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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의 오늘과 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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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 반산 1990년 05월 99호
1. 한국불교의 현실
우리는 흔히 천육백년의 한국불교 역사와 한국 문화재 중 칠십퍼센트가 넘는 불교 문화재를 자랑하며 한국불교에 대해 자부심을 갖는다. 그러나 이처럼 유구한 역사와 찬란한 문화는 우리 세대의 불교인이 조성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현세대의 불교인은 현재 생존하고 있는 이전의 선현들이 이루어 놓은 신심과 행원의 현장에서 창출된 역사와 문화를 과시하고 있을 뿐이며, 또한 그 틀에 묶여 새로이 발견할 수 있는 창조성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첫째, 종교로서 가장 중요한 의식(儀式)의 구조는 오히려 장엄과 예식이 퇴락되었을 정도로 약식화되면서도 현실대중에 흡입될 수 있는 형식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의식은 엄숙하고 장중하여야 하는데 오늘의 한국불교의 의식만큼 산만한 불교의식도 없다고 본다.
우리 불교의 장중한 범패의식은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이제 현실에 적합하고 대중이 같이 동참할 수 있는 염불이나 의식이 연구개발되지 않는다면 불교의 의식에 별다른 흥미와 신심을 느끼지 못하는 일반 대중들은 불교를 믿는 의미를 찾지 못하고, 의식에 참여하는 기회가 낮아지면 낮아질수록 신앙적 불교형태는 점점 줄어들게 될 것이다. 의
식은 종교의 생명인 것이라 반드시 새로운, 잘 정비되고 통일된 예법이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일본과 중국은 물론 남방불교에서도 대중이 처음부터 끝까지 같이 할 수 있는 염송과 곡조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의식을 집전하는 승려만이 외우고 두드리는 예식이 너무 많아 일반 신도는 의미도 모르고 우두커니 서 있거나 앉아 있는 시간에 지쳐 의식참여를 우선 지루하게 생각한다.
둘째, 사원생활의 개선이다. 불교는 어느 나라 어떤 시대에 적용되든지 그 곳의 기본 풍습이나 그 시대의 변천에 적응하며 새로운 문화생활을 창조하여 왔다. 그러므로 각 국의 불교생활이 다르고 시대마다 생활이 약간씩 변천되어 오고 있다. 그것은 그때 그 장소에서 대중의 취향을 수순하면서 그 대중이 불교를 수용토록 되어 왔기 때문이다. 이것이 불교의 특정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 한국의 사회 모든 생활은 세대마다 빠른 변천을 가져오는 까닭에 옛날에는 사원의 생활이 비교적 사회를 앞서가고 있었으나 지금은 상당히 뒤떨어지고 있는 편이다. 불교는 사회 밖에 있어서는 종교적 기능을 다할 수 없다. 비록 산속에 있더라도 결코 사회를 떠나고 대중을 멀리하고 있다고 여기면 불교는 이미 죽은 불교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현대 사회의 시민생활이 변할 때는 사원생활도 그에 따라 변해 주어야 사회 사람들이 믿고 따라오게 된다.
셋째, 교육과정의 재정비이다. 현재 강원과 선방교육은 너무나 보수적이다. 강원은 교과목과 교수의 대폭적인 확충과 개선이 이루어져야 한다. 명실상부한 승가대학의 교육체제를 갖추어 승려의 규격을 찍어내듯 교육해야 한다. 그런데 현재 승가대학 교과목은 500년 전의 형태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으니, 승려교육에 새로운 계기가 마련되기 위해서는 강원교육의 엄격하고 충실한 틀이 짜여져야만 한다
선원도 그렇다. 옛날식 그대로의 선원보다는 많은 대중이 체계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제도가 갖추어져야 한다. 교육체계를 상·중·하로 구분하여 초심자의 교육과정과 중·상위의 교육과정을 별도로 마련하여, 기초과정에서는 선사들의 전기와 어록을 배우며 신심과 용맹심을 다지는 계기를 제공해 주어야 불퇴전의 정진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각 선원마다 지도자가 있어서 참구의 과정을 지도하고 규범을 바로 잡는 고참 납자들의 강력한 지도력이 꼭 필요하다.
