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설잠 김시습(雪岑 金時習, 1435-1493) 흔히 매월당(梅月堂)이라 불리우는 김시습은 승려로서보다는 유학자로 생육신(生六臣)인 유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금오신화의 저자로서, 또한 기행(奇行)과 천재적인 어린 날의 일화로 더 알려져 있다.
이와 같이 그가 세조조에서 성종 때까지 무려 30년 이상을 승려생활로 일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승려보다는 유학자의 반열에 들어 있음은 참으로 역사적인 아이러니이다.
그는 이미 3세에 시에 능했고, 5세에는 어렵기로 유명한 유서(儒書) 중용과 대학에 정통했으며 효령대군의 권고로 불경언해를 돕기도 했는데, l8세 때에는 그 당시 최고의 선승 홍준화상을 만나 선담(禪談)을 나누었으며, 그의 시(詩) 「증준상인(贈峻上人)에 보면, 이미 이때에 벌써 심오한 불교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설잠은 처음 삼각산 중흥사(重興寺)라는 선종 계통의 사찰에서 수학하였으며, 그의 저서 매월당집(梅月堂集)에 보면 나옹스님과 지공스님을 존경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따라서 그는 선(禪)적인 체험이 깊었는데, 그의 현존하는 저술들이 모두 한결같이 그의 선적인 심오한 세계를 나타내보여 주고 있다.
그가 쓴「십현담요해(十玄談要解)」나 의상대사의 저술에 붙인 「대화엄일승법계도주(大華嚴一乘法界圖註)」나 「묘법연화경별찬(妙法連華經別讚)」에서 그의 독특한 선적 해석과 탁월한 문장은 그의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중국 동안상찰(同安常察)선사의 저술인 「십현담(十玄談)」은, 본래 임제종 계열의 선서가 아니라 조동종 계열의 선서였는데, 이미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이르기까지 조동종의 흐름이 불교 내에 있었음을 시사 받을 수 있는 좋은 저술이다. 따라서 그의 저술에서는 그때까지 내려오던 임제종 계통의 선수행과 조동종의 선적 세계를 국집함이 없이 더욱 넓은 시야를 가지고 선적인 세계를 성찰하였으며, 나아가서 생활 속에 살아 있는 활선(活禪)을 주장하였다.
또한 설잠의 「법계도주」는 의상대사가 지은 법성계의 각 구(句)에 주석을 불인 것인데 그 주석이 화엄학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순전히 선적으로 주석하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또한 「법화경예찬」은 「법화경」 전 7권의 대의(大意)를 발힌 것인데, 이 또한 천태학의 입장이 아니라 순전히 선적인 입장에서 법화경의 대의를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설잠의 선적 해석 태도는 함허대사가 「금강경」과「원각경」을 선적 입장에서 주석한 것과 일맥상통하는데, 설잠은 함허의 작업을 한 걸음 더 밀고 나가 조동종을 임제선에 연결시키고, 화엄학과 천태학 또한 그 가장 핵심적인 문헌을 선적 주석의 대상으로 택하여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그보다 앞선 균여의 저술 「법계도원통기」나 고려 백련사(白運社) 제2세 천인(天因)대사의 법화경에 대한 저술을 비교해 본다면 설잠의 선적인 저술 태도가 더욱 명백해질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선적 주석 태도에서 우리는 함허와 설잠은 서로 밀접한 관계였음을 알 수 있거니와, 그와 더불어 앞서 말했듯이, 함허-홍준-설잠으로 이어지는 나옹 계열의 맥락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함허로부터 세종·세조대의 불교 사상적인 상황을 짐작할 수 있거니와, 특히 선교관(禪敎觀)의 계승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흔히 조선조에서는 억불정책으로 불교사상이 전혀 연구된 바 없을 것이라는 일반적인 견해를 수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히려 그 수난 속에서 억불에 대항하여 독특한 선적인 세계, 즉 생활 속에 살아 있는 활선(活禪)의 모습을 전개하였던 점을 감안할 때, 오히려 오늘날 미진한 불교학의 모습을 반성해야 할 입장이다.
