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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재산 관리법은 왜 폐지되어야 하는가(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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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 편집실 1986년 10월 56호
사찰을 관리들이 직접 관장한다는 것은 불교를 하나의 국가재산으로 취급하는 것이고 사유재산의 주체로서의 불교인의 권리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또한 승려의 노력봉사를 동원하고 승려에게 일정한 토목기술 습득을 강제한다는 것은 강제 노동이라고 아니할 수 없고 주지를 문공부가 좌지우지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승려들을 정부의 고용인 취급하는 것이다.
이것은 명백한 종교탄압이었고, 당시 정권의 불교에 대한 그 무지하고 권위주의적인 시각이 여지없이 들어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에 9월 23일 3대 중앙종회에서는 종단자립책을 추구하여 문공부의 사찰관리행정지침은 지나친 종권개입이라는 것을 결의하였다.
197l년 l월 27일에 은해사에서 본말사 주지회의가 열려 문공부의 ‘불교재산관리행정지침’이 사찰운영과 신앙활동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불교재산관리행정지침은 국립공원법시행에서 연유한 것이었다. 이것은 사찰을 공원의 부대시설로 만들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불재법과는 달리 처음부터 강력한 반발이 나왔던 공원법이 불재법과 함께 어울려 불교를 근본적으로 억압하는 것으로 종단에서 이에 격분, 행정지침의 철회와 더불어 불재법 폐지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논의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리하여 5월 19일 25회 임시중앙종회에서 사찰영역에 국립공원을 설치하려고 하는 정부 당국의 재산관리행정 지침의 철회, 불재법 철회에 대한 종단 특별기구를 설치키로 결의하였고 차기 총회에 기본시책과 방법을 보충해서 상정키로 하였다. 종회가 끝난 후 종회의장단과 총무원 간부간에 의견을 나누고 가칭 ‘사적보존특별위원회’를 구성키로 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20일에는 총무원장실에 모인 전권위원(종회의장, 총무원장, 관계사찰 주지등 10여명)이 오는 10월 25차 정기 중앙종회때까지 국립공원법의 개정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연구 제출키로
하였다. 이에 문공부장관과 총무원장이 회합을 갖고 재산관리행정지침의 즉각적 시행이 보류되기로 하였으나 곧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
1971년 9월 9일 총무원 기획위원회 및 사적보존특별위원회는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는, 문공부에서 일방적으로 제정 실시하고 있는 사찰관리 개선지침 등이 종단원칙과 크게 다르며 사실상 사적 및 사찰재산관리에 큰 지장을 초래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이에 대한 대책을 신중히 검토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찰관리지침. 공원법을 반대하는 투쟁과정 속에서 불재법의 의미와 불교의 자율성 확보에 대한 자각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불재법은 더 이상 종단보호법률일 수 없다는 것이, 불재법이 파생시키는 각종 행정적 제재를 통해 확인되었다.
불재법 폐지론이 등장한 것은 점차 안정되어가는 종단의 현실에서 이제 보다 나은 발전을 위해서는 불교의 자율성 확보가 초미의 과제라는 것을 인식하여감에 그 배경을 두고 있다.
1973년 2월 7일부터 11일까지 문공 건설 양부와 청와대 제 3경제 담당비서설 및 종단이 합동으로 전국사찰 실태조사를 하였다. 이 조사 결과 @관계기관의 협조불충분 @시가보다 저렴한 임대료의 정수 @사찰주지의 의욕상실 @공개관람료의 위탁징수로 인한 수입의 결손등이 지적되었다. 이 조사는 이렇게 된 이유로 승려에 대한 관계기관의 불신, 불재법의 이해부족, 사찰을 찾는 관광객의 무지등을 열거하였다. 그러나 이미 70년도에 불붙은 불재법 폐지론이 유야무야되고 10월유신으로 인해 극도로 경색된 정치문화를 배경으로 더욱 가속화된 불교탄압을 그 주요한 원인으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조사는 곧 불교재산은 불교인의 것만이 아니라 전민족의 것이라는 시각에서 이루어 다. 즉 민족재산이라고 볼 수 있는 문화재등 불교재산이 불교인의 전유물일 수만은 없다는 것이었다. 불교가 민족과 더불어 1600여년을 동고동락하는 동안 민족종교로서 성장하였고, 그동안 축척된 재화나 문화재 또한 우리 민족의 보시로 이루어졌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불교재산은 조선시대의 계속된 억불정책에서나 일제의 가혹한 불교탄압 속에서도 짚신을 만들고 누룩을 만들어 팔면서 어렵게 모은 삼보정재로서 당연히 불교소유인 것이다. 불교문화재 또한 장구한 세월동안 오로지 중생구재와 불교발전을 염원하는 신앙행위로서 형
