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이란 마시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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뜰앞의 잣나무 - 동봉
1990년 05월 99호
불교가 다른 종교에 비하여 특히 마음을 편하케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뭐니뭐니 해도 불교가 강고 있는 자유[無碍]사상에 있을 것이다. 자유사상은 크게 네 가지로 대별되는데 그것은 진리에 대한 자유[法無碍], 언론의 자유[辭無碍], 생각에 대한 자유[義無碍], 유우머에 대한 자유[樂說無碍]이다.
이러한 자유사상을 바탕으로 부처님의 가르침[法]을 자유롭게 생각하고 자유롭게 토론하며 여러 가지 비유와 해학을 곁들여 듣는 이로 하여금 기쁨과 만족을 느끼게 하는 것이 이른바 네 가지 거침없는 말재주[四無碍辯才]다.
아무리 훌륭한 가르침을 갖고 있다손 치더라도 방편[樂說]을 구사하지 못한다면 딱딱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또한 자유롭게 생각할 수 없고 자유롭게 토론할 수 없다면 고정된 틀 속에 갇혀 이미 최상의 진리를 드러낼 수 없게 되어버린다. 갈릴레이 (Galileo Galilei ;1564∼1642)는 지동설을 주장하였다가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자기의 진실된 주장을 꺾고 말았지만 그러나 그의 생각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생각에 대한 자유가 아무리 있다 하더라도 언론에 대한 자유가 말살되면, 그리고 토론의 길 곧 언로(言路)가 막혀버리면 새로운 사상은 싹트기 어렵다. 불교는 그러한 면에서 획일성을 거부하는 매우 자유스러운 종교요 또한 편하게 해주는 종교다.
자유(自由)가 ‘스스로 말미암아’란 뜻을 지닌 데 대해 자재(自在)란 ‘제 스스로 존재함’이란 뜻을 갖고 있다. 전자가 시간적 의미로서의 자유로움을 말한 것이라면 후자는 공간적 자유로움을 뜻한 말이다. 거기에 무애(無碍)란 낱말은 시간과 공간 모두에 자유로움, 거침없음을 뜻하는 것이다. 위와 같은 견지에서 볼 때 원효 큰스님이 무애가〈無碍歌)를 지어 대중가요처럼 부르면서 대도시를 전법의 무대로 삼았다는 것은 매우 신선한 느낌을 가져다 주는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생각의 자유, 언론의 자유, 진리의 자유, 방편[樂說]의 자유가 없었다면 우리는 불교를 그야말로 케케묵은, 전혀 쓸모가 없는 종교로 치부해도 좋으리라. 본디 법(法)이란 글자가 ‘물(沈=水) 흐르는(去) 모습’을 설명한 것이라면 의미는 더욱 분명해진다.
어느 종교나 그 종교에서 인간이 올바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덕목을 결정한다. 그것이 이른바 율법이요 계율이다. 다른 교리와 달리 계율이나 율법은 보다 인간의 행동에 제약을 가하는 덕목이다. 언어라든지 육체적인 행동에 가하는 제약은 정신적인 것에 대한 제약보다 엄격하기 마련이다. 불교에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수행자라든지 일반 신도들이 지켜가야 할 계율이 있고, 그러한 계율이 완전할 때 바라는 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본다.
이러한 재약을 바탕으로 깔고 있으면서도 불교 특유의 자유사상을 펴 나간 분을 대표적으로 든다면 원효 큰스님 이외에도 원광법사(圓光法師 ;542∼640)를 얘기할 수 있다. 원광법사는 화랑에게 세속오계(世洛五戒)를 일러주어 평생의 귀감은 물론 화랑도 정신의 기초가 되게 한 분이다. 그의 세속오계는 이러하다.
사군이충(事君以忠), 사친이효(事親以孝), 교우이신(交友以信), 임전무퇴(臨戰無退), 살생유택(殺生有擇)로서 즉 군왕을 섬기되 충성으로 하고, 어버이를 섬기되 효도로써 하며, 벗을 사귀되 믿음으로 하고, 싸움에 임하되 물러섬이 없으며 살생을 하되 가려서 하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불교에서 얘기하는 오계와는 좀 다른 면을 엿볼 수가 있다. 첫째는 국가에 관한 것이요, 둘째는 가정에 관한 것이며 세째는 사회에 관해서요, 네째는 국방에 관해서이며 다섯째는 생명에 관한 문제를 말한 것이다. 충(忠)과 효(孝)와 신(信)은 일반적으로 모든 인간이 지녀야 할 기본적 윤리라면 이는 어떠한 종교, 어떠한 부류에 속한다 하더라도 반드시 이행해야 한다.
그러나 전쟁에 물러서지 않음과 살생에서의 선택은 언제나 그 시대, 그 사회와 밀접한 연관성이 있음을 생각지 않으면 안 될 일이다. 무엇보다 불교에서 내세우는 가장 중요한 테마가 생명의 중시요, 자비사상인데 살생에 대하여 매우 포괄적인 자세를 취한 것이라든지 비폭력을 주장하는 종교인 불교가 그것도 민중의 사표가 되어 이끌어주어야 할 스님이 전쟁에 관한 무퇴(無退)의 견해를 피력하고 또한 계율로까지 승화시켰다는 점에서는 우리의 촉각을 곤두서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 다시 돌이켜 보면, 불교는 언제나 대승적(大乘的)인 견지를 굳건히 지켜왔음을 알 수 있고, 따라서 그러한 사고는 바로 불교의 자유사상으로 인하여 용서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자유사상의 바탕 위에서 불교의 다섯 가지 계율을 새롭게 해석해 보는 것도 결코 무의미하지는 않으리라 본다.
