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지금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다가오는 시대는 인류 역사상 큰 분기점이 될 것이다. 초능력 컴퓨터의 연구개발은 인간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인간이 이룩한 문명으로부터 스스로 소외당하며, 물질문명을 따르지 못하는 정신문화의 빈곤은 대중을 또 하나의 획일화 규격화된 유행의 물결로 몰아 세우고 있다.
이 초능력 컴퓨터의 개발은 초능력적 노예로서, 사람처럼 생각하는 컴퓨터라기 보다는 노예처럼 기억·계산하는 컴퓨터일 뿐이다. 이런 컴퓨터시대에 아직도 암기 위주의 교과과정, 사지선다형의 평가방법으로 단순한 암기를 요구하고 있다면 창조적 사고의 인간 영역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다.
특히 청소년문제는 해결해야 할 당면 과제이나 현실적 방법론에서 거의 속수 무책이다. 가정·사회와 자신의 갈등으로 인한 가출 강력사건의 주범 동의 청소년 비행은 사회에 끊임없는 충격을 주고 있지만, 그 대책이란 겉치레나 공염불에 그치고 있다.
실제로 드러난 문재 청소년의 수는 소수라 하더라도 그의 대부분의 청소년은 주생활공간을 교실로 하고 그중에서도 딱딱한 책·걸상을 한정된 공간으로 하여 진종일 무조건 외우고 정리하는 컴퓨터식 학습에 시달리고 있다. 우리 청소년들은 컴퓨터처럼 생각하도록 강요받고 있으며 가능한 많은 내용을 기억하고 빨리 계산하도록 훈련을 받고 있다.
교육을 컴퓨터 제작처럼 생각한다면 현 교육방법도 효율적이라 할 수 있다. 자기가 맡은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는 노예같은 존재의 배출이 교육에 있어 최선의 목표라면 지금의 현실도 무방하다.
그러나 교육을 통해 주체성을 가진 비판적이고 창조적 사고를 할 수 있는 미래의 시민을 기대한다면 지금의 교육풍토를 문제시하지 않을 수 없다.
획일화, 노예화된 유행의 도도한 물결은 여린 싹을 송두리 채 앗아가고 있으며 극도로 경직화된 양심주의의 폭력적 응답은 젊은 줄기를 병들게 하여 미래의 꽃을 피울 수 없게 하는 실정이다.
고교철학교육은 여린 싹의 심성을 건전하고 폭넓게 가꾸기 위해서, 또 양심주의의 유연성을 심기 위해서,청소년들의 새로운 세계인식과 건실한 생활철학을 가르치고, 슬기로 참을 바로보는 교육으로서 그 정당성을 가진다.
2. 왜 철학교육은 필요한가?
「고등학교 교육에서 철학이 필요한 것은 철학적 지식의 부족이 문제되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철학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의 개발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소홍렬의 4인 「고둥학교 철학」 머리말·대한교과서주식회사 ·서울 ·1985.
철학교육이란 철학하는(「PHILOSOPHEIN」-철학하다. 인간의 지혜를 탐구하다-헤로도토스의 「역사」에서 처음 사용) 방법을 가르치는 교육이다.
「편견과 선입견을 제거하기 위한 방법파 이를 주장한 철학자가 잘못 연결된 것은? ①대화법:소크라테스 ②연역법 : 베이컨 ③보편타당성 : 칸트 ④방법적회의 : 데카르트(86학년도 학력고사 문제)」
이와 같은 단순한 철학적 지식평가를 위한 철학적 지식축적의 교육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근세초 과학정신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중세적 사고를 과감히 벗어난 베이컨이 어떻게 사물 자체를 보려고 하였는가? 「아는 것이 힘이다」의 아는 것은 복덕방 영감의 풍부한 상식이 아니라 관찰과 실험을 통한 경험적 ·과학적 지식이며 이 옳은 지식을 얻기 위해 먼 저 잘못된 지식(엉터리 편견·환상)올 어떻게 청소하였는가? 이 편견을 우상(IDOL)이라 하여 종족의 우상·동굴의 우상·시장의 우상·극장의 우상으로 분류하였으니 우리는 어떤 우상을 가지고 있는가? 또 우상을 제거하고 올바른 지식획득의 도구로서 귀납법을 제시하였으니 그의 방법은 아직도 유효한가? 이러한 그의 한계는 무엇인가? 등을 되묻고 밝혀 새로운 길을 찾는데 그 의의가 있다.