성되어 온 것이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이러한 불교문화재는 단순히 박물관에만 진열될 수 없는 살아있는 실체로써 현재도 끊임없이 신앙의 대상이 뼈고 있음을 간과할 수는 없다. 또한 불교재산은 불교를 더욱 활성화시키는데 사용되어야 한다. 결국 불교재산은 불교인에 의해서 관리 활용되어야지 개신교인지 카톨릭인지도 모를 이교도 일수도 있는 관리들에 의해서 통제 감독을 받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따라서 불교재산이나 문화재를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구속시키거나 박제화시키기 보다는 불교발전을 위해 적극 활용되고 신앙의 대상으로써 역할을 다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보다 중요한 일일 것이다. 그때만이 한국불교의 과거 역사가 정당하게 평가될 수 있으며, 앞으로의 민족사에 있어서도 한국불교의 정확한 위상을 정립할 수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70년대 초기에 나타난 불재법 폐지운동은 그 의미가 자못 크다 하겠다. 60년대와 달리 불재법이 불교의 자율적 발전에 엄청난 질곡이 되고 있는 제도적 장치였음을 깊게 인식한 계기가 바로 이때부터 이루워졌다. 그러나 이 운동이 결국에 가서는 유야무야되고 별 실효를 거두지 못한 것은, 정부의 강압적인 태도와 10월유신 이후에 국민 기본권을 무시한 일방적인 전시행정에 그 주요한 원인이 있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불교 내부적 원인으로는 아직도 이 법이 갖는 봉건적이고 반민주적인 성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오히려 불재법의 법률적인 보호장치에만 안주하려는 일부 승려들의 안일한 태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불재법 폐지운동이 전 불교대중에게 확산되지 못하고 일부 종단적 차원에서 국지화 되어 버린 것에서 폐지운동 실패의 가장 중요한 원인을 발견할 수 있다.
70년대는 이른바 유신시대로 사회의 전 분야가 극도로 경색화 되어가고 권력의 세도는 점입가경으로 비등해져가고 있던 때라 불재법운운의 운동은 꼬리를 감추고 말았다. 유산시대는 불교계에 있어서도 몹시 암울한 시대였다.
부마사태와, 서울시 한복판에서 일어난 심야의 활극으로 유신정권이 그 종장을 고하고 사라지자, 80년에는 이른바 ‘서울의 봄’이라는 민주화의 바람이 불어 왔다. 사회 곳곳에서 유신의 구각을 탈피하고자 분투 노력할 때, 불교계에서도 그동안 묻혀왔던 불재법문제가 전면에 동장하게 되었다. 유신의 산물이라기 보다는 봉건적 유물에 불과한 불재법은 유신의 종언과 함께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1980년 3월 1일 대한불청은 대의원 총회에서 ‘불교재산관리법의 개정을 촉구한다’는 건의문을 채택하였다.
이어 3월 19일에 열린 대한불교총연합회 제46차 정기 이사회에서도 불재법등 불교관계법령의 개정문제가 거론되어 개정추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4월 8일에는 헌법개정심의연구 불교위원회에서 불재법 철폐 내지는 개정의 가능성을 연구하고 공원법의 개정도 논의하였다. 그러나 5. 17 이후 이 논의는 별 의미가 없어지게 된다.
80년 7월에 조계종 총무원은 불재법, 자연공원법등 일련의 사찰과 관련된 법령을 사찰의 자주적인 운영을 전제로 해서 개정토록 추진하기로 하고 이상의 법령의 모순점을 조사해서 이를 관계당국에 건의키로 했다. 총무원 총무부는 기획국을 통해 현재 이 일에 착수하였다고 밝히고 아울러 사찰내 건물의 건축허가에 따른 애로점의 시정 사항을 관계당국에 진정하였다.
당시에는 이미 불재법만이 문제가 된 것이 아니라 불교관계 전 법령의 전면적인 재검토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총무원은 정부에서 제정 공포해 시행중인 불재법, 자연공원법, 도시공원법, 문화재보호법, 도시계획법 등이 사찰의 자주적인 운영을 침해할 우려가 크며 또한 종교사상을 중심으로 보존 육성되어온 사찰 주변의 자연과 풍치환경등 천연자원이 공원으로 개발됨으로서 사찰을 중심한 역사적인 종교환경과 사찰수도 분위기를 해치고 있다고 법개정의 필요성을 지적하였다.
또한 총무원은 게다가 노후된 사찰을 증개축하고자 할때 공원법, 도시계획법등의 제한 사항에 의해 사찰의 의욕적인 불사수행에 막대한 지장이 있다고 지적하였다.
8월 l일에는 “문공부장관의 허가없이 사찰의 부동산과 재산의 양도 또는 경매되었을 경우 매수자의 소유권은 인정할 수 없다”는 종래 토지불법매각사건에 관한 판결이 나왔다.
