운 노릇이 아니었다. 하지만 모든 스님이 힘겨워하는 관청이나 뭇사람과의 관계를 매끄럽게 해냄으로써 명진스님은 불사를 억척스럽게 수행했다.
어떤 이들은 고풍스러운 가람하며 삭아가는 기둥이 있던 시절이 진짜 해인사였다고 하며, 오늘날 변모한 해인사의 모습에 낯설어하기도 한다. 그러나 또 어떤 이들은 옛것을 변화, 발전시켜 가는 일이 참다운 ‘전통의 계승’이라고 역설하기도 한다. 이렇듯 많은 이들은 옛것을 변하, 발전시켜 가는 일이 참다운 ‘전통의 계승’이라고 역설하기도 한다. 이렇듯 많은 이들은 언제부터인가 달라져 버린 해인사의 모습에 놀라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하는데, 실은 새롭게 들어선 거개의 건축물들이 명진스님이 주지였을 때 이루어 놓은 업적들이다.
“해인사에 종이 없어서 종을 만들려고 했지, 그런데 시작한지 얼마 안돼서 화주의 사업이 도산해 버려, 종이 완성되는 날까지 고생했지.”
뜻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해인사 대종이 가고의 어려움 끝에 완성되었는데, 해인사의 지리적 환경에 적합하게끔 과학적으로 만들어진 이 종은이제 그 소리의 울림이 아름답기로 손꼽히고 있다.
종만 뎅그마니 걸어 둘 수 없기에 종각도 지었다. 종무소 건물의 낡은 기둥을 갈고, 요사채에 보일러를 설치했다. 해인사 땅에서 거둔 낱알로 대소행사 때 떡까지 찧는 방앗간을 최신 설비로 확충하고 객실 앞마루에 먼지가 쌓이는 모습을 보고 덧문을 달아 방풍까지 겸하게도 했다. 명진스님이 지은 회관은 나중에 역사적인 해인사 승려대회가 열리기도 하였다.
어디 그뿐인가, 부처님 조성으로 한평생을 살아온 연로한 조각가에게 “언제까지 돈받고 부처님을 조성할겐가, 한번쯤 시주를 해야지.”하고 일러 어렵잖게 회관에 부처님을 모셨다.
해탈문의 서까래가 일본 건축 양식임을 발견했을 때 명진스님은 ‘치가 떨렸다’고 한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연목을 뜯어내고 한국적 건축 기법으로 다시 지을 만큼 스님에게는 꼼꼼하고 세심한 일면도 있다.
일년에 여덟 채의 건물을 완성할 만큼 대불사를 이룬 이도 드물 것이다. 이와 같은 불사가 진행될 적마다 늘 부딪치는 문제는 경제적인 어려움이었다. 그래서 ‘어찌 원만하게 진행해 낼 것인가’하는 r서이 화두 아닌 화두였다고나 할까.
“그럴 때마다 난 기도를 했어, 하루에 세 번씩, 장경각에서부터 시작해서 큰법당, 삼성각, 강원 양쪽의 부처님께 절하고 천왕문, 국사단까지 내려가 기도했지, 따지고 보면 모든 걸 기도의 원력으로 일굴 수가 있었지,\"
그 기도는 ‘오직 기도에 몰두’하며 살다 가신 고 영암 큰스님을 은사로 모신 명진스님의 대물림일 것임에 틀림없다.
길상암은 칠십이년에 영암 큰스님께서 터를 잡아주신 곳이다. 손수 스리랑카의 불사리 두 과를 길상암으로 이운해, 현재의 보궁을 짓고 모셔 놓았다. 길상암의 터를 닦을 무렵에는 심한 가뭄이 들어서 공사가 중단될 지경이었다. 이때 영암스님은 하룻밤을 내내 정진하신 뒤, 바로 물줄기를 찾는 힘든 작업을 시작해서 샘터를 만들기도 하였다. 영암 큰스님에 대한 대목에 이르자 스님은 지그시 눈을 감으며 회상에 잠긴다.