바로 철학(PHILOSOPHIA)의 어원적 의마가 「슬기(智慧·WEISHEIT)에 대한 사랑」이며, 이는 어둠을 밝히는 빛의 뜨거운 진리애(EROS)이며, 태초의 칠흑같은 암흑을 몰아낸 말씀(LOGOS)이다. 동양의 번역(일본 도꾸가와 막부 말기~메이지 초기)인 「철학」(밝음을 추구하는 학문)은 적절한 번역이다. 빛을 숭상한(光明理世 ·박혀거세의 탄생신화) 「붉」족(韓民族)의 집단 무의식에는 이 밝음을 추구하는 진리애의 정열이 잠재해 있다고 보겠다.
이에 철학교육은 슬기로 사물·세계를 바로 보고, 되돌아 보고 꿰뚫어보고 한걸음 물러나 전체적으로 보는 힘을 기르는 교육이다.
「바로 본다」는 것은 거짓(환상·우상)을 버리고 참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베이컨의 우상)이며, 「되돌아 본다」는 것은 눈앞의 그림자에 익숙한 상태로부터 벗어나 그 근원인 빛을 되돌아보는 것(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이며 주관과 객관의 잘못된 위치를 바로 잡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칸트)이며, 꿰뚫어 본다는 것은 현상계를 꿰뚫어 본질(IDEA)을 응시하는 것이며, 어둠속에 새벽을 여는 부엉이의 꿰뚫어 봄(헤겔)이며, 한 발 뒤로 물러나 본다는 것은 경기장의 관객처럼 객관적으로 경기를 응시하는 것(피타고라스의 「경기장비유」)이며, 전쟁터의 야전병원차와 같은 것(러셀)이다. 이러한 힘은 무엇 때문에? 왜? 라는 무수한 물음을 제기하는 인간에게 가능하다. 이런 지적 호기심을 가진 인간은 비록 풀지는 못한다고 해도 내가 내게 있어 존재하는 것이 확실한 것이 되고, 세계와 자신을 관련지을 수 있으며, 관련된 세계가 자신에게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안다. 즉 「나의 생각이 비록 잘못일지라도 나는 존재한다」(SI FALLOR SUM, 아우구스티누스)이며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COGITOERGOSUM, 데카르트)이다. 이 회의할 수 없게 된 지점에서 모든 인식은 출발한다.
그런 뜻에서 철학은 「앎」 그 자체라기 보다 앎을 내다보는 물음이며, 따라서 철학에는 영원한 참고서도 없고 해답집도 없으며, 철학은 어둠을 밝히는 빛이지 어둠 앞에 드러나는 물건이 아닌 것이다. 이것이 철학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철학하는 것을 가르친다는 말을 있게 한다.
이렇게 철학하는 것을 가르친다는 것은 어린 병아리(제자의 어린 영혼)가 껍질을 깨고 나올 수 있도록 어미 닭(소승)이 쪼임을 동시에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세상을 처음 보는 어린 영혼의 놀람이 있고, 교육의 본질인 영혼의 눈뜸이 있게 되며, 혼돈 속의 거짓 앎에서 벗어나 참앎을 깨닫고, 영혼의 정화(카타르시스)로 자기 집안(영혼)을 찰 정리한 사람이 있게 되며, 완전히 자기 자신으로 돌아간 사람이 된다.
이 철학한다는 것은 비판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즉 자신이 가지고 있는 관념을 비판적으로 음미해 보는 것이다. 스스로의 가치체계를 비판적 생각을 통한 새로운 가치관 형성의 기틀을 마련하는 것으로, 비판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변증법적 사고와 변증법적 실천(PRAXIS)이 따른 것이다.
이것은 한번의 실천으로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 심화를 통한 실천으로 가능하다. 흡사 한마리의 제비가 왔다고 불이 되는 것이 아니듯이 충동적 하루의 실천으로써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아 아니다. 여기에 주체적으로 생각하는 목적의식을 가진 도덕적 행위자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존재는 현존하는 사회현실을 그대로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전면적으로 문제화하는 것이다. 현존하는 사회현실의 모순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사회현실에 비판적으로 관계하는 것이다.
사회적 ·역사적 존재인 동시에 개체적 실존적 존재인 인간은 이 세계가운데 일정한 상황에 놓여지고 역사적 ·사회적 제조건에 의하여 규정되면서도 주체적으로 이에 앞서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연과 역사의 산물인 동시에 단지 수동적으로 역사적·사회적 조건을 총체적으로 반영하는데 그치지 않고, 이를 초월하여 역사를 움직이고 역사를 형성해 가는 존재이다.
이러한 주체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철학의 중심과제이다. 그리고 사회의 모순이 존재하는 한 철학은 유효하다. 이 모순을 비판적 시각으로 바로 보고 능동적으로 해결하는 슬기를 키워 인간소외 현상으로부터 인간해방을 가져오는 학문 바로 철학인 것이다.
3. 어떤 형태의 수업이 바람직한가?
