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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심 불심 (女心 佛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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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한분옥 1990년 05월 99호
‘한줄기 향으로 한없는 향운계를 지어서 부처님께 바치오니 넓으신 자비로 받으시옵소서 ! ’
연한 보라빛 주단으로 한복을 새로이 손질해서 입고 이마에는 아직 땀방울이 채 가시기도 전에 향을 사루어 올리는 손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가슴 부푼 염원을 담아, 자기 몸을 태우면서 아름다운 향기와 광명을 발산하는 향을 든 소맷부리의 독선은 미소로 가득찬 부처님의 얼굴에 흐르는 곡선과 일치하여 참으로 어울리는 아름다운 예술적 한 순간이며 찰나를 연출한다.
며칠 전 초파일에 등불을 밝히며 부산하던 절간은 다시금 고요하고 적막할 따름. 바람은 풍경을 올리고 지나가고 손아귀에 쥐고 있던 세월을 긴 치맛자락 따라 잠시 풀어 놓으니 산사의 정적을 꿰뚫고 바람 따라 흩어진다.
그림같은 풍경 속에서 어느덧 서른의 마지막 나이를 꼽으며 가슴에 담긴 번뇌를 부처님 앞에 한가닥 향으로 사루어 올리는 자신은 마하가섭과 부처님이 나눈 염화시중의 미소를 떠올리며 한 순간 부처님의 가호 속에 살아감을 확신한다.
순간 부처님 얼굴에 감도는 자비롭고 온화한 미소가 가련한 중생인 나 자신을 포근히 감싸안을 듯한 느낌에 빠져 한참이나 그 미소 속에서 벗어날 줄 모르고 언제까지나 넋을 잃고 올려다 본다. 한세월 지나가는 바람같이, 흐르는 강물같이 지나온 세월이 어찌 막막하고 아쉽기도 한 날, 인생이란 주제로 혼자 생각하다 목이 마른 날, 일상을 훌훌 털어버리고 약속된 모든 일을 잠시 잊어 버린 채 오월의 산사를 찾아 나섰던 것이다.
산에 오르니 산은 언제나 다름없이 저만치 우묵 섰고 산자락에 기대인 작은 암자. 선방 앞에는 흰 고무신 한 컬레만 놓인 채 뒷산에 낮 꿩이 끼륵끼륵 울며 한낮의 정적을 깰 뿐 고요와 정막의 한가운데에 혼자 서 있는 듯 느껴진다.
황량한 공업도시, 먼지와 공해가 난무하는 도시에서 모든 괴로움과 어려움과 아픔으로부터 벗어나 올바른 깨달음의 맑고 밝은 지혜를 얻고 싶어 몸과 마음을 열어 산사 작은 암자를 찾아 나서는 것은 내 삶의 또 한 가지 빛깔이다.
이제 곧 장미꽃보다 더 짙은 빛깔로 라일락보다 더 높은 향으로 오월이 무르익으면 나이 한두살 더해져 깊어진 쓸쓸함과 함께 인생의 의미 또한 깊어지겠지.
다시금 청정감로수를 올리고자 생물을 길어다 다기그룻에 조심스럽게 따라 올리며 백팔번 절을 한다.
무명도, 무명도 다함없이, 늙음도 죽음도 다함없이, 고통과 고통을 없애는 길도 다함없이, 지혜도 없이 얻음도 없이 생각도 느낌도 의식도 뜻도 없이, 소리도 빛도 없이 공(空) 가운데로 사라지는 그러나 진실로 허망하지 않음을 깨닫고자 하는 그 깨달음을 찾아 나섰던 것이다.
행자스님을 따라 봐옵는 큰스님, 수도자의 마음에서 비쳐 나오는 빛을 받으며 교요히 앉은 자리에서 손수 끓여 주시는 차는 마셔서 잔은 비었는데 이조백자 진품으로 받아든 다향기는 처음 그대로이다.
선화를 그리다 옆으로 밀쳐놓은 선실(禪室)에서 승찬(僧瓚)대사가 지은 신심명(信心銘) 한 귀절을 배운다.

말이 많고 생각이 많으면
도리어 서로 통하지 못하고
말과 생각이 끊어지면
통하지 않는 곳이 없다.

삼보에 의지하는 마음으로 향기로운 꽃을 볼때마다 부처님께 꽃 공양을 올리고 싶고, 난초를 그리기 직전처럼 마음을 가다듬어 조심스러움과 간절함으로 수(繡)방석과 수가사를 지어 올리고 싶다.
통도사에 불화 전시실에서 본 불교 자수품을 대했을 때 옛 여인들의 불심을 짐작한다.
정교한 자수 노리개와 자수 주렴, 그 중에서도 연화도(蓮花圖) 수방석, 아무리 더러운 곳에서도 아름답고 깨끗한 꽃으로 피어난 연꽃 자수 방석은 그 연꽃의 향기와 여심이 되살아 난듯 그 불심은 전시실을 가득 메운 듯했다.
돈황석실의 천불동에서 발견되었다는 당대의 자수품, 현재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었다는 관음대사성상은 색채가 선려하고 수의 기교가 치밀하여 신기가 있으며 장엄하고 신태가 역역한 예술품이라 하는데, 어느 시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부처님을 공양하는 여인들의 불심은 불자수 작품에서도 그 신기를 짐작할 수 있다.
부처님이 6년간의 고행끝에 깨달음의 기운이 무르익었을 무렵 어느 여인이 끓여 올린 우유죽 공양을 받고 기운을 차려 깨달음으로 정진했던 일과, 반대로 춘다라는 대장장이가 바친 버섯요리가 부처님의 마지막 공양이 되고 말았다는 이 이야기를 동시에 떠올린다.

‘바라옵건데 대자대비하신 삼보님 ! 머리숙여 간절히 비옵니다. 어려움과 재난을 벗어나는 용기를 주시어 부처님의 법을 배우면서 모든 고통의 속박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
‘저의 정성 굽어 살피옵고 부처님의 크신 위신력으로 온 법계의 중생, 너와 나 할 것 없이 모두 성불하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 ’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도하며 하산을 서두른다.
며철전 초파일날 올라가고 내려오는 법우들의 행렬이 줄을 잇던 그날과는 달리 산길은 고요하다. 어디선가 소나무 숲 사이로 자지러질 듯한 산새의 울음소리가 산을 올리더니 솔잎 흔들며 불어오는 계곡 바람이 산새소리마저 잠시 쓸어간다.
산길은 다시 적막하다. 계곡의 물기에 앉아 잠시 쉬면서 맑은 물 속에 얼굴을 비춰 본다.
비춰 보이는 물 위에 관음보살의 자비로운 모습이 잠시 스쳐 지나가는 환상에 사로잡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