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불교신도가 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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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의 방 - 이원섭
1989년 07월 89호
세상에는 종교가 많고, 진리임을 표방하는 학설이라는 것도 적지 않다. 나 같은 사람이 그런 것들 중에서 불교를 택하여 제딴에는 불교 신자임을 자처하면서 살아가기로니, 그것이 불교계에 무슨 보탬이 된다고는 할 수 없고, 또 다른 종교에 어떤 영향을 주는 일도 되지는 못할 것이다. 다만 그런 선택이 나 개인에 있어서 중대한 뜻을 지니는 것을 부정할 길 없으므로, 불교의 어떤 점에 마음이 팔렸는지 대강 내 나름의 소견을 밝혀보려 한다.
내가 먼저 들고 싶은 것은 불교가 깨달음의 종교인 점이다. 세상의 종교들은 으레 신을 내세우고 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서양에서 생겨난 종교철학은 신과 인간의 관계에서 종교의 본질을 발견코자 하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의 눈에는 무신론자라면 으레 유물론자, 공산주의자를 뜻하는 것으로 비치는 것이겠고, 따라서 불교를 알고 부터는 이를 종교로 보느냐 철학으로 보느냐는 논쟁이 생긴 것도 불가피한 일이 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모든 종교가 창조신을 내세우는데도 불구하고, 불교만이 이를 외면한 점에서 나는 부처님의 철두철미한 지혜를 읽는다. 왜냐하면 신이야 말로 가설 중의 가설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원시이래 신을 만들어 왔다、 기독교의 구약에 의하면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과 비슷하게 흙으로 빚고 숨을 불어 넣음으로써 인류의 조상인 아담을 만들었다고 하나, 실은 사람이 자기와 비슷하게 만들어낸 우상이 신이다. 물론 극도의 이상화가 행해지긴 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한도 안에서 이루어진 이상화이므로, 절대로 초월적인 존재가 되는 대신, 인격신이라는 말이 시사하는 것처럼 사람과의 연계 안에 머물러 있다. 그리고 인지가 향상됨에 따라 신의 개념이 바뀌어 가는 것도 인간이 신의 창조자인 증거다.
이를 것도 없이 기독교인이라면 펄쩍 뛸 것이고 창조주를 모독한다고 눈을 부릅뜰 것이다. 그리고 신이 창조하지 않았다면 세계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었겠느냐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계가 이렇게 존재한다 함은 기실 무엇을 못하는가. 우리네 범부가 당연히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 추호도 의심하려 들지 않는 천지만물이라는 것도, 기설은 우리 주관에 의해 파악된 인식 내용에 지나지 않는다. 카메라의 렌즈에 외부의 형상이 비치듯 우리의 눈에 외부의 사물이 잡혔고 그것은 촉각 따위로도 그 확실성이 인정된다 하여, 우리의 의식이 “이것은 존재한다”는 판단을 내린 것뿐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천지만물 따위 외부세계가 주관 측의 감각기능, 인식기능에 의존하고, 감각이나 의식이라는 것 또한 외부의 대상에 의존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시력이 변화하면 형상 또한 바뀔 것이니, 지금보다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시력을 갖게 된다면 만물은 소립자의 모습으로 보일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외부세계가 있는 중에 내가 태어나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 의존해서 세계가 존재함이니, 무엇이 이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부처님이 “일체란 십
이입니다” 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해야 한다.
그러므로 나와 관계없이 세계가 있고, 그 세계는 신이 창조하셨을 것이라는 유추는 상식(속제)의 소산일 뿐 진실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지는 있고, 내가 죽고 난 뒤에도 존재를 계속할 것 아니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여기에서 경험 자체와 경험에 대한 분별을 구분해야 한다. 가령 내가 이 글을 쓴다고 할 때, 있는 것은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사실뿐이다. 그런데도 어느 집의 가장인 아무개가 글을 쓰고 있다던가. 그가 청탁 받은 기일에 맞추기 위해 글을 쓰고 있다든가, 이 글을 쓰면 몇 푼의 원고료를 받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면, 이는 분별에 의해 굴절된 경험일 뿐, 순수한 경험 자체는 아니다. 마찬가지로 나의 외부에 천지가 있다든가 이 천지는 나의 사후에도 존속할 것이라든가 하는 것도 분별의 내용일 뿐이니, 지금 세계를 성립시키면서 세계에 의존하고 있는 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이리하여 일체를 관계성(연기)에서 파악하는 것에 의해 그 실체를 부정하고, 그것을 실체로 알아오던 집착으로부터 벗어남이 곧 해탈이요 깨달음이었던 것이어서, 거기에는 어떤 전제나 가설도 없다. 신이라는 허구에 매달리는 대신, 이렇게 맑디맑은 깨달음의 길을 제시한 종교가 어디 있었던가.
그리고 이런 길을 가기 위해서는 마음의 통일과 그것에 의한 지혜의 개발이 요구될 것은 당연하니, 덮어놓고 믿는 다른 종교와는 그 양상이 사뭇 다르다. 다른 종교가 주로 기도에 의존하는 것과는 달리, 불교가 특유의 수행론을 전개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 다른 종교의 인식론은 상식을 벗어나지 못하며 수행론 또한 기도밖에 내세울 것이 없었으려니와 자신의 마음을 조정하는 것에 의해 깨달음을 열어 가는 노선에서는 마음의 세밀한 분석과 그것을 바로 이끌어 가는 길고도 어려운 과정에 대한 고찰은 필수적이었을 것이니, 말할 나위 없이 이 분야는 불교의 독무대이다. 아뢰야식에 이르는 심증심리의 투시와 삼십 칠도품 (三十七度品)이니 오십이위(五十二位)니 하는 수행방법은 얼마나 웅대하고도 치밀한가.
