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하루만이라도 자비의 마음을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죽비의 소리 - 여연 1990년 05월 99호
여기 저기 산굽이에 피어 있는 야생 벚꽃들이 온통 싱싱한 봄을 휘감고 있다. 서양음악의 음계처럼 낮은 옥타브로 변화하는 연초록 새싹들이 숨이 막히게 아름답다. 홀로이 잉잉거리는 축복의 빛깔 속에 잠겨 있다는 게 벅차도록 슬프다.
가슴 저 안에서 무언가 무너지는 슬픔의 소용돌이 이 세계의 진실이란 삶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건네주는 얼이라고 노래했던 「이방인」의 저자 알베르 까뮤, 그 존재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이와같이 들었노라. 금쪽보다 더 눈부신 생의 진리를 전달했던 아란의 아름다움 보시의 마음 그 은혜가 출렁거린다.
혼돈의 소용돌이 어둠이 저자거리에 끝도 없이 헤메이는 우리들에게 세계의 진실이란 진실을 다 건네 주시기 위해 부처님이 태어나신 이 아름다운 계절 때문에 슬픔의 소용돌이가 이는 겔까.
자연은 우리들에게 순수무구한 나신(裸身)을 섬세하게 드러내 보인다. 감추어져 있던 것들을 몽땅 털어서 보이는 저 겨울나무 숲에서 창백한 무소유를 느끼며, 그와 달리 아무런 꾸밈이나 감춤이 없이 온갖 것들을 뿜어내는 이 찬연한 봄의 잎새 속에서 평온한 보시의 바다를 본다.
한 그루의 과일나무는 태어나면서 세상의 환희를 주며, 성장하면서 거친 세계에 희망의 말을 건네주며, 다시 성숙하여 그지없이 풍성하고 달콤한 열매를 목마른 우리들에게 안겨 준다. 마침내 그들의 몸을 던져 사람동네에 땔감을 얻게 해 주고 그나마 남겨져 있는 그루터기는 최후까지 지친 나그네에게 휴식을 샘터를, 명상하는 자리를 펼쳐준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는 제목으로 나온 어느 수상 속의 얘기 속에서 우리는 보시의 참뜻을 배워야겠다. 한 그루의 나무가 나눠주는 무한한 사랑, 남김없이 진설을 드러내어 보이는 사물의 생명 속에서 오늘 석탄일을 맞아 부처님이 중생들에게 가없이 나눠주신 사랑과 세계의 진실을 깊게 되새겨보자.
여러가지로 고통받는 이 땅의 우리 시대 부처님. 진실을 실천하며 사는 우려가 힘써 보시해야 할 구체적인 일은 무엇인가, 어렵고 깊게 얘기할 것 없다.
생을 꾸려가는 데 가장 기본이 되고 중심이 되는 일이 먹는 일, 자는 일인데, 그것들이 이 땅에선 전혀 해결되지 않은 채 삶을 죽음의 위기로 몰고 있다. 서민들은 방 한칸을 마련하지 못하여 귀한 목숨을 내던지고 물가는 81년 이래 최고의 수치로 상승하여 가난한 살림살이에 찬물을 끼얹고 있는 이 마당에,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자비와 보시의 깃발을 혼들 일이 아니고 그들의 상처는 더구나 석탄일의 축제에 이같은 아픔의 현실을 외면하고 아무런 내용도 없이 껍데기만 화려하고 현란한 일회적이고 소비적인 행사가 된다면 그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 되겠는가. 구체적으로 이런 당면한 사회적인 어둠 속에서 방황하는 중생들의 힘이 돼 주지 못할지언정 부처님이 중생들에게 어떤 마음으로 보살의 자비를 베풀었나를 생각해야겠다.
부처님이 몸은 노쇠하고 병이 들어 열반에 이르러 구시나가르로 가는 길에 밧지족이 사는 마을에서 하루 묵고 있는데 금속 세공인인 춘다가 그 소식을 듣고 저녁 때 자기집에 성자를 초대하여 공양을 베풀게 된다. 춘다는 부처님의 법체가 빨리 회복하도록 기도하며 온갖 정성을 다 바쳐 모셨다. 그런데 그딴 춘다가 올린 버섯이 독기가 있어 병이 더욱 악화되었다. 춘다는 죽고 싶도록 괴로웠다. 자기 목숨으로 바꿀 수 있으면 그러고 싶도록 고통스러웠다.
부처님은 아란에게 마지막 무우수나무가 있는 그늘에 자리를 깔게 하고 아란에게 당부한다. “춘다가 자기 때문에 내가 죽음에 드는 것이라고 괴로워하고 있다. 공양을 올린 것은 위없는 공덕이 되는 것이지 결코 잘못된 일이 아니라고, 그러니 춘다더러 나로 하여금 괴로워하지 말고 평온한 마음을 유지하라고 아란이 가서 그의 마음을 위로하여 주어라.” 이렇게 당부하신다.
육체가 소멸해가는 상황 속에서도 남의 마음을 평안케 해주기 위한 보살의 자비, 이 시대 이 땅에서 그런 마음을 바라는 것이 너무나 공허한 것일가. 그러나 부처님 오신날 하루만이라도 이런 끝없는 명화의 마음을 가져보자. 아니 이것이 관념이고 추상적인 생각이라면 또 어찌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