ㄹ. 문 밖에 서서
장자는 생각한다.
“집에는 문이 하나인데다가 그 더욱 협소커니, 애들 어려 철 없어서 노는 곳에 연연(戀戀)하여, 행여 떨어져서 저 불에 데일세라, 불이 그 얼마나 무서운가 일러 주되, 이 집 이미 불꽃에 타고 있나니, 늦기 전 빨리 나와 불에 타 죽는 일 없도록 하라 하리로다.”
그러고는 문 밖에 서서 외쳐댄다.
“너희들은 빨리 나오라.”
이 글에는 크게 보아(1)불에 타고 있어서 정세가 급박하다는 것과, (2)좁은 문 하나가 있을 뿐이라는 것과, (3)그러기에 빨리 나와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먼저 불이 타고 있다는 것은 어떤 상황인가. 말할 것도 없이 생사가 불의 정체여서 이를 부연하면 생사병로가 되겠으나, 이때에 빠지기 쉬운 오해는, 생이 따로 있고, 노·병·사도 각각 따로 있다고 여기는 일이다. 물론 정상적인 생애를 보내는 사람을 기준으로 삼을 때는, 우리의 일생은 이 네 가지 시기로 구분되는 듯이 느껴지는 면이 없지도 않다. 그러나 가령 젊음이 늙음으로 옮아간다 해도, 어디까지가 젊음이요 어디까지가 늙음인지도 명확치 않을 뿐 아니라, 순수한 젊음은 일정기간이 지속되다 어느 순간을 지점으로 하여 그와는 전혀 다른 늙음으로 전환한다고 여기기는 어렵다. 늙음이 있는 것은 젊음이 있었기 때문이므로, 도리어 젊음의 그때부터 늙어가고 있었던 것이라고 봄이 보다 진실에 가깝다. 이리하여 결국은 태어나는 그때부터 우리는 늙어가고 죽어가고 있는 것이어서, 생로병사는 기실 하나라고 해야 할 면이 없지 않다. 그리고 시간이라는 것도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우리 자신)의 변화를 측정하는 형식에 지나지 않으므로, 우리의 의식(意識)의 흐름이 시간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으니, 불교에서 ‘한생각’과 ‘한순간’을 똑같이 일념(一念)이라는 말로 나타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따라서 죽음도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그가 어리건 젊건 간에 지금의 이 생폰 속에 들어와 있는 현상일 뿐이니, 열반경에서 “한번 숨쉬고 한번 눈을 깜짝이는 사이에도, 중생의 수명은 사백번이나 나고 죽는다”고 하신 것이라든가,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에서, “인명이 얼마사이에 달렸느냐”고 물으신 끝에, 한 사문은 “며칠 사이에 달렸다” 대답하고, 또 한 사문은 “한 끼의 밥을 먹는 사이에 달렸다”고 대답하자, “너희들이 도를 모르는구나.”하시고, 다른 사문이 “호흡하는 사이에 달렸다”함에 미쳐서야, “그러하다. 네가 도를 아는구나 ”라고 말씀하신 것이 다 이 때문이시다.
이렇게 상황은 촉각을 다툴 정도로 급박하건만, 나갈 길이라곤 좁은 문 하나가 있을 뿐이므로 사태는 더욱 딱하니, 이 하나의 문을 일승(一乘)이라 할 때 삼승 따위 방편의 가르침에 매달려서 될 일은 아니다. 그리하여 부처님은 삼계의 문 밖에 서서, “어서 나오라”고 외치시는 것이매 그 뜻이 더없이 절실하고도 간곡하시거니와, 그러면 중생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던가.
“아비 비록 이토록이나 가엾이 알아 좋은 말로 간곡히 깨우치건만, 자식들은 놀이에 넋을 잃어서 그 말을 좀체 믿으려 아니하여, 놀라지도 아니하고 두려워도 아니하여 끝내 나오려는 생각 없으며, 한 걸음 나아가 무엇이 불, 무엇이 집, 무엇이 목숨을 잃음인 줄조차 알지 못하고, 오직 동서로 달려 놀며 아비를 바라볼 따름이러라.”
사정은 딱하게 되었다. 아무리 생사로부터 빨리 벗어나라 외쳐보신댔자, 생사의 불꽃이 이 세계를 집어삼킬 듯이 맹렬하게 타오르고 있음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아니, 타고 있는 ‘집’이 무엇을 뜻하지는지조차 모른다 하셨으니,
“이 몸이 고(苦)의 그룻[苦器]이다.”
하셨듯이 오음(五陰)이나 십이입(十二入)·십팔계(十八界)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신심(身心)이 곧 고 자체임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죽음이 무엇을 뜻하지는지조차 알지 못하니, 어째서 그런가. 죽음이 육신의 종말을 뜻하는 데 그친다면 문제가 간단하다. 죽는 것에 의해 고가 끝난다고 칠 때에는 죽음이 위안이 될 수도 있고, 죽으면 죽음조차 없어진다고 여기면 다소의 아쉬움이 남는다 해도 체념할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부처님의 권속이요 아들인 터에 번뇌를 일으켜서 불에 타 죽는 것이므로, 이는 법신(法身)을 죽이는 일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깨달은 중생이 부처님이라면, 부처님이면서 미혹에 빠진 것이 중생이니, 본래 부처님이신 고귀한 신분으로 이것은 그 무슨 망령인가 어쨌거나 아무리 나오라고 외쳐대도, 이리저리 뛰놀다가 이따금 ‘아비를 바라볼 뿐’이라면 이를 어찌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