이에 관한 내용은 비교적 「프랑스 고교철학교육의 지도요령」 에 잘 나타나 있다. 이를 간략히 요약하여 소개함으로써 대신하기로 한다.
오래 전부터 교사에게는 의사발표의 자유와 교육방법의 자유와 교과서 사용방법의 자율성이 약속되었었다.
모든 논쟁점에 대해서 개인적 견해를 충분히 개진할 권리를 가지는 동시에 현혹되기 쉬운 젊은이들이 극단적 사상이나 상투어에 빠지지 않도록 중용을 지킴을 그 임무로 한다. 학생이 사색의 훈련을 통해서 자유를 배우고 사색하는 방법을 터득함으로써 지적·도덕적 생활의 기본 원리를 익혀 이 원리를 바탕으로 새로운 삶을 지탱하도록 한다. 또한 직업을 초월해서 사물을 고찰할 수 있는 자주적 판단력을 가진 견식있는 시민이 되도록 한다. 이것이 바로 철학수업이며, 철학교육의 고유한 본질적 목적이다. 부차적으로 철학적 지식습득을 들 뿐이다.
이에 교사는 추상적 전문용어와 「건성적 말만의 명석함」으로 지적유회를 해선 안된다. 일상적 언어로 현실문제를 결부시켜 철학적 사색이 현실과 별개의 것이라는 인상을 주지 말아야 한다. 당당히 「시사문제」까지도 언급하여 사회문제들을 거론하는 것이 결코 교실에 정치를 가지고 오는 것이 아니라, 자각적 의식을 키워 비판적 안목을 길러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경솔한 판단을 하지 않도록 도와 주어야 한다.
그리고 구체적 수업방법은 어디까지나 자유이나 부담스런 필기는 피할 것을 당부한다. 소크라테스식 대화수업의 전개도 좋은 방법이나 이것은 학생수가 적고 그 구성원의 지적 수준이 상당하여야 가능하며 정신적 각성에는 유효하다고 하겠다. 강연같은 형태를 취하지 말고 질문과 반론을 펼 수 있도록 해야 하며 서투른 질문에도 관심을 가져 냉담과 빈정거림으로 낙담시키지 말아야 한다. 교과서는 보조수단이다. 지나치게 집착하여 진실된 대전제를 방해하는 위험과 불편이 었올때는 과감한 재편성도 해야 한다. 그리고 학생의 자발적 정리능력올 키워주어야 한다.
철학서로 학급문고를 만들어 독서를 지도함으로써 젊은이의 연구에의 호기심을 키운다. 교사의 질문과 학생의 발표, 토의식 수업도 하여 학생의 적극적 참가로 움트는 사상을 키워야 한다. 개개 학생의 지성단련을 위하여 작문지도는 중요하다. 작문과제를 택할때 학생이 강의 내용올 새로운 견지에서 활용하여 배운대로 베껴 쓰지 않도록 한다.
단순한 기억력 테스트-「수업=문제」식은 피할 것이며, 개인적 사색의 힘을 나타낼 수 있도록 하여, 사상으로 나아가 질서를 세워 구상하고 표현하도록 단련시킨다. 17세의 젊은이가 원숙하고 왕성한 사상가라야만 주저하지 않을 문제를 첫 서두부터 주장을 내세워서 일도양단하지 않도록 한다. 그렇다고 특정한 입장과 비판적 시각을 포기해도 좋다는 의미가 아니다.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표현할 수 있는 겸허를 배우도록 한다.
그리고 철학사적 강의는 장려하지 않는다. 극도로 간략화 도식화된 철학체계의 설명은 교육적 가치를 잃어버리기 쉽다. 불가피한 피상성과 젊은이의 무경험으로 고매한 사상이 이중으로 삐뚤어지고 이해할 수 없는 신기루적 사상으로 변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또 강단에서의 형이상학적 제 언급은 젊은이의 정신에 뜬구름잡는 혼란만 초래할 뿐, 삶의 용기를 주지 못할 수도 있으니,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이러한 수업전개로 젊은이의 사색력을 높이고, 독단과 무관심에서 벗어나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적극적 상태로 이끌어야 한다.
사상과 행동에 관한 제문제 전반에 걸쳐서 그들이 살아가는 사회 ·인류전체와 일체가 되도록, 사물을 바로 보는 방법을 전수하는 일이다. 이 이상의 직무는 철학교사에게 없다.
여기서 오늘날 우리 철학교육을 살펴보면, 대단위 강연식 수업이 얼마나 요식행위이며, 철학사적 강의가 단순한 지식전수의 지루한 암기식 수업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며, 현실적 문제에 눈감은 강단의 형이상학적 논의가 얼마나 허황된 것인가를 반성해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