한편, 신도들의 교육기관은 전무한 현실이다. 물론 각 사원이 모두 신도들의 교육장이기는 하여서 총무원이나 포교원에서 신도교육의 지침을 마련하여 변화있고 흥미있는 생활의 지식을 곁들인 신앙교육방법을 각 사찰에 제공하여 그에 의하여 교육하면 되겠지만, 현실이 그렇지 못하므로, 신도교육의 문제가 시급하게 요청되고 있다.
신도교육이 규격을 갖추어 일정 과정을 이수하게 되면 의식과 교리를 이해하고 실행할 수 있게 된다. 본래 포교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경전에도 말씀하셨듯이 부처님의 법음을 네 구절만이라도 이해하고 남에게 이해시킨다면 그 복덕이 무량무변하다고 하였으니, 누구나 불교를 잘 이해하고 실천하는 자라면 포교사인 것이다.
넷째는 불교인의 적극성의 결여가 문제이다. 승려이건 신도이건 참여의식이 투철해야만 마음이 모아지고 힘이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 불교인의 의식은 너무나 자기 중심적이고 내성적이다. 불공도 혼자하는 불공, 축원도 가장 먼저 읽어주는 것을 제일로 삼는다. 절에도 살짝 다녀오는 것을 편안하게 생각하고 우리 스님을 나 혼자만의 스님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복을 받는다는 관음·지장·신중기도 법회나 방생법회에는 많은 신도가 모이고 있으나, 진실로 자비를 실천하고 보살심을 발휘하여 참된 무주상의 보시를 하여 무량 복을 짓는 자선법회나 위문법회 등에는 동참하는 사람이 적다. 또 절에 축원만 올려놓으면 불공이 되는 줄로만 안다. 가족을 축원에 올리면 그것은 곧 신앙의 호적이나 같은 것인데, 가족의 이름은 축원문에 올리면서 가족 포교는 안한다. 이것은 너무 소극적이기 때문이다. 종교의 실천은 본인이 함으로써 복이 되고 지혜가 향상되는 것이지 남이 벌어만 준다고 복이 쏟아지고 지혜가 밝아지는 것은 아니다.
교회 나가는 아들을 위하여 절에 와서 지성으로 기도하여 대학에 입학하여도, 그 아들은 부처님의 은혜는 커녕 어머니의 은혜마저 아랑곳하지 않으니 오직 그에게는 예수의 은혜만 있을 따름이다. 공연히 힘만 낭비하고 후일에 불효자라고 원망하지 말고 우선 자식을 선도하여 부처님을 믿도록 하는 것이 불공하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무엇보다도 신도의 적극성을 배양하기 위한 신도교육이 절실히 요망되는 현실이다.
동참의식에 관해서는 승려들의 현실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부모 형제 다 버리고 왔다지만, 이것은 소아를 버리고 대아를 실현하기 위한 버림임을 알아야 한다. 가족 친지에 애착하지 않고 대중과 함께 대중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서 이 목숨 다 바쳐 수행하여 봉사하겠다는 것이 적극적 출가의 의미이다. 그런데 한국불교 현실이 산만한 원인은 승려들의 사회 참여의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입으로는 반야바라밀을 날마다 외우면서 무소득의 적극적 참여의식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시주의 은혜만 등지고 소분의 복덕만 줄어들게 된다.
그런데 현재의 스님들은 사회를 너무 좌시만 하고 있으니 불교가 시대에 뒤떨어진다는 명판을 면할 길이 없다.

2. 내일의 불교를 위한 제언
위에서 제기된 문제들을 해결하지 않으면 한국불교는 날로 소실되어 가는 문화재만 먹고 사는 껍데기 불교만 남게될 것이다.
