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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주지 법전(法傳)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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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대담 - 이철순 1990년 05월 99호
해마다 봄을 맞이하는 삼월이면 각 사찰마다 삼월불사라는 이름 아래 행사가 한창이다. 해인사도 예외는 아니어서 올해로 제30회 ‘해인사 팔만대장경 정대불사’를 4월 4일(음3월 9일)에 봉행했다.
해인사가 신라시대에 창건된 이래, 고려시대에는 나라가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을 때 부처님의 가르침인 팔만대장경을 조성함으로써 국난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닐 것이다.
선조들의 이같은 의지와 염원이 결집된 팔만대장경의 경판(經版)을 머리에 이고, 그 숭고한 뜻을 다시 새기며 법계도(法界圖)를 도는 의식인 정대불사의 봉행은 분단된 오늘의 조국 현실에서 볼 때 그 의의가 자뭇 크다고 하겠다.
사찰의 여느 행사가 그렇듯이 좀 산만하고 질서가 없어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행사에 임하는 사부대중은 한결같은 신심과 기원으로 부처님의 말씀을 삶의 지표로 삼겠다는 일관된 의지와 일념이 응집됨을 느낄 수 있다.
이번 해인사 삼월불사는 행사 전날부터 모여 들기 시작한 많은 청신남녀들과 추운 날씨 탓에 좀 고생스러웠지만 유난히 많은 깃발이 나부끼는 가운데 장엄하게 펼쳐졌다. 꽃샘바람이 시샘이라도 하듯이 깃발을 흔들어 깃발 나부끼는 소리가 청명한 하늘을 찌르며 사내(寺內)에 울려 퍼져 부처님의 법음(法音)이 온누리 가득 채워지는 듯한 인상깊은 하루였다.
행사를 마치고 주지스님과의 대담을 위해 문안을 올렸더니 연일 감기가 깊어져 몸이 편찮으시다고 하셨으나, 해인 독자를 위해 간청을 드렸더니 흔쾌히 대담에 응해주셨다.
스님은 1935년 설재스님을 은사로 해인사에서 득도(得度)하였다. 스님께서 공부하실 때만 해도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 거라고 생각하여 젊었을 때 어떤 분위기에서 공부하셨는지 여쭈어
보았다.
“젊었을 때 내가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분이 만암스님이셨어요. 내가 출가할 때만 해도 정화되기 전이어서 대처승이 절을 점거하고 있었지요. 그때 만암스님은 백양사에 계셨는데 정화에 대한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는 달랐어요. 물리적 차원에서 빼앗는 그런 정화가 아니라 본사 몇 개만 비구가 운영하여 도제 양성과 후학을 길러내는 교육적 차원에서 사찰을 운영하는 방안을 강구하셨지요.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정화가 될 것으로 믿으셨어요. 현재 정회에 대한 반성도 심심찮게 대두되는 걸 보면 만암스님의 선견지명을 따랐더라면 더 좋은
정화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당시 백양사 강원은 그 규모가 매우 컸는데 지금의 강원과는 달랐지요. 강의시간이 되면 학인들이 산중의 여러 대덕스님들과 대중 앞에서 강(講)을 하고, 그것이 끝나면 강평(講評)도 함께 하는 이른바 강연회를 혼자서 주도하는 식이었다고 할까요. 사실 몇 천 명 이상 되는 청중 앞에서 연설하는 것보다 훨씬 떨리고 부담되는 시간이었어요. 한 강원에 강사만 해도 다섯 분은 있었어요. 