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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란 무엇인가-비유품(譬喩品) 제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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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화경이야기 - 이원섭 1990년 05월 99호
ㄷ. 불 속에서 뛰노는 애들
생사의 고통을 걸머지고 있는 우리의 생존이 불길에 싸인 집 속에 갇혀 있는 꼴임을 앞에서 보아왔거니와, 이런 상황 속에서 부처님과 중생들이 보이는 반응을 별비(別譬)를 통해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장자(長者)가 큰 불이 사변에서 남을 보고 크게 놀라 두려워해 이같이 생각하되, 내 비록 불붙은 문 편히 벗어나 왔으나, 애들은 불꽃 싸인 집안에 아직 남아 놀이에 미쳐 이를 깨닫지도 알지도 못하며 놀라워도 두려워도 하지 않아서, 불이 와 몸에 닿아 고통이 다가오되 근심걱정 아니하여 나오려는 뜻 없도다.”
일단 이것을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화재의 경우라고 가장해 보자. 집에 불이 불었다면 아무리 철없는 아이라도 모든 것을 내팽개친 채 밖으로 뛰어나가고 말 것이다. 어떤 소중한 장난감도 생명에 비길 때는 아무 것도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비유속의 아이들은 불길에 태워지는 바 되면서도 이를 알지 못하기에, 나오려 하기는커녕 놀이에 미쳐 정신이 없다고 되어 있으니 사태는 심각하다.
그러면 그토록 우리의 마음을 뺏는 놀이란 무엇인자 사랑과 부의 추구, 권력과 명예에 대한 집착 따위, 요컨대 범부가 하는 일 모두가 놀이이니, 그것이 놀이가 되는 것은 기실 허망한 일일 수밖에 없는 데에 있다. 가령 사랑을 놓고 본대도, 한창 달아오른 당사자들에는 그것이 더없는 행복같이 느껴진다 해도 이내 여러 번거로움을 수반하다가 결국은 애별리고(愛別離苦)로 끝장이 나고, 그러자니 지내놓고 볼 때 일생을 헛 산 것밖에는 될 것이 없다. 어째 이뿐이랴, 하나의 제국을 건설하거나 문화의 면에서 불후의 업적을 남겼다 쳐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이는 자기가 걸머진 생사의 급박함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며, 어느 정도 알고 있으면서도 애써 외면해온 탓이니, 모든 것이 실존(實存)에 대한 호도(糊塗)가 아닐 수 없다.
어느 부자집에 돌잔치가 있어서, 한 하객이 찾아갔다. 그는 주인이 자랑삼아 안고 나온 아이를 보자 말했다.
“아, 그 놈 ! 이 다음에 장관은 되겠다.”
그는 주인으로부터 칙사 대접을 받았다. 그 다음에 나타난 손님은 말했다.
“참 잘도 생겼군요 이 아이는 필시 큰 부호가 될 것입니다.”
그 역시 정중한 대접을 받았을 것은 말할 나위 없다.
그런데 세번째로 나타난 사람은 말했다.
“이 아이는 결국 죽고 말겠군요”
화가 난 주인은 술은 커녕 욕하고 때려서 쫓아냈다.
이는 노신(魯迅)의 수필에 나오는 이야기거니와, 부귀의 몸이 될 것이라고 거짓말을 한사람은 환영받고, 생에는 반드시 죽음이 따르는 법이매 세번째 사람은 진실을 말한 것이 되는데도 매만 맞고 쫓겨났으니, 생사의 고에서 애써 눈을 돌리고 허망함만 쫓는 우리 또한 이 돌잔치집 주인 영감인 셈이다.
그리고 중생의 부처님에 의해 이같은 우리의 모습이 비로소 드러냈음을 유의해야 한다. 미망(迷妄) 속에 있는 중생에게는 자기의 미망이 보일 리 만무한 반면, 부처님은 그것으로부터 ‘편히 벗어 난’ 분이시기에 그 미망의 양상을 샅샅이 보실 수 있는 것이니, ‘크게 놀라고 두려워 하는’마음을 내신 이유도 여기에 있다. 탕자가 되어 떠돈 과거가 있기에 예전의 자기처럼 떠도는 사람을 보면 딱한 마음이 움직이듯[曺爲蕩子 偏憐客], 일찌기 생사의 고에 시달린 경험이 있으신 까닭에 비심(悲心)을 일으키신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그런 비심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이 되어 나타났던가.

ㄹ. 문 밖에 서서
장자는 생각한다.
“집에는 문이 하나인데다가 그 더욱 협소커니, 애들 어려 철 없어서 노는 곳에 연연(戀戀)하여, 행여 떨어져서 저 불에 데일세라, 불이 그 얼마나 무서운가 일러 주되, 이 집 이미 불꽃에 타고 있나니, 늦기 전 빨리 나와 불에 타 죽는 일 없도록 하라 하리로다.”
그러고는 문 밖에 서서 외쳐댄다.
“너희들은 빨리 나오라.”
