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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불교에 대한 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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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언 - 김성규 1986년 10월 56호
연금술사가 무에서 유를 창조하려고 평생을 몸부림치듯, 인생이란 일확천금을 노리는 그 무엇과는 근본적으로 의미를 달리한다. 우리의 삶은 엄밀한 의미에서 비약과 우연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비약이란 사회적인 구조에 의하여 주어질 수 있는 표면적인 의미이고, 우연이란 것 조차도 시간과 공간의 인식 부족에서 주어지는 감각적인 의미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결국 인간이 살아간다는 자체에서 우리가 제일의적으로 찾아야 될 의미는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며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 명제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공통과제이며, 우리의 삶 또한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이 명제를 구체화해 가는 것이다.
구체화한다는 것은 뿌리를 내림이요, 줄기와 잎으로 지상에 얼굴을 내밈이요 무성하게 자라 큰 그늘을 만들어 어렵게 살아가는 이웃들과 그늘을 나누어 가짐으로 자유와 평등을 나누어 누리는 것이다.
파레토가 종교란 「경험을 초월하는 그 어떤 것을 취급한다」고 주장하였을 때 그는 종교란 관찰 가능한 경혐적 사실이 아니며 과학적 사고 방법에 의거해서 설명될 수 있는 현상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즉 수행을 통한 영혼의 정화에 의한 영적인 교감으로 말이다.
수행을 통하여 현실적인 삶을 값어치 있고, 올바르게 할 수 있다는 입장에서 생활 불교가 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몇가지 요건을 들어 보자.
첫째, 불교인이라면 무엇보다도 인과법칙을 믿어야 한다. 인과법칙을 확신하는데서 우리의 삶의 형태는 구원이 아니라 창조로 이루어지며 자기가 행하고 있는 모든 행위에 대하여 책임을 전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책임짐으로써 진실된 삶을 영위하는데 확신과 소신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가장 평범한 것을 너무 쉽게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버릇이 있다. 물이 중요하고, 공기가 중요하고, 우리의 생명이 무엇보다도 중요하지만 병들어 고통 받으며 임종에 가까와서야 우리는 생명의 귀중함을 인식하는 예가 허다하다.
진리는 먼데 있는 것이 아니다. 가장 평범한 우리의 생활 속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가장 평범한 진리, 「콩 심은데 콩나고 팔 심은데 팥난다」는 인과법칙에 대한 확신을 가지는 것이 불교인에게는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경전을 읽을 때마다 감명깊게 와닿는 구절이 있다. 바라문 교도가 어느날 붇다를 찾아와서 여쭙기를 「붇다여, 당신은 주장하기를 모든 과보는 그 스스로 짓고 받는다고 하는데 우리 바라문교에서는 어떤 사람이 비록 죄를 짓고 살았다 하더라도 죽을 때에 바라문교에 귀의하고 우리들이 그가 자재천(천당)에 태어나기를 기도하면 그는 그 곳에 난다고 하는데 어떻게 된 이유입니까?」 허고 질문하니까 붇다께서는 그 바라문 교도를 데리고 뒷 편 연못가로 가서 큰 돌맹이를 연못에 던지면서 묻기를 「어떤 현상이 일어났느냐?」「예 ! 돌이 물속에 가라앉고 말았읍니다」
「그럼 너회 바라문들이 연못에 와서 그 주문을 외면서 돌아 떠올라라 하고 기도한다고 해서 돌이 뜨겠느냐?」
「아닙니다」
「바라분여여 ! 그와 같다. 어떤 사람이 악업을 지으면 그것은 무거운 돌맹이와 같아 저절로 지옥의 불구덩이로 떨어지고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어떤 사상을 신봉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가 어떻게 올바르게 살아가느냐 하는 것만이 중요하다. 이것이 곧 우주의 진리이다」라고 갈파한 붇다의 그 음성이 아직도 귓가에 머무는 듯하다.
둘째,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기본적 윤리가 있는 것이다. 불교인이 될려면 받아야 하는 오계가 바로 그것이다. 오계는 불교 신자가 지켜야 할 가장 최소한의 양심인 것이다. 일반 사회인이라도 진실한 삶을 추구한다면 오계정도의 최소한의 양심를 지켜야 하리라 생각한다.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만이 도둑질은 아니다. 자기가 갖고 있는 것을 이웃에게 나누어 주어야할때 나누어 갖지 않는 것도 넓은 의미에서 도둑질이라는 것을 불교인이라면 명심해야 하리라. 부와 권력이 일부에 편중해 있으면 있을수록 사회의 부패는 가속화된다.
사회가 어지럽고 불투명할수록 나누어 가짐의 의미는 더욱 더 커지리라 생각한다. 또 구도의 길을 걷는데 있어서 맑은 정신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우리가 갖고 있는 위선을 벗어버리고 한번 생각해 보자. 우리 불교인들은 술하고 몇 촌지간인지를 한번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으리라. 승려든 신자든 누구이든간에 진실한 삶을 추구할 최소한의 양심의 자세를 갖추는 것이 우리 불교가 안고 있는 많은 문제중 가장 절실한 문제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셋째, 종교는 수행이다. 불교든 기독교든 종교는 그 종교 특유의 수행방법을 가지고 있다. 이 수행이 원만하게 이루어지지 않고 어떻게 생활속에 불교가 심어지겠는가? 생활과 불교는 둘이 아니다. 절에서 법회를 보고 있을 때만 불교인이고 집에 돌아오면 불교와 무관한 것이 불교인들이 갖고 있는 가장 큰 문제이다. 수행을 올바르게 실천하는 불교인이라면 수행과 자기 삶이 둘이 아니어야 한다. 수행하면서 얻어지는 자유와 평온함이 바로 생활과 직결되어야 하는 것이며 생활자체가 수행의 도량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둘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연구하지 않고 수행하지 않는 종교는 종교로써 생명력과 설득력을 잃어버린다. 종교에 있어서 신앙심은 무엇보다 중요하며 수행에 의해서만 신앙심은 응어리지는 것이다.
일주일에 한번 보는 법회는 단지 의식일 뿐이지 그것이 종교 생활의 전부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생활자체가 수행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 불교인이라면 불교적 수행방법을 택하여 매일 힘써야 한다. 즉, 아침에 일어나 매일 30분씩이라도 좋다. 참선을 하던, 독경을 하던, 참회를 하던지 자기가 가장 잘 행할 수 있는 것을 하나 택하여 매일 행해야 한다. 그 행함이 자기자신의 한 부분이 되어 있을 때 비로서 우리는 불교인이 될 수 있으며 진실한 삶을 추구하는데 자기 자신을 참여시킬 수 있는 것이다.
예로서 우리 관음사 수요법회에서는 전 회원이 참선반, 독경반, 참회반, 사경반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매일 아침 30분 정도 수행의 걸음마를 배우고 있다. 이것은 생활 불교의 조그마한 시작일 뿐이다. 전국 모든사찰에서 신행하는 법회가 열릴 때 불교는 비로소 생명력과 설득력을 가지고 역사의 큰 흐름에 참여하게 되리라.
정열적으로 자신의 삶에 심취해 있는 지에 의하여 우주가 열리듯이 이렇게 신행하는 불교인들에 의하여 불교는 열리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