3)보우대사(普雨大師 ? -1565)
허응당(虛應堂) 보우스님은 중종과 명종대에 걸쳐서 살았던 스님이다 스님은 숭유억불의 기세가 거세어지자 금강산과 설악산 백담사에 은거하였다. 그는 명종이 즉위한 뒤 문정왕후가 수렴청정하자 문정왕후의 천거에 의해 흥불(興佛)의 대임을 맡았던 당시의 결승(傑僧)이었다.
보우대사는 명종 6년(1551)에 강원도 감사의 추천으로 문정왕후를 만나게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유생들의 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봉은사에는 선종을 두고 봉선사는 교종을 두어 선교 양종을 부활시켰다.
보우대사는 판선종사(判禪宗事) 도대선사(都大禪師)가 되어 봉은사 주지가 되었으며, 수진(守眞)대사는 판교종사(判敎宗事) 도대사(都大師) 봉선사 주지가 되었다.
이미 폐지되었던 도첩제와 승과를 부활시키고, 그에 따라서 그 뒤 불교계를 이끌고 갈 서산대사와 같은 명승(名僧)을 배출하는 둥 역사적으로 중요한 이정표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보우대사의 활동에 대해 많은 조신과 유생의 반발과 상소가 빗발치듯하는 가운데, 명종 20년(1565)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제주도로 귀양갔던 보우스님은 그곳에서 죽게 되었다.
그러나 보우대사가 활동한 15년 동안의 불교부흥운동 및 그가 펼쳤던 사업은 한국 불교사에 큰 의의를 남기게 되었다.
그의 저술인 허응당집에서 대체로 그의 선교관을 다음과 같이 살필 수 있다.
그는 일심(一心)은 만물의 요체요 만물은 일심의 신용으로 표현하고 있다(羞一心者 萬物之妙體 萬物者一如之神用). 따라서 선이란 일심을 양성하기 위한 수행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부처님의 많은 경전 가운데에서 특히 화엄경을 높이 평가하여, 중교지망종(衆敎之鋼宗)이라고도 하고 원돈지묘전(圓頓之妙典)이라고도 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선에도 교에도 편협함이 없이 섭수해야 함을 주장하였거니와, 나아가서 유교와 불교도 근본적으로 같은 원리임으로 편협함이 없이 널리 섭수해야 함을 일정론(一正論)에서 주장하였다. 특히 보우대사는 그의 저술 일정론(一正論)에서 일(一)은 우주적 원리로, 정(正)은 도덕적 원리로 제시했으며, 우주적 원리인 일(一)과 도덕적 원리인 정(正)이 별립하는 것이라 일즉정 정즉일(一卽正 正卽一)로 파악하였다.
이러한 사상은 인즉천(人郞天)이라는 사상으로 파악되어져 ‘나의 마음이 바르면 천지의 마음도 바르게 되며, 나돼 기운이 순(順)하면 천지의 기운도 순하게 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더욱이 12시 중의 행주좌와(行往坐臥)의 일상생활에서 항상 일심〔一〕과 바름〔正〕을 가진다면, 바로 이것이 불교나 유교의 종교적 이상임을 일정론에서는 천명하였던 것이다.
이상으로 고려 말과 조선 초기의 불교사상적인 측면을 살펴보았다. 이 분야에 관계되는 논문은 아직 학계에서조차 미진한 상태이고 필자의 식견에도 적잖게 허물이 있으므로 질정을 부탁드린다.
일일이 주(註)를 달지 못했음을 사과드리며, 이 글을 쓰는 데 허홍식, 채상식, 힌종만, 김영태, 박종홍, 김지견, 고익진, 이능화, 장원규 선생 등의 저술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음을 밝혀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