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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오신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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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권경술 1990년 05월 99호
사노라면 번다한 사연으로 때로는 까닮 모를 외로움으로 삶이 부담스럽게 여겨질 때가 있다. 그럴 땐 나는 시장바닥을 헤맨다.
난장에 널려 있는 온갖 상품이 성주괴공(成住壞空)의 나들이를 하듯, 장꾼들은 다 팔아봐야 겨우 하루를 이어갈 수 밖에 없는 하찮은 상품을 꿈 많은 소녀의 희망처럼 품고서 생주이멸(生住異滅)의 나들이를 맞잡아 엮고 있다. 이런 장꾼들을 보노라면 나는 분명 행복에 겨
워 값싼 고민을 하고 있구나 하는 자책감으로 그간의 번민을 놓아 버리고 활기찬 삶을 다시금 노래하게 된다.
그러나 시장바닥에서도 고뇌의 보따리가 해결되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럴 땐 나는 부처님의 일생을 쭈욱 훑는다. 지극히 선택된 삶에서 일상적인 행복을 마다하고 영원에 대한 그리움으로 몇 톨의 낱알과 한 모금의 물로 하루를 엮어 나가며 정진(精進)하시는 모습이 생생히 떠오른다. 나의 고뇌가 부처님의 고행담(苦行談)에 녹아 자취를 감춘다. 그리곤 감탄과 묘한 희열이 온 몸을 감싸온다.
‘부처님의 일대기(一代記)’가 그러하듯이 부처님의 가르침은 분명 내 삶의 의미를 새롭게 창출해내는 활력이 된 지 오래다. 일찌기 불법을 만나지 못했다면 나의 삶은 게으름과 무기력의 나락으로 끝없는 방황을 지금껏 계속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하여 법열(法脫)을 느끼는 순간 순간은 나에겐 곧 ‘부처님 오신날’이 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인지 초파일을 맞는 나의 감회는 늘상 새롭고자 한다. 외로운 암자의 곱디고운 하이얀 등처럼 추억속에 해맑은 사연 또한 그러하다. 부처님 오신 뜻을 기리느라 삼각산 도선사에서 밤새며 지켜 본 연등꽃밭엔 아직도 밤바람은 차가웠지만 무명(無明)과 졸음을 쫓아버리고자 하는 초발심은 한껏 피어오르고 있었다. 오랜 기다림에 지친 행자의 꿈나들이를 견책하듯 아첨으로 잔뜩 부풀려진 모인(某人)의 연꽃등 하나가 탄다. 어린 행자의 당혹감이 안스러웠다면 어른 스님네들의 무관심이 서럽게 밀려오던 밤도 새롭기만 하다. 대학생들이 명성암 뜨락에 밝혀 둔 연등은 밤이 깊어 갈수록 고요와 밝음을 더했다. 이는 아마도 학생들의 맑은 꿈이 빈자일등(貧者一燈)처럼 이공양(利供養)을 넘어 경공양(敬供養)으로 이어졌음인가 싶다.
이제 추억의 뜨락을 쓸고 부처님 오신날을 봉축하는 등불이 온 절간에 밝혀질 즈음이다. 둥 하나 하나에 실릴 기원도 각양각색일 테지만 대체로 세 가지 모습을 나타내지 싶다. 하나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출현하신 뜻과 그 유업을 찬탄하며 세 고을의 절을 찾아 바쁜 걸음으로 밝힌 등불이다. 그 등불의 모습은 다소 기복적이긴 하나 소박한 기원이 실려있음 직하다. ‘세 곳’에 의미를 부여하다 보니 등촉대가 부담스러워서 더러 흥정( ? )하는 어리석음도 매력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에겐 빈자일등의 사연을 통해 경공양의 의미를 바로 일깨워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십일조로 매월 적립식 천당행표( ? )를 사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류의 어리석은 믿음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등에는 현대 위기로 말기적 파멸에 직면한 인류를 구원하실 미륵부처님께서 출현하실 인연이 성숙되었으니 조속히 자비를 나투어 주십사 하는 기원이 실림 직하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일대사인연(一大事困緣)으로 출현하셨듯이. 그리하여 말법(末法)시대를 돌이켜 새로이 정법(正法)시대가 열리고 온 누리에 조각난 종교가 만법귀일(萬法歸一)하듯 다시금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와서 종교전쟁이 더 이상 심화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등불은 무명으로 찌든 어둠을 밝힘 직하다.
