Ⅲ. 대각교(大覺敎) 운동의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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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탐구 - 한보광
1990년 05월 99호
1. 저술(著述)과 역경(譯經)
용성선사께서 스스로 체득한 대각(大覺)을 구체적으로 조직화하고 실천한 것이 대각교운동이라고 했다. 그렇다고 한다면 선사께서는 그 대각교운동을 어떻게 전개하였을까? 여기에 대하여 앞으로 서술하고자 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의 사상과 생각을 남에게 전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언어의 매체이다. 그러기 위해서 선사는 저술과 역경에 전력을 경주하게 된다. 선사가 저술과 역경에 착수한 것은 단순히 일시적으로 몇 권의 경전을 번역한 것이 아니라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이 일에 착수했다는 점이다. 선사는 1919년 3. 1독립운동으로 수감되었다가 1921년 출옥과 더불어 그해 9월에 삼장역회(三藏譯會)를 조직하게 된다. 이것을 조직하여 1940년 입적할 때까지 근 33년 동안 꾸준히 역경과 저술에 주력하였다. 그가 조직한 삼장역회는 훈민정음 반포 이후 개인적으로 조직한 역경사업으로는 최초이다. 물론 그 전에도 1461년에 세조가 국가적인 기관으로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조직하여 역경을 한 일은 있으나 선사와 같이 민간단체로서는 이것이 최초이다. 그때 당시 선사의 역경사업은 학계에서도 대단히 관심을 집중시켰으며 인정을 받았던 것 같다. 여기에 대해 일본의 강전준웅(江田俊雄) 씨는 그의 저서인 「조선불교사의 연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과거의 목판본이 아니라 활판인쇄 방법에 의해서 경전의 번역 출판이 계속 이루어진 것은 역자(譯者)로서 유명한 용성(龍城) 백상규(白相奎)에 의해서이다.”
그러면 선사가 많은 저술과 번역에 착수하게 된 동기가 어디에 있는지 그것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역경의 동기를 대략 정리하면 네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꿈에 부처님에게 부촉을 받으신 것이다. 선사의 「어록(語錄)」에 의하면, 14세 되던 해 10월에 우연히 꿈에서 한 암자에 들어갔는데 탁자 위의 부처님께서 이자( 字)를 쓰면서 “내가 너에게 정녕 부촉하노니 너는 명심하고 잊지 말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 꿈의 뜻을 몰랐을 뿐더러 한동안 잊고 지냈다. 그러나 그의 나이 47세 때인 1910년에 또 꿈을 꾸었는데, 14에 때에 본 그 부처님께서 “내가 너에게 전날 정녕 부촉하면서 잊지 말라고 했는데 어찌 잊었느냐’고 꾸짖어 깨어보니 꿈이었고 그는 여기서 경전을 한글로 번역하는 것이 부처님의 뜻임을 깨닫고 역경(譯輕)에 착수할 뜻을 굳혔다. 이때 선사는 지리산 칠불암에서 종주로 계시면서 안거중이었으며, 이 뜻을 도반들에게 비추니 도반들도 적극으로 권했다고 한다.
둘째 동기는, 타종교의 자극에서 오는 호법(護法)의 뜻이다. 1910년 서울에 상경한 선사는 불교의 위기감을 느끼게 된다. 시내에는 서구의 종교가 가두선전과 더불어 불교를 비방하고 배척하는 소리가 대단히 높았다. 여기서 그는 한국불교사상 처음으로 기독교와 유교를 불교와 비교해서 비평을 가하면서 불법의 정당함을 내세웠다. 이러한 저술이 바로 1914년에 저술한 「귀원정종(歸源正宗)」이다. 또한 선사는 3년 동안 옥중생활을 하면서 타종교가 한글로 성전을 번역해서 널리 읽히고 있음에 큰 자극을 받고 위기의식을 느꼈던 것 같다.
셋째는 개화와 서구 물질문명의 급진적인 전파로 시대와 사조의 변천에 맞추어, 불교혁신을 통한 새불교운동의 전개로써 일반민중을 위한 불법홍보를 하고자 함에 있다. 이러한 뜻은 또한 선사가 번역한 「조선글 화엄경」의 서문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오동나무 잎사귀 하나가 떨어짐을 보고 천하에 가을 됨을 아는 것이니 세계에 인류는 생존경쟁을 하고 경제의 파탄은 극도로 되어 가는 시대에 누가 한문에 뇌를 썩이면서 세월을 허송하며 공부하리요. 비록 수십년을 공부할지라도 한문을 다 알고 죽는 자는 없을 것이요, 다 통달한다고 할지라도 장래에는 무용의 학문이 될 것이니 무엇에 쓰리요. 현금 철학이나 과학이나 천문학이나 정치학이나 기계학이나 모든 배울 것이 많은 시대에 한문만 가지고 수십년의 세월을 허비하는 것은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또한 문명 발달의 장애물만 될 것이며 …”라고 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한문으로만 되어 있는 불교경전을 한글로 번역함으로써 시대에 맞게 불법을 전할 뿔더러 누구나 쉽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시대가 발전하고 복잡하여 학문도 세분화되어 여러가지를 많이 해야 될 이런 시대에, 누가 불교경전을 보기 위해 수십년씩 한문만 할 것이냐라고 반문한 뒤, 그러므로 쉬운 우리글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심지어 선사는 한문으로만 된 경전을 보지 않고 쌓아만 둔다면 그것은 아무리 경전이라 할지라도 종이더미에 불과하며 오물이나 다름없다고 하였다.