그리고 빠뜨릴 수 없는 것이 부처님과 중생의 관계이다. 불교에 있어서 부처님이란 깨달은 분이다. 그러므로 성불하기 이전에는 중생이었다는 말이 되고, 우리들 중생은 성불 전의 부처님과 동등한 점에서 우리 또한 성불의 가능성이 없지도 않다는 말이 된다. 곧 깨달은 중생이 부처님이요, 깨닫지 못한 부처님이 중생이어서, 본질에 있어서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중생의 아버지니 모든 중생은 다 내 아들이다”라고 부처님이 선언하신 근거가 여기에 있으니, 부처님과 우리는 본래부터 혈연으로 묶여 있다. 그러나 다른 종교에서는 신이 명령하는 자인 데 비해, 인간은 오직 절대적 복종만을 강요받고 있는 존재에 불과하다. 그리하여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신은 될 수 없는 터이므로, 말로는 “아버지 하나님”이라 하면서도 그것은 주인과 노예의 관계일 뿐, 부자의 관계는 결코 되지 못한다. 그러기에 신이 되겠다는 생각을 최대의 신성모독이라 여기는 종교에 비해, 부처가 되고 싶지 않다고 벗나갈까봐 걱정하는 종교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따라서 자비와 사랑의 차이도 명백해진다 기독교의 사랑은, 첫째로 인간만을 위한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영혼있는 존재로 만들어진 것은 인간 뿐이요, 동물은 사람에게 잡아먹히기 위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생명은 누구에게나 소중할 것이 틀림없겠거늘, 이것은 얼마나 인간 위주의 이기적 발상인가. 둘째로 그것은 이스라엘 위주다. 기독교가 로마로 진출한 뒤에 해석에 약간의 변화가 생기긴 했지만, 성서에 입각하는 한 이스라엘의 민족주의에 상당히 매어있음을 발견하게 되니, 말끝마다 바리새인이니 이방인이니 하여 비난을 퍼붓고 있음이 이를 입증한다. 세째로 그것은 기껏 천국을 약속하는 데 그친다. 신과의 구별을 엄히 하는 처지에서는 그 이상의 것을 줄 수도 없었으려니와, 삶과 죽음을 이원적으로 보아 죽음은 버리고 삶만을 취
해 영생을 약속하고 나선 점에서 속제(상식)를 못 벗어나고 있다. 하물며 죽음을 극복하려면 삶마저 극복되어야함을 어찌 꿈에서나마 눈치채고 있었다 할 것인가.
이에 비해 불교의 자비는 결코 인간 중심의 것이 아니다. 불교에서 일체중생이라 할 때, 이 말에는 생명 있는 온갖 것이 모두 포함된다、 거기다가 천태 대사의 십계호구(十界互具)가 시사하듯,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 성문, 연각, 보살, 불(佛)의 열 가지 세계도, 그 어느 것이나 다른 모든 세계를 자신 속에 포함 한다고 보는 터이므로, 사람을 기준으로 말한다면 우리가 고통에 빠져있는 순간이 지옥이요, 성스러운 마음을 지닐 때가 성문 보살의 양상일 뿐 넘지 못할 구분이 거기에 있는 것은 아니다. 요컨대 일체는 마음에 말미암고, 어느 누구건 부처님으로서의 가능성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 불교의 중생관인 바, 이런 관점에서는
자비가 어찌 인간 중심에 머무르랴, 그것은 하나의 벌레마저 사람과 동동하게 보는 자비인 데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부처님과 동등하게 보는 자비인 것이니, 거기에 계급의 차별, 민족의 차별이나 선악, 현우 따위 분별이 있을 수 없다.
모두를 부처님으로 보고 부처님이 되게 하려는 이 일념이 자비의 정체라고 보아도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평가되어야 할 것은 그 진리관이다. 다른 종교나 사상이 내세우는 진리는, 여러모로 연구하고 검토한 끝에 이것에 가장 옳다는 결론에 도달했다는 데에, 그것이 진리인 근거가 있다. 따라서 그것은 사색의 소산이요, 분별의 내용이다. 그러나 그것이 분별인 바에는 대립에 떨어질 것이 뻔하니, 처음부터 대립하는 여럿 중에서 어느 하나를 택해서 결론을 삼은 바에는, 그와 상반되는 견해를 반드시 초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잘 생각하여 진리에 이른다 하지 않고, 사고와 분별을 초월한 것이 진리임을 역설해 왔다. 따라서 그것은 상대적 개념이 아닌 절대적 체험의 세계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교화를 위해서는 개념적인 분별의 차원에서 설해질 수밖에 없게 되나, 이런 경우에도 설하시는 목적은 설(說)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설(無說)에 있으므로, 같은 설이면서도 성질이 다르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진리에도 집착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신 점이다. 세상의 진리라는 것들은 최후의 결론이라 하여, 이것만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한다. 그것은 운신의 폭이 전무한 좁은 함정에 빠뜨리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조치이므로, 그런 진리는 사람을 해방하기는커녕 극단적 갈등으로 몰고 간다. 이른바 진리라는 것이 없어서 인류가 불행했던 것이 아니라 진리라는 것이 많아서 고통을 겪어왔던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에 비해 불교에서는 진리조차 초월할 때 진리가 된다하여 진리의 고정화를 거부하며, 부처님으로부터의 구속에서마저 벗어날 때에 진정으로 부처님을 받드는 것이 된다고 주장한다. 이리하여 불교는 스스로 불교임마저 초월하는 가르침이니, 이런 유례를 다시 어디서 찾겠는가.
나는 결코 짧지도 않은 생애를 무엇 하나 이룬 것 없이 살아왔음을 부끄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중에서도 불교를 선택한 것만은 나답지 않게 매우 잘한 일이라 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