불교의 다섯 가지 계율은 불살생(不殺生), 불투도(不偸盜), 불사음(不邪 ), 불망어(不妄語), 불음주(不飮酒)다.
이는 살생하지 말라, 홈치지 말라, 사음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술마시지 말라로 각기 풀이되고 있다. 종전에 우리 불교에서는 이러한 해석만을 고수해 왔다. 물론 현재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자세히 생각해 보면 거기에는 정말 부처님의 가르침, 바로 그 근원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또 다른 해석을 내릴 수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첫째, 불살생(不殺生), 생명은 결코 죽는 것이 아니다. 또한 죽이고자 하나 그렇게 될 수 없다. 생명은 불생불멸이요, 육체는 부증불감(不增不減)이다. 끊임없이 윤회하는 주체, 그것은 생명이다. 생명은 윤회할 뿐, 생멸하는 게 아니다. 따라서 육체 역시 변화할 따름이지 생겼다 없어지는 현상은 아닌 것이다. 그런 까닭에 아무리 남의 생명을 앗으려 하더라도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생명은 결코 죽지 않는다고 풀이될 수 있다.
둘째, 불투도(不偸盜), 홈치거나 홈쳐지지 않는다. 다만 공간의 이동만이 있을 뿐이다. 도(盜)자가 제2의 장소[次]로 옮겨감[皿]을 의미한 글자다. 홈치기 위해서는 어떠한 물건을 어떠한 용기[皿]에 담아 다른 공간, 장소[次]로 가져간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아무리 홈쳐봐야 이동하느라 에너지만 소비할 뿐, 영원히 자기가 갖고 가는 게 아니다. 본디 무소유의 입장에서 본다면 애당초 홈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어차피 빈손으로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째, 불사음(不邪 ), 음(種), 그 자체는 삿된 것이 아니다. 그 자체는 매우 경이롭고 숭고한 것이다. 성스러운 것이다. 그러므로 성즉성(性卽聖)이라 할 수 있다. 모든 존재가 존재하게 된 그 바탕이 바로 거대한 두 에너지[陰陽]의 결합이다. 우리 모든 생명체를 비롯하여 그 생명체가 숨쉬는 공간이나 그 생명체가 소비하는 먹이나 모두는 바로 성의 결합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다만 인간에게서 음[性]을 삿된 것으로 보는 것은 섹스라는 행위가 있은 뒤에 따라 붙은 갖가지 문제점들이 문제일 뿐이다.
네째, 불망어(不妄語), 언어는 결코 허망하지 않다. 어떤 말을 하든 말한 사람은 자기가 한 멀에 대하여 책임감을 갖게 된다. 선한 말은 선한 말로 되돌아오고 악한 말은 악한 말로 되돌아온다. 언어란 일단 입을 떠나면 우주공간에 진동이라는 기호로 메모리되어 있다가 그 기호에 해당하는 키를 누르면 반드시 재생되어 되돌아온다. 언어가 헛되지 않은 것이기에 언어에 대해 가려 쓸 필요가 있다. 언어 그 자체 역시 진실한 마음을 그대로 표현, 표기하는 기호다.
다섯째, 불음주(不飮酒), 술은 마시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음미(吟味)할 뿐이다. 범망경(梵網經)에서는 술을 마시는 데 36가지 허물이 따라 붙는다 하고 육방예경(六方禮經)에서도 다섯 가지 허물을 얘기하고 있는데, 술은 대체로 정신을 혼미하게 하기 때문이다. 정신이 흐려지면 생각지 않았던 실수를 저지르기 쉽다. 항상 맑은 정신으로 살 것을 권장하고 있음이 불교의 기본 입장이다. 사업자간의 거래에서, 국제무역의 바이어들 사이에서 술은 필요하다. 그러나 마구 퍼마셔 상대방보다 먼저 떨어지면 상담은 패한다. 화합을 도모한 자리에서도 술은 적당하게 해야 한다. 술은 그러나 적당이라는 단어를 용납하려 않는다. 향상 지나침을 좋아한다. 마시지 말고 음미하라. 술이란 마구 퍼마셔 대는 음식이 아니다. 어떠한 상황, 어떠한 분위기에 맞춰 술이란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기에 필요악이다.
마음을 가둬두고 살지 말고 활짝 열어 놓을 일이다. 새로운 봄에 대지를 촉촉히 적시며 내리는 비는 겨우내 숨어 있던 새생명들에게 자유의 공간, 따스한 햇살이 있음을 알리는 대자연의 기호다. 부처님이 이 땅에 오심은 우리 모두에게 넉넉한 자유와 가지런한 평등이 있음을 일깨우려 하심이다. 그렇다면 진정 자유는 무엇이며 자재와 무애 또한 무엇인가. 원광 큰스님의 자유사상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