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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苦)에 대해서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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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인논단 - 아용 1983년 03월 13호
4. 고(苦)의 해결
불교에서의 「고」의 해결이란 그것의 극복 소멸 내지는 해탈(解脫)을 일컫는 것이다. 즉 「괴로움을 알고(苦諦), 괴로움이 일어남을 알며(集論), 괴로움이 소멸되는 저 길(道論)을 아는 자들, 그들은 마음의 해탈과 지혜의 해탈을 이루어 윤회를 종결시킬 수 있나니, 그들은 속된 삶과 노쇠함을 누리지 않으리라*」고 하였다.
불교에서 「고」의 극복은 그 원인의 제거에 있다고 본다. 근본무지(根本無知)로 말미암아 맹목적인 어두운 행동을 일으키고, 어두운 동에서 정신작용 등 여러 가지 현상이 벌어져서 생, 노, 병, 사 따위의 변천이 되풀이 된다. 하니 무명(無明=근본무지)을 타파하는 것이 최상의 길이다. 이 길의 취득을 불교에서는 각(覺)이라 하고, 각을 이루어 고통을 넘어서는 것을 해탈이라 한다.
「각」이란 붇다(Buddha)라 음역한다. 이 말에는 각오(覺悟)와 각찰(覺察)의 두 가지 뜻이 있는데, 각찰은 나쁜 일을 살펴보아 아는 것이요, 각오는 진리를 깨닫는 것이다.
이 「각」의 정황(情況)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있다. 청원(靑原;?~740)선사의 설법에 보면「노승이 삼십년 전 참선 하기 이전에는 산은 청산이요 물은 녹수였다(見山是山 見水是水). 그 뒤, 이 길에 들어서고 보니 산이 산이 아니요 물은 물이 아니더니(見山不是山 見水不是水), 마침내 깨닫고 보니 산은 의연코 산이요 물도 의연코 물이더라(見山祈是山 見水祈是水)*」고 하였다.
이것은 대상의식(對象意識)을 끊어버리고 또 이 끊었다는 의식마저 끊은 뒤, 이제는 더 끊을래야 끊을 것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해탈이란 온갖 탐욕을 끊고 일체의 상(相), 일체의 집착, 일체의 번뇌, 일체의 생사, 일체의 인연, 일체의 과보(果報)를 끊는 일이다. 즉 각(覺)하는 일이다.
그 밖의 「고」의 해결 방법으로는 삼십칠조도품(三十七助道品; 열반의 이상적 경지에 나아가기 위해 닦는 서른 일곱 가지의 수행)을 들 수 있는데, 여기서는 그 가운데 언급된 팔정도(八正道)에 대해서만 소개하겠다.
팔정도는 구체적으로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推),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의 여덟 가지를 말한다.
정견은 바른 견해이다. 즉 불교적인 올바른 세계관 인생관으로서 연기와 사제의 도리를 올바르게 아는 지혜이다.
정사유는 바른 생각이다. 불타의 교법을 바르게 사유하여 이것을 자기가 체득하고자 하는 심리적 작용을 말한다.
정어는 바른 말이다. 진실을 말하고 바르게 평가하며, 자애롭고 유익한 말로 서로 협조 융화함을 뜻한다.
정업은 바른 행동이다. 신체적 행위에 과오가 없음은 물론 나아가 적극적으로 바른 행위를 실천함을 뜻한다.
정명은 바른 생활이다. 불교적 정신에 입각하여 뜻으로는 바른 생각을, 입으로는 바른 말을, 몸으로는 바른 행위를 행하여 일상생활에서 정견을 구현해 가는 것이다.
정정진은 바른 노력이다. 팔정도의 나머지 일곱 가지를 실현키 위한 부단한 노력을 말한다.
정념은 바른 기억이다. 정견 따위의 불교도로서 필요한 것을 마음 속에 두어 잊지 않는 것이다.
정정은 바른 명상이다. 모든 욕심과 산란한 생각을 가라앉혀 선정(禪定)에 들어감을 말한다.
이상에서 설명한 팔정도의 하나 하나는 독립된 것이 아니라 서로 밀접하게 관계되고 도움을 주고 받으며 동시에 행해져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고」를 해결한 궁극적인 상태는 「지자(智者) 는 열반에 도달하나니, 그것은 속박에서의 해방이요 제일 높은 것이다…」라는 말에서 보이듯이 모든 개념 뒤에 있는 실제인 열반에 이르게 된다.

5. 「고」의 해결에 있어서의 불교적 특정
불교에서는 어느 누구나 최상의 경지를 노력에 의해서 다같이 누릴 수 있는 것이라고 하는 보편적 입장을 취하며, 「고」의 해결의 궁극적인 상태가 최고의 완성적 인격자 그 자체를 말한다.
이런 의미로 볼 때 불교는 철저한 인본주의(人本主義)요, 인간중심의 종교다. 불교적 의미로 본다면, 절대자는 허무맹랑한 가설이며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는데, 과학에서 하나님을 찾을 수 없다는 결론과 마찬가지의 입장을 취하게 된다 하겠다.
더우기 선종(禪宗)같은 경우에는 ‘직지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 이라고 하여, 진리가 이렇느니 저렇느니 하고 가르치신 불타까지도 안중에 두지 않고, 오로지 자기자신의 피나는 참구에 의해서만 진정한 자아발견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 결론
「고」의 문제는 인간에게 있어서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며, 영원히 지속될 숙제이다.
앞에서 대강 살펴본 대로 불교에서 이 「고」의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하는 방법은 충분히 주목되어져야 하리라고 믿는다. 특히 현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이와 같은 불교의 합리성, 과학성이 만족을 주는 한 요인이 될 것이다.
크리스마스 함프레이는 불교가 서양 사람들에게 매력을 주는 몇 가지 이유를, 「첫째 불교에서는 아무런 독단이 없다는 것이고, 둘째로 이성(理性)과 감성(感性)에 공히 만족을 주고 자신감을 주며, 과학 종교 철학 심리학 논리학 예술 등도 포함해 있으며, 또한 불교에서는 바로 인간 자신의 운명을 창조하며 조종한다고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제 세계적으로 「고」의 피난처는 불교일 수 밖에 없다고들 말한다. 이와 같은 많은 사람들의 뜻에 부응키 위해서라도, 불교는 좀더 심오한 사상적 종교적 입장을 전개해 나가고, 생활 속에 살아 움직이는 종교여야 하리라고 믿는다. 〈끝〉

본문에서 *표를 한 곳은 여러 문헌에서 인용한 부분이나 편집상 그 출처를 일일이 밝히지 못했음을 알려드립니다. -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