또 하나의 등은 참으로 알찬 모습일 것이다. 남이 밥먹어 내 배 부르지 않듯 미륵부처님 오신다 한들 내가 깨쳐 ‘부처’이룸만 같으랴 하는 자각적 서원의 몸부림을 실은 등이다. 이는 석가모니부처님처럼 먼저 깨달아 부처를 이룬 다음에 하화중생(下化衆生)하듯 초파일을 맞아 자신의 깨달음을 더욱 채찍질하는 자등명(自燈明)의 모습일 것이다.
하 아쉽고뇨 !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스스로를 등불 삼아 깨달음의 서원을 연등에 실은 이가 몇이나 될가? 스스로 부처 이루겠다고 출가하여 수도한 이 부지기수인데 석존 입멸 후 근 삼천년 동안 부처 이룬 이 종무하니 이 어인 변고런가? 알차 보인 등은 남보다 먼저 부처 이루겠다는 이기심으로 만심(慢心)만 부풀려 놓은 허풍이었나 보다. 성자(聖者)의 유품을 나르는 나귀마냥 고불고조(古佛古祖)의 보따리를 마치 제 보따리인 양 풀어 제끼는 사이비 대덕처럼. 이제 등 밝힘에 앞서 미륵보살이 수기(授記)를 먼저 받은 까닭과 지장보살이 서원하길 ‘지옥을 없애기 전에는 성불하지 않겠다(地獄末除 誓不成佛)’한뜻을 돌이켜봄 직하다.
부처님 오신 날을 봉축하고자 불 밝히러 산사로 향하는 많은 발걸음 속에서 금년에 내가 밝힐 풍은 어떤 모습일까 하고 반문해 본다. 늘상 그랬듯이 집밖을 나설 즈음은 세계평화와 불국토의 구현을 염원하기에 등의 색깔은 두 번째의 모습일 테고 절간 뜨락을 오르는 순간까지도 그 색깔은 지속될 것이다. 그러나 등을 받아들이고 어느 위치에 매달까 하고 좋은 장소를 고르는 동안 등은 어느새 첫번째 색깔과 뒤섞여 퇴색된 모습을 띌 것이다. 그런줄도 모르고 합장례하고 돌아 내려오는 길목에선 출가수행하지 못한 아쉬움으로 열은 한숨을 쉬는 순간 세 번째 색깔도 뒤섞여 등은 온통 욕심 사나운 모습으로 퇴색되어 버릴 것만 같다. 그런가 하면 남북통일과 국태민안 그리고 개개인의 소원성취를 내건 우리 승가의 등은 어떤 모습일까 하는 궁금증도 인다.
돌이켜보면 사회가 발전되어 기능의 분화가 불가피함에 따라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었음은 주지하는 바다. 그러나 이들 두 기능의 근원으로 거슬러 가 보면 정치는 종교가 제시한 전향적 비전(vision)에 따라 구체적 실현방안을 강구함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오늘날 종교계는 국태민안의 기도로 겨우 실낱같은 명맥을 유지할 뿐 현대위기 극복을 위해 이렇다 할 비전(vision) 제시가 없고 정치계는 교만에 빠져 독불장군이 된 지 오래다. 정치계가 혁명을 구실로 수많은 생명을 앗아간 부도덕한 공산놀이에 휘둘려 오랜 동서냉전의 늪에 빼져 인류를
불안하게 했고, 이제 탈공산하(脫共産化) 몸부림에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으나 그 전망이 불투명함 등등이 바로 이를 입증하고 있다. 종교를 부정한 공산종주국의 ‘고르바쵸프’가 교황을 만나러 가야 할 정도로 종교부재의 공산정치가 안고 있는 문제점이 심각함도 정치와 종교의 기능적 공조의 불가피성을 웅변으로 증명하는 바다.
이 즈음에 이르러서도 우리의 승가는 공산·자본의 사상적 대립을 종식시킬 새로운 사상의 창출이나 여타의 현대 위기 극복을 위한 비전(vision) 제시에는 함구한 채 그 무슨 흘러간 가요 같은 법난(法難)( ? )타령이나 하면서 대승보살도를 곁들여 옳고 있으니 딱하기도 하다.
부처님의 출현이 우리네 인류의 새로운 삶의 물고를 트기 위한 것이라면 하화중생(下化衆生)을 선도할 승가가 응당 먼저 새롭게 태어나야 할 것이다. 바라건대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부디 종교자체가 송가와 더불어 새롭게 태어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리하여 희망 찬 미래가 온누리에 펼쳐지길 두손 모아 빌어 본다. 올해의 연등이 더욱 밝게 빛나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