또 학인들이 대교와 정도가 되면 설법하는 것도 교과목의 하나로 채택하여 공부했으니 지금보다는 훨씬 강화된 교육을 받은 셈이지요. 다시 말하자면 스스로 공부하지 않고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게 하는 분위기였어요. 정규과목 외에도 일본어, 한문, 서예를 비롯해서 승려들이 할 수 있는 교양과목은 두루 섭렵했으니까 어떤 면에서는 지금보다 오히려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어요. 그때만 해도 백양사 강원을 나왔다고 하면 전국의 다른 어느 강원을 나온 것보다 더 높은 자부심과 긍지를 갖게 되고, 다른 사람들도 높이 평가해서 알아주는 시절이었지요. 근대의 많은 선지식들이 백양사에서 공부했다는 행장(行狀)이 있는 것을 보면 당시 백양사의 교육체계가 얼마나 엄격하고 충실했는지 미루어 짐작이 갈 거예요. ”
스님은 백양사 강원을 마치고는 바로 선방으로 옮겨 앉아 지금까지 선방 수좌로서 일관된 정진을 계속하셨다. 한번 자리에 앉으면 미동도 않으신 채 삼매에 빠져들기 때문에 스님의 그 수행력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런 수행자로서의 풍모가 남다른 것은 성철스님과의 인연 또한 지중한 데 그 원인이 있을 것이다. 해서 성철스님과의 인연에 대해 여쭈었더니,
“강원을 마치고는 바로 선방으로 와서 수좌로서의 삶을 이어왔는데, 큰스님과는 해방 후 줄곧 시봉을 했으니 시간적으로 45년이 넘는 세월이 되지요. 큰스님과는 문경 봉암사 시절부터 고성 문수암, 파계사 성전암, 김천 김용사 등지에서 가까이 모시고 살았어요. 또 큰스님께서 현재의 해인사 백련암으로 자리를 옮겼을 때도 계속 보필했으니 큰스님과의 인연은 참으로 지중한 편이지요 큰스님을 곁에서 모시면서 그분의 수행력을 몸소 배우고 체험할 수 있었지요. 지금도 해인사 주지직을 맡고 있긴 하지만 수좌로 살아야 한다는 게내 소신입니다.
한번은 문경 갈평 근처의 토굴에서 혼자 정진했을 때인데 큰스님께 법거량(法擧揚)을 갔다가 심하게 꾸지람을 들은 적이 있어요. 공부가 아직 멀었는데 무슨 소리냐고 호통치신 적이 있지요. 그때 어떻게나 호되게 나무라시는지 정신이 번쩍 들어 다시 마음을 고쳐먹고 계속 공부한 기억이 있어요. 큰스님은 수좌로서의 꿋꿋한 정신을 심어주기 위해 냉엄한 방법으로 공부를 지도해 주시는 분이지요 큰스님과의 인연이 남다르게 깊은 것도 다 부처님 은덕이 아닌지 모르겠어요.”
스님은 해인사에 출가하셔서 효봉스님께서 가야총림을 개설하셨을 때도 해인사에 계셨다고 하니 해인사와는 인연이 아주 깊다. 6·25 당시에도 해인사에서 수행하셨는데 공산군이 해인사까지 빌려와서 난리를 피웠다고 한다. 그때 겪은 이야기라고 하시면서 한 토막 들려주셨다.
“나는 그때 어쩌다가 공산군에게 붙잡히는 신세가 되었는데, 그들의 명령에 따라 탄피를 산 위에까지 나르는 작업을 했어요 지금은 열반에 드셨지만 송광사 구산스님도 그때 함께 잡혔어요. 이러다간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몸이 아프다고 갖은 꾀를 부려 겨우 빠져나온 적이 있어요. 범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빠져나올 수 있다는 걸 체험했어요, 그때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오싹한 기분이 들어요.”

스님은 지난 2월 28일, 4년 간의 주지 소임 임기가 만료되고 또다시 재임하셨다. 사실 이제까지 해인사 주지 4년의 임기가 다 채워지기는 해방 후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스님께서 그동안 해인사를 새롭게 쇄신시키는 데 남다른 노력을 기울이신 까닭에 이제 안정을 되찾아 해인사가 명실공히 한국 제일의 수도도량으로 수행 정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스님께 해인사의 전반적인 운영방안에 대해 여쭈어 보았다.