8월 14일 총무원 회의실에서 열린 전국중요 사찰주지 및 실무자회의는 불교관계법 개정에 따른 광범위한 논의를 벌인 끝에·불교관계법개정 5인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동추진위원회는 6개 불교관계법 개정시안을 작성, 국보위에 제출키로 결정하였다. 이날 송 월주 총무원장은 종단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불교관계법을 호국 안보적인 차원에서 고치는 것이 종단의 자주 자율적인 운영체제를 갖추는 지름길이라고 말하고 관계 스님들이 진지하게 숙의하여 이상적이고도 현실적인 개정안을 만들라고 당부하기도 하였다. 이에 9월 15일과 16일 양일에 걸쳐 개정시안이 마무리 발표되었다.
이중 불재법 개정안의 주내용을 보면 불재법 제4조(경내건물 및 경내의 정의)에서 각령으로 정하던 것을 ‘주지가 문공장관의 승인을 얻어’로 제9조 대표자의 등록사항을 신고사항으로, 분규시 불교단체의 재산관리인 임명조항(부칙 제3조) 폐지등을 주장하고 있다. 시행령중 제 1조(경내지의 한계)와 4, 5조 ‘불교단체 및 주지대표 임원등록’을 신고제로 개정하고 제9조(수입지출예산 및 결산서 제출)는 폐지하였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당시 불교관계법 개정운동은 불재법의 철폐를 주장한 것이 아닌 몇개 조항의 개정을 요구하는 선에서 그치고 있다. 몇개 조의 개정만으로 불재법의 폐해가 극복되는 것은 아니라고 볼 때 당시 개정운동은 매우 미약했고 기껏해야 청원하여 선처를 기대하는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어쨌든 10여년에 가까운 세월을 불재법에 수동적으로 끌려다니기만 했던 상황을 고려해 본다면 이러한 차원에서의 개정운동에도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다.
조계종단은 이러한 개정운동과 더불어 자체 정화운동도 병행하였다. 10월 20일 조계사에서 열린 본사 및 직할사암주지, 신행단체장 연석회의에서 발표된 ‘정화중점방안’에 따르면 축재금지등 5개항 13개목에 이르는 부조리를 열거하고 정신적인 계도와 제도적인 개선을 통하여 새롭고 신뢰받는 종단풍토조성을 위하여 노력할 것을 다짐하였다. 그리고 아울러 교단운영의 자주 자율적 의지가 성숙되어가고 있음을 지적하고 부단한 세속적인 간섭을 배제키 위해 불교관계법 개정이 시급하다는 것도 주장되었다. 그러나 이미 5.17이후 사회분위기가 급속도로 냉각되고 정치환경이 열악화되어 가는 상황에서 불교만이 홀로 자율성을 주장하는 것은 인정받을 수 없었고, 오히려 10월27일에는 전국의 주요사찰이 정화라는 명분하에 군인들에 의해 점거되는 사상초유의 법난만을 당하게 되었다.
80년 봄부터 일기 시작한 불교관계법 개정운동은 민주화의 혈기에 편승해 전개되다가, 사회전반이 위축된 5. 17이후에도 여전히 청원의 형식으로 계속되었다. 그러나 불재법의 탄생배경이나 그 적용의 전개과정을 살펴볼 때 불재법이 갖는 정치적 성격이 명백한 바, 단지 법리적인 차원에서 몇개 조항만을 개폐한다면 된다는 사고에서 시작된 개정운동은 부질없는 연목구어의 시도였는지도 모른다. 불재법의 전면적인 철폐야말로 불교의 자율적 발전을 위한 시금석이라는 것을 정확히 인식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10.27법난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1981년 1월 14일에 정화중흥회의에서 새집행부를 구성하고 대표자 취임등록을 하였다. 총무원은 2월10일에 문공부에 사찰재산 유보조치의 전면해제를 요청하였다. 이미 새집행부가 구성되고 대표자 취임등록을 마쳤으므로 유보조치는 더 이상 계속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전국적으로 번지고 있는 솔잎혹파리에 의해 사찰림의 피해가 큰데도 유보조치로 인해 병든 나무를 전혀 벌목하지 못해 그 피해가 크게 확산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총무원은 23일에도 다시 유보조치 철회를 요구하였고 동일 사찰재산처분을 엄정히 집행토록 하여 총무원 관계자 입회없는 계약은 무효라고 밝혔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법난 이후에 마치 불교가 재산분규의 온갖 부조리의 진탕속에 헤매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그것은 마치 법난의 합리성을 추인하려는 움직임 같아 씁쓰레한 뒷맛을 남기게 한다. 더구나 솔잎흙파리의 폐해가 극심하였다는 것을 보면 행정적 권위가 자율성을 얼마나 구속하였는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하겠다.
