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자 주(註)
이 글은 불교도총회 세계협회(World Fellow Ship Of Buddhists General Conference)에서 주간한 세미나에서 현대생활과 불교(Buddhim in modern life) 주제로 발표한 글이다.
연사인 아난다(ANANDA)스님은 영국의 옥스퍼드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동대학에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지금 스리랑카 콜롬보에서 이 협회를 주관하고 있다.
\'현대 생활속의 불교’라는 제목 자체가 벌써 해명i해야 할 여러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즉, 현대생활이란 어떠하며 불교란 무엇일까? 또한 현대 생활속에서 불교는 어떠한 역할을 해야만 할까? 현대 생활 그 자체를 정의하기란 매우 어려운 문제다. 혹자는 현대 생활의 특정으로 세계가 점차 좁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들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의사소통 장애가 빠른 속도로 극복되고 있어 사람들 상호간의 접촉이 용이하게 되고 그 결과로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짧은 시간내에 속속들이 알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사람들은 여태껏 생각할 수 없었던 ‘세계적인(넓은 지역에 걸친)’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현대 생활의 한 양상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현대 생활을 과학과 기
술의 측면에서 이해해 볼 수도 있겠다. 자연과 질병을 정복하려는 인간은 과학기술을 놀랄만큼 발전시켜 왔다. 과학기술의 측면에서 바라본 이러한 현상이 현대생활의 또 다른 양상이다. 현대 생활의 세번째 양상으로 들 수 있는 것은 보다 복잡한 것이다. 의사소통 장애물들이 없어져 세계가 보다 가까와지고 과학과 기술의 발달 속도가 현저히 빨라짐에 따라 우리들은 경제적, 정치적 적대관계, 환경오염, 인구폭발, 자원의 부족, 대체 불가능한 자원의 무분별한 사용등 여러 어려운 문제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이와 더불어 ‘생존’이라 이름 붙일 수 있는 여러 문제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현대 문명의 생존은 가능한가?
이 문제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구두(口頭)적인 차원-윤리적인 질문-에 서서 이렇게 질문할 지 모른다.
“현대화와 자연정복의 과정에서 우리들은 우리들 자신을 정복할 수 있는 능력으로 부터 얼마나 멀리 이탈되어 왔을까?”
“생존을 위한 투쟁이란 현대인들이 이기심에 노예화되고 그 자신의 욕망과 일시적 기분에 속박되어 왔음을 의미할까?”
“우리들은 인간답게 하는 모든 덕목들 즉, 타인의 안락을 바라는 마음, 타인에게 이기심 없는 봉사를 하고자 하는 정신들을 잃어버린게 아닐까?”
이런 여러가지 점으로 미루어 사람들은 현대 생활을 아주 낙천적으로 그와 동시에 아주 비관적으로 생각한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인간이 정복할 수 없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시대에 사는 것을 기쁘게 생각할 수도 있다. 한편 이 우주속에서는 인간이 가고 싶어하나 거기에 갈 수 있는 기술을 아직도 개발시키지 못해 갈 수 없는 장소도 더러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도 결국 인간 능력의 범위 속에 포함되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에 대한 이러한 낙관적인 생각이 끝날 즈음 인간이 그 능력을 발휘하는 과정 속에서 무언가 잃어버리지 않았나 하는 비관적인 생각이 몰려온다. 이 두가지 관점 모두를 생각하자.
그러면 이제 불교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로 눈을 돌려보자. 불교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있나? 불교는 여러 사람들에게 각각 다른 많은 것을 의미할 수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불교가 부처님의 삶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즉, 부처님과 그 직계 제자들이 보여준 행동양식 -인간으로 태어나 해탈(解脫)에 이르는 길을 열어준 인간적인 위대한 공헌 이것은 불교의 한 측면이라 할 수 있다. 다른 사람에게 있어 불교는 부처님의 교설이 기록된 수많은 불교 경전속의 그 많은 교리를 의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경전속에는 매우 숭고하고 난해하며 또한 복잡하고도 학술적인 삶의 철학이 기록되어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과 부처님 당시에 행해진 관례를 바탕으로 하여 매우 풍성한 문화가 형성되었는데 이 문화는 2,500여년 동안 아시아 각 지역에 전파되었고 다양한 배경과 다양한 계층의 그곳 사람은 그 문화를 가꾸어 왔다. 수많은 불교 종파와 학파가 전개되었으며 그 모두는 당연히 불교라는 이름으로 발전하였다.