“가장 본받을 건 신심이야, 해인사 농지가 대법원에 계류중일 때 은사스님은 새벽이면 장경각에 을라 기도하시고, 일을 마친 늦은 시각이면 국사단에서 기도하셨지, 공양주가 짜증낼까봐 손수 냄비를 준비하시고 화롯불로 마지를 지으시고 기도하셨어, 그래서 승소할 수 있었던 게지,”
영암스니이 열반에 드신 지 팔주가 되는 날, 꿈에 스님을 뵈었다. 흰구름 같은 스님의 영혼이 하늘에서 인도환생하기 위해 오르락내리락 하더니 마침내 그분의 속가 고향인 울주군 근남면쪽으로 쏜살같이 달려가는 그런 꿈이었다. 다음날 맏사형이 참배차 길상암에 오셨는데 그때 샘에서 갑자기 무지개가 찬란하게 솟아을랐다. 비온 뒤도 아닌데, 무지개가 눈, 가까이에서 펼쳐지기에 길상암 가족들은 합장배례하며 영암 큰스님을 다시 뵈온 듯하여 가슴 뭉클한 감동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생전에 현상유지도 어렵던 봉은사를 크게 일구신 대선사의 뜻이 무색하도록, 상처투성이가 되어 버린 ‘봉은사’를 생각할 때마다 명진스님의 가슴은 매어질 듯 아플 따름이다. 스님을 보필하던 이들이 스님의 후광 아래서 세속적인 욕심을 채우 할 뿐, 큰스님의 근본사상에는 전혀 미몽견이기에 안타깝기 그지없다.
“큰스님은 상좌제도가 한국불교를 좀먹느다고 여기셨거든, 그래서 공적인 일에서는 항시 상좌를 멀리하셨지, 그만큼 상좌를 아끼셨다고 봐도 좋아.”
반면, 세속의 눈으로 바라본다면 말이다.
명진스님이 영암스님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또 다른 것으로는 ‘염불’이 있다. 비구, 대처 정하 이후 조계종이 선을 강조하면서 염불을 등한시해 왔음은 사실이다. 명진스님이 학인으로 있을 때, 노전스님이 다른 곳으로 떠나시자 영암스님 곁에서 염불을 거들었던 계기가 오늘 염불 제일의 명진스님을 만들었다.
“스님 곁에서 처음 염불을 하던 날, 손이 떨려서 아주 애먹었어, 혼자 할 땐 잘 되던 요령도 스님 옆에 서니 방울이 얼고, 목탁이 떨어지질 않는게야, 하다 보니 보고 배우는 덕에 큰스님 흉내를 내게 되었지.”
요사이 명진스님은 영암스님의 부도와 비석을 세우기 위해 바쁘게 지낸다.

스님은 무술년에 해인사로 옮겨와 올해로 서른 두해째를 살고 있는, 해인사 터주대감 가운데 한 사람이다. 무엇이 그토록 스님을 해인사에 머물게 하였을까.
“산은 산대로, 물은 물대로, 절은 절대로 모든 것이 날 붙잡은 셈이라 할까?”
그러면서 스님은 빙긋 웃으신다.
거기엔 그럴만한 내력이 있다.
어머니가 그를 낳은 지 이틀째 되는 날 비몽사몽간에 방갓을 쓰고 걸망을 짊어진 스님을 만났다. ‘이 애는 여덟살만 먹으면 합천 해인사로 보내라.’
자라면서 날마다, 아이답지 않게 흙을 빚어 부처님을 조각하는 일을, 일과로 삼았다. 누가 시켜서 그리 한 것도 아니고 순전히 희열을 느끼기 때문에 손수 빚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았다고 하니, 스님에게는 필연적으로 불제자의 길이 정해져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충청도에서 입산했지, 나중에 해인사로 오고 보니 오래 살던 곳처럼 느껴지더군, 마치 내가 전생에 이곳에서 살았구나 하는 느낌이 들고 어머니 품속에 들어온 그런 기분이었지,”
그래서 군에 다녀오고 잠시 거창 포교당에서 생활한 것을 빼고는 한발짝도 가야산을 벗어난 적이 없다. 오랜 시간을 가야산에 머물면서, 이 땅 불교의 심장부이며 근본도량인 해인사에 사는 일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명진스님은, 해인사가 앞으로도 눈밝은 납자를 키우고 여법한 진리를 전파하는 ‘승풍제일’의 사찰로 성장해 나아가길 기대한다.

생명이 다한 뒤에도 세세생생 부처님의 제자가 되길 서원하는 명진스님에게 바램이 있다면, 그건 가까운 장래에 양로원과 보육원을 꾸리는 일이다. 노인과 아동들이 서로가 의지하며 자비를 생활화하여 작은 외로움조차 나누어 가질 수 있으면 하는 소망은 하루하루 깊어만 간다. 그러한 연유로 스님은 더더욱 기도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기도란 부처님과 하나되는 길이지, 힘들고 어려울 때 신심을 내서 기도하면 반드시 길을 열리거든, 부처님의 원력은 위대하지, 신심으로 행하는 기도를 통해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네.”
천태만상의 번뇌를 무겁게 지고 저마다 고통스러워하는 우리네에게 명진스님은 진실되고도 간절한 신앙의 자세를 ‘기도’라는 이름으로 당부하고 계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