이후 81년 10월에 총무원과 한국불교 종단협의회 및 전국신도회는 불교관계법 중 종단 발전에 장애요인이 되고 있는 법조항의 개정을 정부에 건의하였다. 그러나 이미 개혁의지가 미미하고 불재법의 근본적인 성격을 외면당한 채 동어반복식 청원이나 한다하여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유야무야라는 말 그대로 흐지부지되다가 개정시안은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오히려 82년 2월에 일부 사찰에 부가가치세가 부과되어 교계에 커다란 물의를 일으켰다. 세법의 모법이라고 할 수 있는 부가가치세법 제12조(면세) 제1항 제16호에 종교, 자선, 학술, 구호, 기타 공익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가 공급하는 재화 또는 용역으로서 대통령이 정하는 것’이라고 명시돼 있고 동법시행령 제37호에 ‘종교, 자선, 학술, 또는 용역은 주무관청에 등록된 종교, 자선, 학술, 구호, 기타 공익을 목적으로 한는 단체가 그 고유의 사업목적을 위하여 일시적으로 공급하거나 실비 또는 무상으로 공급하는 재화 및 용역과 학술연구단체 또는 기타 연구단체가 공급하는 재화 및 용역으로 한다’라고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근거도 없이 부가한 과세는 부당하다는 여론이 비등하였다. 그러나 당시 교계에서는 이러한 부당한 처사에 대해서 반박할 때 불
채법의 조항을 들먹여 오히려 불재법을 보호장치로 오인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이러한 부당과세 사건은 정부의 불교에 매한 위헌적인 통제로 인하여 불교에 대한 정부관리들의 극히 부정적인 시각이 확대되어 나타난 해프닝이라고 볼 수 있다. 원인을 추체험적으로 추적해가면 불재법 그 자체에 문제의 시발점을 읽는 것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
1983년에는 불재법과 향교법을 정부측 주도하에 개정하려는 시도가 있었는데 주 재정방침은 다음과 같다. 관계당국의 자료제출 명령권 및 감사권 신설, 공개사찰과 향교의 관람료 징수 벌칙의 대폭강화등 이러한 개악방침이 전달되자 제75회 중앙종회에서 이 문제가 거론되어 불재법은 법자체가 폐지되어 마땅하다며 정부방침에 거부반응을 보였다. 이러한 개악방침은
불교계 뿐만 아니라 일반사회의 여론에도 밀려 백지화되었다.

그동안 줄기찬 불교계의 개정운동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개악을 시도하였다는 것은 정부의 불교에 대한권위주의적이고 편의주의적인 시각이 조금도 변화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불재법 문제는 단순히 종단 임원들의 청원운동만으로는 조금도 해결될 수 없음은 명백하다. 전체 불교대중의 집약된 의지의 표출만이 문제해결의 실마리라도 잡아낼 수 있는 것이다.
1986년은 한국사의 일대 분기점이 될 것이 거의 확실해졌다. 해방 이후 8차례에 걸친 개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제9차 개헌을 위한 헌특이 가동되고 있다. 활발한 개헌논의와 함께 사회전반에 걸친 비민주적인 제요소의 척결과, 구태의연한 제법령의 심판이 초미의 관심으로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 즈음하여 불재법등 제불교법령에 대한 문제 제기가 불교계내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불재법의 철폐만이 불교의 자주화와 현대화를 위한 첫걸음이라는 인식을 전불교 대중이 공유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이제까지 불재법의 연원과 탄생배경, 법의 정착화과정, 불재법 개폐운동의 흐름을 대략적이나마 파악하였다. 불재법의 연원이 사찰령은 물론 구한 말로까지 추적이 가능하다는 것은 우리에게 많은 점을 시사해주고 있다. 불교재산 관리법은 봉건시대와 식민지 시대에서나 가능한, 종교탄압과 규제의 성격을 띠는 차별적인 법령이다. 법령 이름에서도 뚜렷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규제를 위한 법률이지 자율을 보조하는 보호법률은 아닌 것이다.
불재법의 강압적인 시행으로 한국불교는 여전히 타율의 틀속에 갇혀 있다. 민족종교로서 민족사 창도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불교를 규제하고 있는 권위주의적인 행정적 간섭에서 연유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불재법은 종교의 자유나 사유재산권의 보장이라는 측면에서는 위헌적인 악법이다. 더구나 이 법에는 조선시대 숭유억불의 성격과도 같은 봉건적인 냄새조차 풍긴다.
불재법은 종교의 자유, 민족주체성의 확립, 민족문화의 창달, 그리고 진정한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서 당연히 폐지되어야 함을 재삼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