불교에 대한 또 다른 정의는 의식(儀式)적인 것인데 이것은 부처님의 가르침과 부처님에 의해 가르쳐진 삶의 방법에서 발전되어 나아가 종교가 되었다. 부처님께서 의도하셨든 하지 않으셨든, 부처님의 가르침은 종교가 되었다. 즉, 사람들이 그것에 기꺼이 헌신할 준비가 되
어 있고 그 독자적인 의식(儀式)과 조직과 방법, 그리고 적절히 이행되었고 실천되지 않았음을 판별할 수 있는 기준을 갖춘 종교가 된 것이다. 불교의 이러한 여러 양상들은 하나하나 떼어내어 그것이 현대 생활에 미치는 영향들을 고찰해 본다면 이는 분명 막대한 작업이 될 것이다.
나에게 있어 불교란 이러한 양상 모두이다. 불교는 부처님이며, 부처님의 삶이며, 교리이며, 교리를 중심으로 전개된 문화이며 교리와 관련된 의식(儀式)이다.
가장 세련된 형태로 정비되고 각자에게 어필하는 부분을 선택할 수 있는 형태로 우리들에게 나타난 인간 경험의 거대한 집합체로써 불교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곧 불교의 뛰어난 독창성을 발견하게 된다.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점을 강조하시곤 하셨다. 학자가 될 필요도 없고 모든 것을 배울 필요도 없다.
불교는 문제를 풀기 위하여 많은 정리(定理)와 방법들을 배워야 하는 수학과는 틀린다. 만약 당신이 근본적이고 근간이 되는 것을 안다면 학술적으로 정밀한 연구가 선행되어야할 중요한 것이 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불교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나타난 이 거대한 불교문화, 종교 혹은 경전, 경혐의 축적물에서 우리들 각자는 우리들 생활에 적절하고 우리들 자신의 문제에 맞는 해결책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시간을 초월한 교리
나는 때때로 어떻게 불교가 “Akalika”(=timeless: 영원히 존재함을 의미)라 불리게 되었을까 생각하곤 한다. 불교문화(혹은 종교) 속에서 일어난 변화들을 관찰하면 할수록 불교가 어떻게 지역, 인구, 개성의 차이에서 오는 문제점들을 극복해 왔나를 잘 알 수 있다.
나아가 그 극복은 사실상 가능했다는 것, 달리 말하자면 부처님께서 항상 신선할 수 있는 메시지를 전개시켰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만약 불교가 현대생활에서도 한 위치를 차지하며 적응성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영원한 가치에서 방출되는 시간을 초월한 적응가능성의 특성 때문일 것이다. 영원해질 수 있는 특성을 말한다는 것은 그 밑바탕에 만물이 영원하지 못하다는 교리를 가진 종교를 묘사하는데 적절하지 않다. 시간을 초월한다는 특징은 모든 것은 지속되나 변화와 전개의 과정속에서 즉, 유전(流轉(=flux):끊임없이 변화함) 속에서 지속된다고 불교가 이해했다는 사실에서 도출된다. 그래서 불교가 시대와 문명의 싱이함에도 적응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주저할 필요없이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적절하고 적응할 수 있는 것으로서 불교의 한 측면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이다.
불교가 시간을 초월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 몇 가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첫 번째로 들 수 있는 것이 불교는 개인의 책임을 인정한다는 사실이다.
부처님은 인간을 온갖 속박에서부터 해방시킨 가장 뛰어난 종교 지도자중의 한 분이시다-초자연적인 연분, 신, 창조, 죄, 어떤 다른 사람으로부터 물려받은 특질(=스스로 지은 이외의 것 등)-부처님께서 각자가 그 자신의 주인이라고 하신 말씀은 인간이 자기자신과 그 환경을 조절할 수 있다는 사실을 신뢰하면 할수록 그 타당성이 훨씬 분명해진다. 그래서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하여 오늘날 사람들이 그 자신의 의지로 어떤 다른 생물보다 뛰어나게 되었고 물질적, 윤리적 문제 등 어떠한 문제도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고 느낀다면 인간이 그 자신의 주인이라는 즉 타인이 아닌 그 자신이 지은 것만을 그 스스로 물려받기 때문에 모든 책임은 그 자신에게 있다는 원리가 자신을 바라보는 가장 중요한 관점중의 하나가 되지 않을까?
정신적인 혹은 물질적인 모든 속박에서 인간을 해방시키는 이런 접근방법이 시간을 초월할 수 있게한 중요한 불교 요소중의 하나이다. 우리가 계속 전진하고 인간에 의해서 더 큰 진보가 성취될 때 인간이 그 자신의 주인이라고 주장할 필요성은 더 커질 것이다. 인간이 그 자신의 주인이라는 주장을 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부처님 말씀을 계속 반복하게 될 것이다.
“Atta hi attano natl1o”생각의 자유.
* 세 번에 걸쳐서 연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