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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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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 편집실 1986년 07월 53호
신라 사람들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신라라는 나라는 옛부터 부처님이 사시는 땅이고, 그러므로 신라에 태어나는 것은 부처님과의 깊은 불연(佛緣) 때문에 태어난 것이라는 대단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신라 사람들은 부처님 나라(佛國)에 태어난 백성답게 살기를 원했고 언제나 부처님의 말씀대로 살기를 원했다.
옛 기록에 보면 그렇게 많은 가람과 탑을 쌓고 이룩했는데 지금도 경주의 남산은 그대로 불국토의 실현을 나타내고 있으며 불국사와 석굴암의 부처님은 천년이나 만년이나 신라 땅에서 살기를 희망했던 옛 사람들의 간절한 발원에 의하여 이룩된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 신라 사람들의 가슴에는 신라를 사랑하는 애국정신과 신라를 지킬려는 호국정신이 마음 깊이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신라의 이야기가 많이 실린 왕용집(王龍集)및 자장스님 전기 등 여러 사람의 전기에 모두 전해 오기를 「신라 월성(月城) 동쪽 용궁 남쪽에 과거 칠불의 한 분이신 가섭불(週葉佛)의 연좌석( 坐石)이 있는데 이 연좌석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이곳은 곧 과거불인 가섭불이 제세시(在世時)에 이곳에서 교화하시는 땅이며 이 연좌석에 앉아서 설법했으며, 황룡사는 곧 가섭불 당시 일곱 가람 가운데 하나이다」라고 기록해 두었다.
진흥왕이 즉위한 14년 계유년(서기 553) 2월에 월성 동쪽에 새롭게 궁전을 세웠는데 여기에서 황룡(黃龍)이 나타났으므로 왕은 이상히 여겨 궁전을 절로 만들고 이름을 황룡사(皇龍寺)라 했다. 연좌석은 불전(佛嚴) 후면에 있었는데 돌의 높이는 5, 6척이나 되었으나 그 둘레는 세 발밖에 되지 않았으며 우뚝하게 서 있고 위는 평평했다.
황룡사를 완성한 후 얼마 안 되어 바다 남쪽에 큰 배 한 척이 나타나서 하곡현 사포(河曲縣 絲浦:지금의 울산지방)에 닿았다. 황룡사는 어느 절보다도 규모가 클 뿐 아니라 지어진 연대에 있어서도 홍륜사나 영흥사 다음으로 오래된 절이었다. 진흥왕은 553년에 대궐터를 절터로 바꾼 후부터 큰 가람은 지을 수 있되 그 절에 걸맞는 부처에 대하여 깊이 궁리를 하고 있었다.
새로 큰 불상을 만들려면 많은 구리도 있어야 하고 많은 금과 철도 필요했던 것이다. 그보다도 여러 사람들이 우르러 예배하는 거룩한 불상을 조성하려면 훌륭한 기술자도 필요하고 또 훌륭한 도안도 있어야만 했다.
이런 저런 고민에 싸여 있는데 어느 날 하곡현으로부터 이러한 문서가 올라 왔다.
「지금 하곡현 실개에 낯껄고 이상한 배 한 척이 들어야 있습니다. 이 배에는 사람은 없고 많은 상자만 실려 있을뿐이온데 따로 문서 한 통이 상자 위에 있었습니다. 우선 문서만 먼저 보내옵고 배와 물건들은 군사들이 지키고 있사오니 속히 선처를 바라나이다」 하는 내
용이었다.
임금이 그 문서를 펴 보니 「서인도(西한) 아육왕(阿育王)이 누런 쇠 5만7천근과 황금 3만분을 모아 석가존상 세 불상을 부어 만들려고 하다가 세 번이나 틀에 핏물을 부었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그래서 죄와 황금을 모두 배에 실어 바다에 띄우면서 발원하기를 「부디 인연 있는 곳으로 가서 장육존상(大六尊像)을 이루어주기를 발원한다」라고 했는데 큰 종이에는 부처님상 한 분과 보살상이 그려진 모형도가 함께 들어 있었다.
곧 왕은 사지(使者)를 시켜 그 고올 성 동쪽의 높고 깨끗한 땅을 골라서 동축사(東한츄)를 세우고 세 불상을 편안히 모시게 했다. 그리고 배에 실었던 금과 쇠는 서울로 보내서 태건(太建) 6년인 서기 574년 3월에 장육존상을 부어 만들었는데 공사는 금시에 이루어졌다.
그 무게는 삼만오천일곱 근으로 황금이 일만백구십팔분이 들었으며 두 보살상은 쇠 일만이천 근과 황금 일만일백삼십육분에 들었다.
이 장육존상을 황룡사에 모셨더니 그 이듬해에 불상에서 눈물이 발꿈치까지 흘러 내려 땅이 한 자나 젖었으니 이는 진흥왕이 죽을 징조였다.
별본(別本)에 의하면 아육왕은 인도 대향화국(大香華圍)에서 부처님이 세상을 떠난 후 1백년 만에 태어났다. 그는 부처님이 살아 계실 때 태어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겨 금과 쇠 몇 조씩 모아서 세번이나 불상을 부어 만들었지만 성공하지는 못했다.
이 때 왕의 태자가 흘로 일에 참여하지 않으므로 왕은 사람을 시켜서 그 까닭을 물었더니 태자가 아뢰기를 「그 일은 혼자의 힘으로 는 성공하지 못할 것을 저는 일찍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한다.
왕은 그 말을 옳게 여겨 그것을 배에 실어 바다에 띄웠다. 그 배는 남섬부제(南關浮提)의 16개 큰나라와 5백개의 중국, 일천개의 소국, 8만개의 촌락을 두루 돌아다녔으나 모두 불상을 부어 만드는 일에 성공하지 못했다.
최후로 신라에 이르러 진흥왕이 문내림(文仍林)에서 이것을 부어 만들어 불상을 이루어 좋게 그 모양이 다 이루어지니」 이리하여 아육왕의 원이 성취된 것이다.
뒤에 자장율사가 중국으로 유학하여 중국 오대산에 이르렀더니 문수보살께서 현신해서 율사에게 감응해서 비결을 주면서 부탁하기를 「너의 나라 황롱사는 바로 석가모니불과 가섭불이 전세(前世)에 설법하던 도이니 득시의 연좌석이 아직도 있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인도의 아육왕이 누런 쇠 몇 근을 모아서 바다에 띄운 것이 I천3백여 년이 지난 뒤에야 너히 나라에 이러르서 불상이 이루어져 그 절에 모셔진 것이다. 그것은 대개 부처님의 위신력과 덕과 인연으로 그렇게 된 것이니라」라고 했다.
불상이 이루어진 뒤에 동축사에 모셨던 삼존불도 역시 황룡사로 옮겨서 안치했다. 사기(寺記)에는 말하기를 「진흥왕 5년 갑진년 서기 584년에 절의 금당이 이루어졌는데 선덕왕 때에 이 절의 첫번째 주지는 진골 환희(歡喜) 스님이었고 재 2대 주지는 자장국통應藏國統) 그 다음이 국사 혜훈스님, 그 다음은 상율사(뼈律師)였다」 했다.
이제 몽고의 난리가 있은 후로 부처님상과 두 보살상은 모두 녹아 없어졌고 작은 석가상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래서 찬(護)을 적어 둔다.
속세 어느 곳인들 참 고향이 아니리요/향화(香火)의 인연은 우리나라가 으뜸일세/이것은 아육왕이 착수하시기는 했지만 / 월성(月城) 옛터를 찾느라 그랬던 것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