네번째 그는 어느 누구도 따룰 수 없으리만큼 투철한 애국자였다. 그의 애국심의 발로는 항일운동의 전개과정에서 뚜렷이 나타나 있으며, 그런 민족에 대한 사랑이 바탕이 되어 숨을 거두는 날까지 한글 번역을 하였다. 「조선글 화엄경」에 보면
“중국 사람들은 중국글을 좋아하나 우리 조선사람들에게는 조선글이 적당할 것이니 남녀 상중하가 보면 즉시 아는 것이라 보급되기 편리하리니 내가 만약 출옥하면 즉시 동지를 모아서 경 번역하는 사업에 전력하여 이것으로 진리 연구에 한 나침판을 지으리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조선인에게는 조선글 조선말로 번역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은 아마 선사의 속뜻 같아서는 중국사람은 중국글, 일본사람은 일본글을 좋아하듯 조선사람에게는 조선글, 조선말이라야 된다고 했을 것이나 그때 당시 시대적 상황이 모든 출판물을 총독부에서 검열하였을 뿐만 아니라 용성선사는 첫번째의 요시찰 인물에 해당되었으니 그 속뜻을 밝히지 못하였을 것이다.
선사는 경전의 역경이나 저술에서 반드시 대각응세(大覺應世)라던가 각기(覺紀)로 쓰고 있으며 심지어는 판권에서까지 일본연대와 함께 불기(佛紀)를 사용하고 있는 것만 보더라도 이것은 단순한 역경사업이 아니라 항일투쟁의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의 저술과 역경은 대략 네가지 측면에서 고찰할 수 있다.
이러한 선사의 역경사업은 기폰 교단으로부터 환영은 커녕 많은 비판과 반대에 부딪치게 되었다. 그 이유를 두 가지로 분석할 수 있는데, 첫째는 다소 잘못될 수도 있으므로 진선진미(盡善盡美)를 얻지 못한다는 점, 둘째는 경전을 번역하여 많은 사람이 불경을 읽고 알면 자만심이 높아져서 법사 강사를 존중하지 않으며 비구를 존중하지 아니하여 삼보를 신앙하지 않을 폐단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와같이 소심한 승려들은 불교를 자신들의 전유물로만 생각했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쉬운 한글로 번역되어 읽히는 것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선사는 여기에 굴하지 않고 30여 종류의 경전의 번역과 30여 종류의 저술을 이룸으로써 총계 60여 책을 출판하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다. 즉 역경에 있어서 첫째는 어려운 한문 경전을 한글로 번역하면서 단순한 직역이 아닌 의역으로써 번역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경전의 내용을 생생하고 생동감 있게 전달하기 위하여 대화체로 번역하고 있는 점이다. 둘째는 경전에서 계속 반복되어 나오는 중송(重頌) 등 거듭되는 말의 되풀이는 과감한 생략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럼으로 인하여 간편하면서도 쉽게 그 의미를 전달케 하고 있다. 셋째는 이해하기 어려운 불교 특유의 단어나, 또는 너무나 속화(俗化)된 불교 단어들은 새로운 이미지 부각을 위하여 새로운 단어로 교체하고 있는 점이다.
넷째는 같은 경전의 번역에 있어서 한번으로 만족하지 않을 때는2차, 3차에 이어 계속 만족할 때까지 번역을 시도하고 있는 점 등을 볼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측면에서 살펴볼 때 선사의 역경사업은 불교경전의 재구성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화엄경(華嚴經)」의 번역은 한국불교사상 최초로 번역하게 되며 그것도 2회에 걸쳐 번역했다는 점은 우리의 역경사에 길이 남을 일이다. 또 불교의식을 모두 한글로 했으며, 이러한 의식집도 출간하였으므로 그 당시는 획기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점은 오늘날까지도 실천키 어려운 일이나 선사께서는 스스로 실천하였다고 하니 대단한 사건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갈이 선사의 역경과 저술사업은 단순한 번역이 아니라 민족독립의 의지와 불교의 현대화라는 면에서 우리는 주목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