“해인사는 여러 문중이 모여 살기 때문에 그에 따른 문제점도 많아요. 그런 여건 속에서 대중처소가 갖는 장점은 잘 계승시키고 단점은 보완하여 좀더 체계적이고 일관성 있는 수도도량으로 가꿀 생각이예요.
해인사의 운영이 잘 이루어지고는 있지만 해야 할 일도 아직 많은 것 같아요. 그동안 보경당 및 범종불사에 이어 작년에 옛날 대중처소를 헐고 궁현당을 완공했어요 현재 진행중인 불사로 제일 먼저 해야 할 곳이 관음전을 새로 짓는 일이에요 앞으로는 관음전이 해인사의 제반 생활 중심지가 되도록 할 계획으로 있어요 관음전 과제도 남아 있고, 거기에다 올해는 꼭 해인사의 체면을 깎고 있는 화장실부터 개조해야겠어요
내년에는 이미 기공식이 끝난 강원학사(學舍) 건립에 전력을 기울여야 할 것 같아요. 승가대학이 중앙에 한곳에만 있으니 불편한 점이 많아요. 지방에도 그와 유사한 독립된 승가대학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기 때문에 해인사에도 그런 인가 받은 학교를 건립할 계획이지요. 또 다른 불사계획은 해인국민학교가 이전해 갔기 때문에 그 자리에 신도들을 위한 회관을 건립하는 것이지요. 말하자면 그곳이 포교의 중심이 될 수 있도록 꾸미는 작업이에요. 해인사가 스님들의 수도도량으로서는 별 문제가 없었지만 신도들의 교화적인 측면이 부족했던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 안에 만불전 및 박물관을 비롯하여 신도들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여 지금까지 제약을 받았던 신도들이 마음껏 기도 참선하는 데 활용할 수 있도록 개방할 계획이에요 신도들의 개인수행은 물론 단체수련을 하는 데 조금도 불편함이 없게 체계를 갖춘 회관이 되도록 할 생각이지요. 이제 곧 해인사가 한편으론 수행의 도량으로, 다른 한편으론 교화의 도량으로, 이른바 수행과 교화의 측면이 조화를 이루는 중심 도량의 면모를 갖출 것으로 기대하고 있어요”
스님은 이런 큰 불사의 진행과 함께 해인사 주변의 성역화 작업에도 남달리 힘쓰고 계시기에 그에 대해 여쭈었더니, “요즈음 해인사 주변의 마장, 삼장, 가야 등지의 땅을 기독교인들이 매입해서 기도원이나 교회를 지으려고 하는 퉁 천년 고찰 해인사의 이미지를 손상시키려고 하고 있어서 걱정이지요. 그곳의 땅을 가능하다면 불교인들이 매입해서 이교도들의 침입을 막아 천년 고찰의 역사가 하루 아침에 이교도들 때문에 균형이 깨어지는 것을 방지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내가 해인사 주지직을 맡고 있는 동안 해인사가 말로서만이 아닌 명실공히 실질적인 성역이 되도록 노력하겠어요. 그래서 천년을 이어온 수도도량으로서 사부대중이 누구나 수행정진 할 수 있는 공간이 되도록 온 힘을 다 바칠 각오로 있어요. 해인사에 들어서면 누구나 신앙심으로 충만 될 수 있도록 환경을 정비하고 그러한 여건 속에서 대중들이 부처님의 정법을 공부해 나간다면 불국토는 반드시 이루어질 거라고 믿어요.”
스님의 말씀을 듣고 나니 왠지 가슴이 뿌듯해 오는 것 같다. 이제 멀지않아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여법히 수행정진 할 수 있는 한국 제일의 수도도량의 면모가 갖추어질 것 같아 새로운 다짐과 기대가 앞선다.
이런 큰 불사를 앞에 놓고 바쁘신 가운데 대담에 응해주신 스님께 또한 깊은 감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