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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현실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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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 허운 1986년 10월 56호
불교는 오늘날 많은 부분에서 근본적인 개혁을 요구받고 있다. 그러나 불교의 현실인식은 비극적이라고 할 만큼 벅찬 것이다.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은 고정된 것도 필연에 의해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끊임없는 자각과 실천을 통하여 유지되고 있는 정교한 기계와 같은 것이다. 기계라는 비유도 맞지 않는다. 기계는 자기 증식도 자기혁명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항상 자기 속에 스스로를 부정하는 힘을 지니면서도 기계와 같이 일정한 질서를 가진 존재, 닫혀 있으면서도 열린 존재, 그것이 인간이다.
오늘날 우리의 삶이 더욱 고단한 것은 인간 존재의 〈열림〉의 부분이 가속적으로 진행되는데 자기 삶의 〈닫힘〉의 구조, 자기 환경의 골격의 전모를 인식하는 것이 지극히 어려운 데서 오는 상실감일 것이다.
현실의 자기증식 속도가 놀라운 것이 있음에 반하여 현실에 대한 불교 인식의 발전은 그것을 따르지 못하였다. 불교의 현실인식은 현실과 무관한 관념의 유희화 내지는 그릇된 세계관을 형성했고 마침내는 역사적 과오마저 업의 소치로 탈색시키는 숙명론적인 인과불교를 낳고, 다시 닫혀진 역사의 지평선 안에서 전진을 단념하고 자기 탐구에 골몰하였다.
인간의 생존논리와 역사발전의 밑바탕인 사회의 제반 불합리한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지 못한 채, 현실을 스스로 초월함으로써 자기구속을 받게 된 것이다. 여기에 오늘날 불교의 비극이 있다. 한국불교의 근현대가 민족사가 안에서 곪아터지는 형식이 아니고 외부로부터 수술당한 형식이없다는 것이다.
역사의식의 연속성이 끊긴 것이다. 수술의 고통에서 깨어나 보니 상처는 아물었는데 자기 자신이 누구였던가를 잊어버리고 만 것이다. 어떤 사회적 변화가 그 사회의 오랜 역사의 여러 요소가 어울려서 이루어졌을때는 그 사회는 스스로 운동하고 조종한다. 역사라는 것은 한 개인은 물론이요, 한 세대와 한 시대의 힘만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모든 시간의 힘으로 빌려 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회적 변화를 겪고 지양되기는 할망정 끊어져서는 안된다. 기억상실한 개인을 생각하면 될 것이다.
이러한 기억 상실의 역사 속에서 불교의 비극은 식민지 문화정치의 분리 현상에 있었다. 정치 및 사회현실로부터 모든 인간활동을 이탈시키는 것이다. 정치적 관련을 배제한 종교 사회적 현실을 희석 또는 외면한 예술, 형이상화적 보편주의적 문제에 골몰하는 철학, 개인적 수양과 자기억제를 강조하는 도덕 등이 그 소산으로 나타난다.
사회 성원의 역할이 불안정한 속에서도 어떤 최저한의 안정없이는 사회는 유지되지 않는다. 인간 사회는 원칙적으로 무한히 열려 있으면서 동시에 스스로 혼돈에 떨어지지 않기 위한 안정을 가져야 한다. 이 안정의 표준은 아마 어떤 시대에 있어서의 노동과 휴식 사이의 균형에 근거한다고 할 수 있다.
사회는 노동과 휴식의 사회적 배분 상태가 균형을 잃게 되면, 무슨 수로든 자기를 바로 잡지 않으면 안된다. 이 같은 위기에 선 사회에서는 소유의 분배도 균형을 잃게 된다.
