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원효(元曉) 대사

다음 게시물
진리의 등불을 이어온 이 땅의 스님들 - 편집실 1990년 05월 99호
원효대사는 한국 불교 1600년 역사에l서 가장 걸출한 고승이다. 무수한 일화를 통해서나 저술에 나타난 학문적 풍모를 통해서도 스님의 넉넉한 학덕과 대승불교적 정신은 세월에 관계없이 한국 불교사에 길이 찬란할 것이다.
스님은 속성은 설(薛)씨, 잉피공(仍皮公)의 자손으로 압량균 장산 불지촌 북쪽 밤나무 숲 사리수 밑에서 태어났다. 처음에 유성(流星)이 어머니의 품 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더니 태기가 있었으며 밤나무 숲을 지나다 산기를 느껴 해산했는데 해산할 때에는 오색 구름이 온 땅을 덮었다. 때는 진평왕 39년 대업(大業) 13년 정축 서기 617년이었다.
스님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남보다 뛰어났다. 스님께서 왜 출가를 했는지 몇 살에 출가했는지는 별로 밝혀진 바가 없다. 다만 몰락한 귀족 가문의 청년이었으며 낭도였다는 등의 어렴풋한 짐작이 있을 뿐 확실하지는 않다.
스님은 출가한 후 곧 자신의 집을 희사하여 초개사(初開寺)라는 절을 만들고 또 자신이 태어났던 사리수 곁에 사라사(裟羅寺)라는 절을 만들었다. 또한 스님에게는 특별한 스승이 없었다. 간혹 낭지스님과 보덕화장이 스승이 되었다는 일화가 있고 혜공대사가 함께 법담을 나눌 정도의 고승이었다고는 하나 확실히 누구에게서 공부를 했다는 기록은 없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스님은 남달리 독창적이며 남이 따를 수 없는 혜안을 가진 듯하다. 특히 스님의 저술인 대승기신론소(疏)나 금강삼매론의 독창적인 세계는 스님께서 그 당시의 불교계를 대표하는 지성이었음을 밝혀주는 중요한 저술이다.
스님의 일화만 나오면 해골에 물 마시던 이야기와 요석공주와의 연애사건과 아들 설총의 이야기가 나오고 뱀사복이와의 일화, 혜공대사와의 일화 등은 약방의 감초 격으로 따라다나는 이야기이며 오늘날 대부분의 절이 원효대사 창건이라는 등의 사실만 보아도 그 당시 원효대사의 사회적인 영향력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스님은 일찌기 의상스님과 더불어 중국으로 유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학을 포기하고 불법이 마음에 있음을 알고 신라로 돌아온 것은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 크다. 스님은 분황사에 머물면서 화엄경소를 지음에 있어 제4권 십회향품을 끝으로 마침내 붓을 놓았다. 그것은 바로 불법이란 모름지기 몸소 실천하는 데 있음을 보여 준 좋은 보기였다.
원효대사는 고리타분한 학자적 풍모의 인간은 아니었다. 오히려 거리를 떠돌면서 불교의 본래적 모습이 사바 중생들의 마음 속에 내재(來在)해 있음을 밝혀주는 일에 더 적극적이었다. 그래서 스스로 거사도 되고 거지의 친구도 되고 여염집을 드나들면서 진흙밭의 연꽃이 되었으며 무애춤을 추며 천촌만락(千村萬落)을 떠 돌았다.
스님은 만년에 혈사(穴寺)에서 보내다가 입적에 들었는데 그 뒤 그의 유해를 분황사에 소상(塑像)으로 모셨다고 하나 전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