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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죽거리에 얽힌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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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권 10호 - 원행 1982년 12월 10호
우리 민족의 역사 속에 스님으로서 자기 완성과 겨레의 앞날을 위하여 스스로를 돌보지 아니한 선각자가 적지 않다.
이렇게 숱한 선각자 중에 이조 중종(中宗) 4년(1509)에 태어나신 허응당(虛應堂) 보우(普雨)스님 또한 길이 잊혀질 수 없는 스님 중의 한 분이다.
스님은 15세 때 금강산(金剛山) 마하연암(摩詞衍魔)에 출가하여 수도를 하다가 설악산 백담사(百潭寺)에 머물고 계신 적이 있었다.
당시는 세조(世祖) 때 잠시 옹호를 받던 불교가 계속 되는 차별과 천시 속에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고, 위정자들은 파벌과 견해 차이로 다툼만 일삼아 나라가 안팎으로 기강이 문란해져 있었으며, 왕실에서는 인종(仁宗)이 승하하고 12세의 명종(明宗)이 즉위하자, 모후(母后)인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수렴청정(垂廉聽政)을 하게 되었다.
문정왕후는 신심(信心)이 돈독한 불제자(佛弟子)로서 명분과 자기 세력의 이익에만 급급한 유신(儒臣)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왕후는 파벌과 이익을 초월하고 수행과 학덕이 높으며 도량(度量)이 넓은 큰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고져 전국적으로 수소문을 하던 중, 재상(宰相) 정만종(鄭萬鍾)의 천거로 백담사로 보우스님을 찾아가게 되었다.
명종 6년(1551)에 왕후는 당시 유생들의 빗발치는 반대에도 불구하고, 연산군 때 폐지된 도첩제(度牒制)와 선교양종제(禪敎兩宗制), 그리고 과거제도인 승과(僧科)를 부활시켰으며 보우스님을 선종판사(禪宗判事)겸 봉은사 주지로 삼았다, 그리고는 스님들의 도성(都城) 출입이 허락되지 않은 법령관계로 왕후 스스로가 공양구를 갖추어 3일에 한 번씩 봉은사로 스님을 찾아 뵙고 나라의 크고 작은 일을 의논하였다.
이때부터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 명종 20년(1565년)까지의 15년간은 부처님의 법등(法燈)이 꺼지지 않게 하기 위한 기간이었다고 볼 수 있으니 이조 불교의 중훙조이자 왜적들의 대침략인 임진왜란으로부터 한반도를 구하는데 결정적인 힘이 된 승병대장 서산(西山)스님과 사명(四溟)스님 등이 이 때 설치한 승과를 통하여 등용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15년이 결코 순탄한 것만 아니었다. 이 기간 내에 이권을 빼앗기고 신임을 받지 못하는 조정 유신들과 전국의 유생들로부터 스님을 탄핵하는 상소문이 무려 400여회에 달했고 거유(巨儒) 율곡(慄谷) 마저도 \"논요승보우소(論妖僧普雨疏)\"에서 \"요즘 보우의 일로 온 백성이 통분해하니 그의 사지를 찢기 바랍니다<今慈普雨之事 擧國同憤 欲磔其肉>”라고 극언을 할 정도로 시기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함에도 스님은 \"오직 삼베옷에 솔잎을 먹으면 그만일 뿐 일생의 나머지 일은 나도 모를레라<唯此布衣松飯樂 一生無始亦無終>”이라 하며 묵묵히 겨레의 장래만을 걱정하면서 불법을 중흥시키는 데 오롯하였다.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난 그 해 조정에서는 스님에게 요승(妖僧)이라는 멍에를 씌워 제주도로 귀양 보냈고, 제주 목사(牧使) 변협(邊協)으로 하여금 장살(杖殺)케 하였다.
이렇게하여 보우스님은 자기의 완성과 불법의 중흥, 그리고 겨레를 위하는 오직 한 마음을 간직한 채 55세를 일기로 조용한 순교(殉敎)를 하였다.
이윽고 이듬해에는 도첩제와 승과도 폐지되었고 또 다시 스님들은 산으로 산으로 몸을 숨겨야만 했다.
보우스님을 암살한 제주 목사 변협은 임금께 바칠 제주도 특산인 훌륭한 말을 고르다가 “벌대충”이라는 말 앞에 서서 천하 명마임을 알아차리고 뒤로 돌아가 기웃거리는 찰나 “벌대충”의 뒷발질 한 번에 이승을 하직하고 말았다.
관원들은 그래도 희귀한 명마인지라 벌을 주지도 못하고 한양으로 보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벌대충”이야말로 보우스님의 화현(化現)이었으니 그날 밤 명종의 꿈에 보우스님이 나타나 “임금의 성총을 입어 불법을 중흥케된 은혜를 저버릴 수 없어 3년간 말이 되어 모시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명종의 기쁨은 말할 나위가 없었다.
이 때 보우스님은 또 다른 곳에 현몽하고 있었다. 그 곳은 보우스님의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스님이 귀양길에 오를 때 그 제자들도 몸을 피해 여주 쪽에서 살고 있었다. 스님은 꿈에서 “내가 말이 되어 아무 날 아무 시에 한양가는 아무 고개를 지날 터이니 거기에서 만나자”하였다.
제자들도 기쁘기 한량이 없어 바로 좋은 말먹이를 한바리 준비하여, 고갯마루에 나아가서 “벌대충”으로 화현한 스승과 눈물의 해후를 하였다. 이때부터 세인들은 이 고개의 이름을 “말죽거리”라고 불렀다 한다.
그로부터 왕과 약속한 3년이 지난 뒤 “벌대충이가 죽었습니다”하고 아뢰는 신하에게 명종은 노여워하며 다시 아뢰라고 호통을 쳤다. 물러나온 신하는 여러 동료들과 상의한 끝에 다시 아뢰기를 “숨을 들어쉬고 내쉬지 않은지가 사흘째이며, 먹이를 먹지 않은 지도 사흘째이며 누워서 일어나지 않은 지도 사흘이 되옵니다.”했다 한다.
임진년 국란으로부터 나라를 구한 서산,사명스님 같은 대성(大聖)들을 등용시킨 출중한 안목이 있었고 생사(生死)를 자재(自在)한 보우스님! 그 보우스님의 화현인 벌대충이 죽었다는 말을 듣지 않으려는 명종의 심종을 뉘라서 짐작할 것인가!
후대(後代)에 얄팍한 글을 쓰는 이들이나 편견을 가진 외눈짝이 사가(史家)들이 감히 스님의 진면목(眞面目)을 어찌 일푼이나마 헤아릴 수 있단 말인가?
사명스님이 보우스님을 일러 말씀하시길 \"대사가 동방의 작은 나라에 나서 백세(百世)에 전하지 못하던 법을 얻었느지라, 지금의 학자들이 대사로 말미암아 나아갈 곳을 얻었고 불도가 마침내 끊어지지 아니하였으니, 대사가 아니었다면 영산(靈山)의 풍류(風流)와 소림(少林)의 곡조(曲調)가 없어질 뻔 하였다\"고 했으니 이것으로서 스님의 위인됨을 짐작할 수 있지 않겠느가!
오늘도 \"말죽거리\"를 오가는 후손들은 많으나 스스로를 치장하지 않으며 본심대로 일하고, 어떠한 삶이 진정 겨레를 위하는 일이며 어떠한 용기가 진정 나라 사랑인가를 깊이 되뇌이는 후손들은 과연 얼마나 될는지...
스님의 유집(遺集) 허응당집(虛應堂集)만이 말없이 지켜 볼 뿐이다.
<해인사 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