상식적으로 생활의 향유를 위해 소유는 많을수록 좋다고 간주되지만 반드시 그러한 것은 아니다. 소유의 사회적 형식과 그것을 삶의 일부로 운용하는 방식에 따라 이 비례 관계의 정지 또는 역전이 일어나는 수가 있다. 즉 소유가 다만 저장되어 있으면서 삶의 유지 증진에 필요한 재화 및 가치를 얻기 위해 행해지는 노력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드는 담보물 노릇을 할 때, 그런 예가 나타난다. 이때 소유는 오히려 생존 주체가 일을 통해 생존의 경험적 현실과 교섭하고 자신과 현실을 함께 값있게 하는 것을 제약하는 것이다.
노동일반론적인 의미에서 일이라는 우리말 어휘가 기본적으로 두 가지 뜻을 가진다는 것은 여기에 매우 시사적이다. 사람은 그가 처해 있는 자연과 현실에 노력을 가하여 가치를 창조하고(노동), 경험적 현실과의 교섭(사건)을 통해 삶의 의미를 확인하며 실천한다. 소유가 값있다는 것은 이러한 과정에 보다 큰 보탬을 줄 경우이며 그 필요성을 축소 또는 왜곡할 때
는 불건전한 삶의 원인으로 된다. 획득되어 있는 경제적 사회적 소유를 누리면서 그것이 다만 소비에 그칠 때 그래서 일을 통한 삶의 유기성이 손상될 때 흔히 나타나는 현상은 섬세한 취미에 몰두로 나타난다.
역사의 구조적 모순을 극복하지 않고 차단하고 즐기는 문화정책의 현상은 노예가 휴식시간에 듣는 음악같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불평등한 현실을 사장시켜 버린 사상이 있다면 그것은 비인간적인 현실이며 꿈과 생시를 착각한 현상이다.
모든 시대의 지배적 계층에 의해서 강조된 체제긍정의 신앙형태는 사회의 필요 노동을 잡아두려는 지배이념의 산물이었다. 이승에서의 삶의 질곡을 버리고 저승에 이르는 신앙의 변천과정이 아마 인간사회의 분열과 모습의 외화과정을 잘 말해주는 것일 것이다. 저승의 공간까지도 실은 우리가 생각하듯 현실과 유리된 것이 아니고 퇴락한 모습으로나마 정토의 산물이며, 유토피아에의 길이 막혔던 사람들의 구원의 소망이었다.
실이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저승지향의 신앙이 불교신앙의 본질이라고 주장한다면 본말 전도이며 송장이 생명의 본질이라고 하는 것으로 되고 만다. 정토를 갈망했던 사람들은 생명의 해탈이 아니라 생명의 완정을 원했던 것이다. 사회는 이해 관계가 보다 분화된 이익 사회, 더욱 더 분화되는 사회로 나아가고 있다. 불교가 매일 자기 확산에서 오는 자기 상실을 두려워한다는 이름 아래 어떤 경직된 사상 하나에 고집하려 한다면, 그 자체가 자기 상실로 이끌어질 위험성이 있다. 왜냐하면 사상은 구체적 역사 안의 자리를 통해서만이 진정한 힘을 발휘하고 존재의의를 획득하기 때문이다.
깨달음과 자유는 개체로서 고립된 법으로서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그리고 사람과 세계 사이의 있어야할 모습에 대한 필연성의 자각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참다운 가치로 완성되는 것이다.
초월적 해탈이나 비역사적 도취에 숨음이 없이 오욕의 삶에서도 적극적 행위의 가능성으로 진정한 역사의 비전을 찾는 데에 불교사상의 창조적 적용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의 현실 앞에서 현실부정적 안락이나 안이한 긍정을 추구하려는 극단을 모두 부인하고 실천적 노력에 의해 진정한 역사 안에서 불교와 현실을 만나게 하려는 깨달음의 획득을 실천하여야 한다.
중생들이 살아가는 세계가 끊임없는 죄와 불의 그리고 고통으로 가득하지만 이 고통의 땅이야말로 곧 구원의 땅 정토이며, 이를 떠나서는 부처의 나라가 따로 있을 수 없다는 진실을 불교인들은 모두 함께 깨달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