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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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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의 향기 - 원택 1986년 10월 56호
1. 팔 만 대 장 경

우리는 고려대장경을 흔히 팔만대장경이라고 하는데 이는 대장경에 포함된 법문이 팔만사천이므로 그 큰 수를 들어서 팔만대장경이라 하거니와 불교에서 팔만사천이란 많은 것이란 뜻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
또한 고려대장경은 그 대장경판의 수에 있어서도 무려 81,340여장이나 되며 책으로는 6,815권이나 되며 그 종류도 1,521 종류가 된다.
이를 중국에서 만들어진 대장경과 비교해 보면, 중국에서는 송대(宋代)에서만도 전후 5회의 대장경 불사가 있었는데 흔히 촉판(蜀板)이라고 일컬어지는 세계 최초의 한역대장경인 개보판(開寶板)을 비롯하여, 동선사판(東禪寺板), 개원사판(開元寺板), 사계판(思溪板),적사판( 妙板) 등이 있으며 송나라 장경 가운데서 가장 우수하고 대표적인 장경인 사계판(思溪板)이 오늘날까지 완전히 남아있는데 권수로 5,740권이며 최근 협서(俠西) 장안(長安) 와룡사(臥龍寺) 등에서 발견된 적사판( 妙板) 6,362권이 현존해 있다.
이들 송나라 장경들에 비하여 고려대장경은 그 책의 권수에 있어서나 장경 판수에 있어서도 많은 수량일 뿐만 아니라 대장경을 주조한 여러가지 면에서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대장법보(人藏法寶)이다.
보편적으로 한국 대장경의 역사는 전후 2회이며 의천대각국사의 속대장경 간행까지 3회이지만 속대장경의 간행은 어디까지나 의천대각국사의 개인적인 발원에서 시작되었으며 구판(舊板) 대장경에 빠진것을 보충하는 것으로 삼았으므로 정장경(正藏經)의 간행은 2회라고 할 수 있다.
구판(舊板)은 거란의 침공을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물리치기 위하여 현종(顯宗)때 발원하여 문종(文宗)때 정장(正藏)을 완성하고 다시 선종(宣宗) 4년 1087년에 대각국사 의천스님이 송나라에서 모은 장소(章疎)로 속장경(續藏經)을 완성하였다.
현종 이후 60여년에 걸쳐 정장(正藏)과 속장(續藏)이 이룩되었으며 송의 개보판(開寶板) 즉 촉판(蜀板)의 영향과 지금은 없어진 거란판(契丹板) 장경에 의거한 바가 많았기에 당시로서는 가장 완비된 대장경으로 팔공산 부인사(符印寺)에 봉안되어 있었는데 고종 19년 서기 l232년에 몽고병의 병화(兵火)로 이 무상대보(無上大寶)는 불태워지고 말았던 것이다.
이 초간본(初刊本) 대장경의 판본은 일본에 일부 전하고 있으며 속장경의 편란도 흩어져 버렸던 것이다.
부인사에서 장경이 불타 없어진 후 5년이 지나서 왕과 왕족들과 대신들은 목욕제계(沐浴齊戒)하고 다시 대장경각판(大藏經刻板)외 서원을 세웠던 것이다.
드디어 고종 23년 서기 1236년에 대장도감(大藏都監)이 다시 설치되었은데 이 도감에는 본사(本司)와 분사(分司)가 있었으며 본사는 강화(江華)에, 그리고 분사는 남해(南海)에 두었다. 여기에서 대장경 주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대장경 주조는 단순한 불교사업이 아니었다. 여러 차례에 걸쳐 일어났던 전쟁은 민생(民生)의 위협은 물론 정신적인 피폐로 인한 극도의 정신 분열 상태에 빠진 민중의 정신을 한 곳에 응집해야 할 필요에 의하여 위로는 국왕과 왕족과 대신이 아래로는 백성들이
민족 자존(自存)을 위해 한마음 한뜻이 되어 오직 나라를 구할려는 일념으로 대장경을 다듬고 판각하였던 거국적 민족적 대 사업이었던 것이다.
오늘날 경솔한 몇몇 사학자(史學者)들어 침략군이 쳐들어 왔는데도 무기력(無월力)하게 대장경이나 다듬고있었던 그 당시의 사조(思조)를 힐난하지만 대장경의주조는 무기력하고 단순한 불교사업이 아니라 온 백성의 마음을 한 곳에 웅집시키고 민족와 동질성을 확보할려는 민족주의척 성격이 강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런 정신아래 시작된 대장경 불사는 고종38년 l251년에 전 대장경이 완성되었는데 이는 16년이나 걸린 대불사였던 것이다.
대장경이 처음 만들어져서는 강화도에 모시고 있다가 왜구들의 노략질이 심해지자 서울의 지천사(支天寺)로 옮겼다가 조선조 태조 6·7년인 서기 1398년에 해인사로 운반되었던 것이다.
대장경의 주조과정과 규모는 대체로 경판의 나무는 자작나무(白傳)이며 이 나무는 제주도를 비롯한 거제도, 완도, 울릉도 둥의 도서에서 많이 생산되었으며 이 나무를 벌목하여 통채로 3년 동안 바닷물에 담갔다가 꺼내어 조각을 내어 다시 소금물에 삶은 뒤 그늘에서 말리고 대패질을 한 후 경문(經文)을 붓으로 쓰고 그에 따라 새겨갔던 것이다.
이렇듯 고려대장경의 주조는 정성에 정성을 다하였던 까닭으로 한자의 오자(誤字)도 한자의 낙자(落字)도 없는 구양순체로, 사람이 쓴듯한 아름다운 글자는 세계 어느 나라 대장경과도 그 우수성을 비교할 수가 없다.
중국의 대장경은 송대 이후 명대(明代)에 이르러 전후 4회 걸쳐 대장경 불사가 있었는데 명의 만력(萬鷹) 17년 서기 1589년에서 청초(淸初)까지 70년에 걸쳐 이룩한 중국 최고(最高)의 대장경이라 일컬어지는 만력판(萬歷板)과 비교해 볼 때 고려대장경은 우선 그 체제와 교정이 정확한 점과 글씨의 조각이 섬세하고 정교하며 오자(誤字)와 낙자(落字)가 없는 점파 글씨가 뛰어난 점, 이미 없어진 거란장경의 일부가 포함된 점, 중국 대장경에 없는 경전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 등 그 장점은 이루 헤아릴 수 조차 없다. 그리고 경판의 두 끝에는 각목(角木)으로 마구리에 붙여 뒤틀리는 일이 없도록 하였고 전체 판 위에다 가볍게 옻칠을 하고 네 귀에는 동제장식(勳l製藍節)을 달았다. 그리고 경판 한면의 행수(行數)와 행당자수(行當字數)는 대개 23행 14자 정도인데 약간의 차이는 있다.
이러한 고려대장경은 훨씬 후대에 만들어진 어떤 대장경보다도 우수한 점을 많이 가지고 있어서 근대에 만들어진 일본의 신수대장경과 같은 현대적 불교 대장경에 그 중심적 표본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무상대보(無上大寶)를 가진 우리 민족이 문화민족으로써의 자부와 민족적 긍지를 우리에게 줌은 물론 세계의 정신사에서도 그 위대함이 찬란한 성보(聖寶)중의 성보임을 생각하여 그 보존과 대장경에 대한 연구를 거듭하여야 할 것이다.
아울러 이러한 성보를 보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대장경속에 들어 있는 부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실천하며 몸소 수행함을 그 바탕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해인사가 법보종찰로써 내외(內外)가 분명한 한국의 대가람이 되어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