현세대를 살고 있는 불교인이 불교의 기농을 회복하는데 적극적인 대책을 강구하지 못한다면 내일의 한국불교는 오늘보다 더 퇴락할 것이며, 내일의 불교가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면 우리는 부처님과 조사에 크나큰 죄를 짓게 된다. 그러므로 한국불교의 내일을 위해서는 승려와 신도가 과감한 의지로 새로운 도약의 개선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첫째인 의식의 대중화를 위해서는 의식의 형식은 전통을 견지하나 내용은 현대화한다. 즉 염불의 곡조나 예불의 방식은 전통을 위주로 하면서 언어는 한글화하여 염불의 내용을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 다같이 이해하도록 해야 한다. 순 한문으로만 하는 염불은 집전하는 스님도 의미를 모르고 느낌이 없이 다만 소리만 흉내내어 하는데 어찌 따라하는 신도가 신심이 날 수 있겠는가?
예불, 천수경, 반야심경 등을 한글화하여 불공이나 시식을 우리말 표기로 하면 신도들도 공감을 하여 훨씬 정성이 배가될 것이다.
둘째는 사원의 모습은 전통을 지키되 생활 내용은 현실화해야 한다. 스님들의 생활도 신도에게 완전히 개방된 것이어서는 존엄성이 없고 신성미가 없다. 숙소와 식당이 따로 있어야 하고 응접실을 응용하여 손님접대를 하도록 하며 스님들의 순수한 생활공간은 일반에 공개되거나 일반인이 출입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스님들이 수행하는 공간에는 일반신도의 출입이 통제되고, 신도들이 드나드는 곳은 완전히 현대적 시설을 갖추어 가정에서보다 편리하게 신앙 실천을 하도록 모든 생활의 시설이 개선되어야 한다. 현재 가장 시급한 것이 식당, 화장실, 목욕탕, 응접실 시설이다.
셋째는 교육의 현대화이다. 먼저 강원 즉 승가대학의 체제가 학원의 모습을 갖추고 강의실과 숙소가 분리되어야 한다. 식당, 강의실, 숙소를 겸하고 있는 현재 학원생활로서는 학인들의 창의력이나 연구생활이 향상될 수 없다. 다음은 교과목의 현실화이다. 현대사회가 필요로 하는 교리를 익혀 수행과 포교 즉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동시목적을 최대한 살랄 수 있는 교육과정이 형성되어야 한다.
현재의 승가대학 교과과정을 전국이 일률적으로 개정 조정하여 교리, 의식, 사회 모든 면을 정규과정으로 현실화시키면 승려들의 대사회적 모습이 일치된 형태로 드러나게 될 것이다.
선원교육도, 물론 참선이란 개인이 하는 것이지만, 신참 입방자를 위하여 다양한 교육과정이 만들어져서 정신적 불안을 가지고 있는 현대 산업사회의 대중들이 쉽게 동참하여 자기 문제를 선으로 해결할 수 있는 교육의 장이 만들어져야 한다.
넷째로 불교인의 사회참여이다. 적극성의 결여로 일반대중들이 선동적이고 적극적인 서양종교로 기울어지게 되어 있다. 이제 불교방송도 개국되어 부처님의 말씀이며 스님들의 목소리가 안방까지 찾아들게 되었지만, 정작 부처님께서 수행의 목표로 삼으신 괴로운 사람의 구원사업은 아직도 뒷전이 되고 있다. 스님과 신도가 한마음 한목소리가 되어 행동하면서 불교 사회복지 사업을 조속히 실현시켜야 할 때다. 고아원, 양로원, 장애자 복지사업은 너무 후진되어 있다. 사회의 소외계층을 보살피는 불교운동이 일어나지 않고서는 불교의 진정한 자비는 하나의 구두선이 되고 말 것이다.
최소한 生·老·病 死의 사고(四苦)를 대처하는 사업으로서 교육·사회복지·병원·장의사 등의 시설과 인재양성이 따라야 하며, 사후에 몸을 맡길 납골당사업도 빨리 개발 수용토록 한다면 이 땅에 불교는 영원할 것이다.
앞으로의 불교를 위해서는, 과거 수행만을 위주로 했던 사원체제가 수행과 구제사업을 같이 하는 체제로 전환되어야 하며, 종단이나 유관단체에서는 구태 의연의 껍질을 벗고 하루 속히 미래지향적 사업을 개발하는 데 정열을 기울여야 한다. 그렇게만 된다면 한국불교의 내일은 반드시 밝을 것이며 현세를 사는 불자는 불조(佛祖)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