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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 일천 강물에 비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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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편집실 1986년 07월 53호
효봉(曉峰)대선사

법상에 올라 말씀하셨다.
「사람마다 그 발 밑에 하늘 뚫을 한 가닥 활 로(活路)가 있는데, 여기 모인 대중은 과연 그 길을 밟고 있는가? 아직 밟지 못했다면 눈이 있으면서도 장님과 같아 가는 곳마다 걸릴 것이다. 보고 들음에 걸리고 소리와 빛깔에 걸리며 일과 어치에 걸리고 현묘(玄妙)한 뜻에도 걸릴 것이다. 그러나 한번 그 길을 밟으면 이른바 철통 팔달(七通 八훌)이요 백천 가지를 모두 깨달아 밝히지 못할 것이 없고 통하지 못할 이치가 없을것이다」
한참 있다가 또 말씀하셨다.
「만일 그 길을 밟고자 하거든 이익이 있거나 없거나 시장을 떠나지 말라. 이제부터 대중을 위해 용칩(用心) 할 곳을 지시하리라. 우리 선조 보리달마 존자는 인도로부터 중국에 오셔서 오직 한 마음을 말씀하시고 한법만을 전하셨다. 부처로써 부처를 전하신지라 다른 부
처를 말하지 않으셨고 법으로써 법을 전하신지라 다른 법을 말하지 않으셨다. 그 법이란 말로 할 수 없는 법이요, 그 부처란 취(取)할 수 없는 부처이니 그것은 곧 본원(本源) 청정한 마음이다. 그러므로 오늘 밤에 내 설법을 듣는 대중으로서 만일 이 마음을 밝히고자 한다면 다른 여러 가지 불법을 배우려고 할 것이 아니라, 다만 구하거나 집착함이 없기를 배워야 할 것이다. 구함이 없으면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집착함이 없으면 마음이 멸하지 않을 것이니, 생멸(生滅)이 없는 그것이 바로 부처이니라.
부처님이 45년 동안 말씀하신 팔만 사천 법문은 팔만 사천 번뇌를 상대한 것이니 번뇌를 떠나면 그것이 곧 법이요 떠날 줄 아는 그 놈이 곧 부처다. 모든 번뇌를 떠나면 한 법도 얻을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도를 배우는 사람이 만일 묘한 비결을 알고자 한다면 오로지 그 마음에 한 물건도 구하거나 집착함이 없어야 한다.
무릇 부처의 참 법신(法身)올 허공과 같다고 비유하였지만 사실은 허공이 곧 법신이요 법신이 곧 허공인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법신이 허공계에 가득하여 그 허공이 법신을 포용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법신이 비어서 밝게 나타나니 공하되 공한 것이 아니요, 공하지 않되 공한 것을 모르는 사람이다. 만일 허공이 따로 있다고 하면 그 허공은 곧 법신이 아니요, 법신이 따로 있다고 하면 그 법신은 곧 허공이 아니다. 그러므로 허공이라거나 법신이라는 견해를 가지지 말라. 허공이 바로 법신이며 법신이 곧 허공이기 때문이다.
허공과 법신의 모양이 다르지 않고 부처와 중생의 모양이 다르지 않으며 생사와 열반의 모양이 다르지 않고 번뇌와 보리의 모양도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온갖 모양을 떠나면 그것이 곧 여래 ·옹공·정변지·명행족·선서 ·세간해 ·무상사·조어장부 ·천인사·불 ·세존이니라. 범부는 경계를 취(取)하고 도인은 마음을 취한다. 그러나 그것은 다 옳지 않다. 마음과 경계를 모두 잊어버려야 그것이 곧 참법이다. 경계를 잊기는 쉽지마는 마음을 잊기는 지극히 어렵다. 그런데 요즘 도를 배우는 사람들은 흔히 마음은 버리지 않고 먼저 공(空)에 떨어질까 두려워한다. 그러므로 모색할 것이 없는 곳에서 공이 본래 공도 아닌 그것이 일진법계(一眞法界)임을 모르고 있다.
이 신령스런 각성(覺性)은 본래 허공과 그 수명이 같아서 생기는 것도 아니고 멸하는 것도 아니며,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느는 것도 아니고 주는 것도 아니다. 깨끗한 것도 아니고 더러운 것도 아니며, 방소(方所)도 없고 끝도 없으며 형상도 없고 이름도 없어서, 지혜로도 알았다 할 수 없고 말로도 통했다 할 수 없으며, 경계로도 얻었다 할 수 없고 힘으로도 미칠 수 없다.
그것은 삼세(三世) 부처님과 보살과 일체 중생이 다같이 가진 대열반(大涅槃)의 성품이다. 성품이 곧 마음이요 마음이 곧 부처이며 부처가 곧 법이니, 한 생각이라도 진실을 떠나면 그것은 모두 망상이다. 마음으로 마음을 구할 것이 아니요, 부처로 부처를 구할것이 아니며, 법으로 법을 구할 것이 아니다. 그러니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단박에 무심(無心)하면 말없는 가운데 도에 계합할 것이다.
계율과 선정과 지혜의 삼학(三學)으로써 부처가되고 조사(租師)가 되는 요문(要門)올 삼는다. 그러나 그 삼학의 문은 탐욕과 분노와 우치의 삼독(三毒)을 없얘기 위해 방편으로 세운 것이다. 본래 삼독의 마음이 없거늘 어찌 삼학의 문이 있겠는가. 그래서 어떤 조사는 다음과 같은 게송을 옮은 것이다.
부처님이 말씀한 모든 법은
온갖 분별심을 없애기 위해서다
내게는 이미 분별심 없거니
그 모든 법이 무슨 소용 있으리
또 옛 사람은,
비구가 비구법을 닦지 않으면 삼천대천세계에 침 뱉을 곳이 없느니라고 하였다. 그러나 오늘 이 산숭(山借)은 비구니들을 위해 다시 한 말 하리라. 비구니가 비구니법올 닦지 않으면 지금부터 오백 년 뒤에는 이땅에 부처님 그림자도 없어지리라.
이내 법좌에서 내려오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