이 글에는 크게 보아(1)불에 타고 있어서 정세가 급박하다는 것과, (2)좁은 문 하나가 있을 뿐이라는 것과, (3)그러기에 빨리 나와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먼저 불이 타고 있다는 것은 어떤 상황인가. 말할 것도 없이 생사가 불의 정체여서 이를 부연하면 생사병로가 되겠으나, 이때에 빠지기 쉬운 오해는, 생이 따로 있고, 노·병·사도 각각 따로 있다고 여기는 일이다. 물론 정상적인 생애를 보내는 사람을 기준으로 삼을 때는, 우리의 일생은 이 네 가지 시기로 구분되는 듯이 느껴지는 면이 없지도 않다. 그러나 가령 젊음이 늙음으로 옮아간다 해도, 어디까지가 젊음이요 어디까지가 늙음인지도 명확치 않을 뿐 아니라, 순수한 젊음은 일정기간이 지속되다 어느 순간을 지점으로 하여 그와는 전혀 다른 늙음으로 전환한다고 여기기는 어렵다. 늙음이 있는 것은 젊음이 있었기 때문이므로, 도리어 젊음의 그때부터 늙어가고 있었던 것이라고 봄이 보다 진실에 가깝다. 이리하여 결국은 태어나는 그때부터 우리는 늙어가고 죽어가고 있는 것이어서, 생로병사는 기실 하나라고 해야 할 면이 없지 않다. 그리고 시간이라는 것도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우리 자신)의 변화를 측정하는 형식에 지나지 않으므로, 우리의 의식(意識)의 흐름이 시간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으니, 불교에서 ‘한생각’과 ‘한순간’을 똑같이 일념(一念)이라는 말로 나타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따라서 죽음도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그가 어리건 젊건 간에 지금의 이 생폰 속에 들어와 있는 현상일 뿐이니, 열반경에서 “한번 숨쉬고 한번 눈을 깜짝이는 사이에도, 중생의 수명은 사백번이나 나고 죽는다”고 하신 것이라든가,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에서, “인명이 얼마사이에 달렸느냐”고 물으신 끝에, 한 사문은 “며칠 사이에 달렸다” 대답하고, 또 한 사문은 “한 끼의 밥을 먹는 사이에 달렸다”고 대답하자, “너희들이 도를 모르는구나.”하시고, 다른 사문이 “호흡하는 사이에 달렸다”함에 미쳐서야, “그러하다. 네가 도를 아는구나 ”라고 말씀하신 것이 다 이 때문이시다.
이렇게 상황은 촉각을 다툴 정도로 급박하건만, 나갈 길이라곤 좁은 문 하나가 있을 뿐이므로 사태는 더욱 딱하니, 이 하나의 문을 일승(一乘)이라 할 때 삼승 따위 방편의 가르침에 매달려서 될 일은 아니다. 그리하여 부처님은 삼계의 문 밖에 서서, “어서 나오라”고 외치시는 것이매 그 뜻이 더없이 절실하고도 간곡하시거니와, 그러면 중생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던가.
“아비 비록 이토록이나 가엾이 알아 좋은 말로 간곡히 깨우치건만, 자식들은 놀이에 넋을 잃어서 그 말을 좀체 믿으려 아니하여, 놀라지도 아니하고 두려워도 아니하여 끝내 나오려는 생각 없으며, 한 걸음 나아가 무엇이 불, 무엇이 집, 무엇이 목숨을 잃음인 줄조차 알지 못하고, 오직 동서로 달려 놀며 아비를 바라볼 따름이러라.”
사정은 딱하게 되었다. 아무리 생사로부터 빨리 벗어나라 외쳐보신댔자, 생사의 불꽃이 이 세계를 집어삼킬 듯이 맹렬하게 타오르고 있음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아니, 타고 있는 ‘집’이 무엇을 뜻하지는지조차 모른다 하셨으니,
“이 몸이 고(苦)의 그룻[苦器]이다.”
하셨듯이 오음(五陰)이나 십이입(十二入)·십팔계(十八界)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신심(身心)이 곧 고 자체임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죽음이 무엇을 뜻하지는지조차 알지 못하니, 어째서 그런가. 죽음이 육신의 종말을 뜻하는 데 그친다면 문제가 간단하다. 죽는 것에 의해 고가 끝난다고 칠 때에는 죽음이 위안이 될 수도 있고, 죽으면 죽음조차 없어진다고 여기면 다소의 아쉬움이 남는다 해도 체념할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부처님의 권속이요 아들인 터에 번뇌를 일으켜서 불에 타 죽는 것이므로, 이는 법신(法身)을 죽이는 일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깨달은 중생이 부처님이라면, 부처님이면서 미혹에 빠진 것이 중생이니, 본래 부처님이신 고귀한 신분으로 이것은 그 무슨 망령인가 어쨌거나 아무리 나오라고 외쳐대도, 이리저리 뛰놀다가 이따금 ‘아비를 바라볼 뿐’이라면 이를 어찌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