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사의 역사와 전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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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의 향기 - 편집실
1986년 07월 53호
해인사는 충청, 경상, 전라 삼도의 경계를 이룬 대덕산(大德、山)의 일맥인 가야산(빼椰山)에 위치해 있다. 가야산은 대덕산의 일맥인 동쪽으로 뻗어 경상도를 남북으로 나누어 북은 성주(星州), 고령(高靈) 남은 거창, 합천등 4군(四都) 사이에 의연히 솟아오른 산으로 정상(頂t)이 해발 1430m이며 그 면적 또한 3328정보에 달하는 신령스러운 산으로 천연의 단풍, 적송(赤松), 잣나무등 기타 활엽수가 울창하고 봄이면 온갖 꽃들이 피어나고 기암괴석과 그 사이로 흐르는 벽계청류(훨樓펄流)는 사시(四時)로 흘러버려 일찍부터 이름난 절승지(總勝地)의 하나였다.
옛부터 삼남(三南)의 명산 지리산과 더불어 가야산 남녁에는 만수통(萬壽洞)이 있다고 하였으며 해동의 십승지(十勝地) 중의 하나로 꼽는 명산일 뿐 아니라, 우리나라 팔승(八勝)의 제일로 해인사 계곡은 딴 산에서는 볼 수 없는 아름다운 계곡이다.
또한 가야산은 경치만 아름다울 뿐 아니라 지덕(地德)이 수승하여 전쟁이나 수혜나 바람의 재앙으로 부터도 보호처가 되며 산의 기운이 신령스러우므로 일찍부터 해인사와 같은 대도량이 창건되었고 민족의 성보(聖숲)인 팔만대장경이 봉안되었던 것이다.
또한 가야산의 이름은 옛부터 6가지로 전해 오는데 곧 가야(빼椰), 우두(牛頭), 상왕(象王), 중향(象香), 지한(只훤), 설산(雪山)이라는 이름이다.
이러한 설(說)은 옛 가람인 가야산 중턱에 있었던 소리암(廠利魔)의 기록에 나타나 있는데 「가야」라는 말은 우리말 「가람(江) 개(浦)의 뜻이라고 하기도 하고 인도의 부처님의 성도지(成道地) 붓다 가야에서 연유되었다고도 하는 바이다.
그리고 「우주(牛頭) 영산(靈山) 상왕(象王)」은 인도의 가야산의 뜻(意)에서부터 용 말이며 중향(象香)은 금강산(金剛山)에서 지한(只桓)도 금강산에서 온 것이므로 옛부터 가야산을 삼남의 금강산이라고 불러 왔던 것이다.
그리고 천년 고찰(古체)인 해인사의 해인(海印)이라는 말은 대숭경전의 최고봉인 화엄경(華嚴經)이나 기신론(起信論) 또는 망진환원판(훌盡還源觀) 등에 설명되어 있는 혜인삼매(海印三妹)에서 나온 말이다.
신라의 고승 명량(明 )의 저서 해인삼매론 제 일권에 이 말의 해설이 있으며 균여대사의 화엄교분기 (華嚴敎分記) 원통소(圓通웰)에도 해인삼매가 많이 나타난다.
이 해인은 삼매의 이름이며 그 뜻은 큰 바다 중에 온갖 사물의 그림자가 모두 나타나듯이 부처님의 지혜의 바다에 온갖 만법이 나타나므로 그를 일러 해인삼매라 하였다.
일찌기 의상(義빼)스님의 해인법계도(海印法界圖)로써 심법(心法)을 정할 제 상원(相源)대사에게 전하고 상원대사는 신림(빼樞)화상에게 다시 신림화상은 순응(順應)화상에게 전하였으므로 순응화상께서 이 해인사를 창건하시고 화엄(華嚴)의 도량(道場)이라는 뜻에서 해인사라 이름한 것이며 순응화상이 짓기 시작한 뒤에 순응화상의 고제(高弟) 이정(理貞)스님이 초창 불사를 마쳤다고 고기(古記)에는 기록되어 있다.
해인사는 신라 40대 애장왕(哀莊E) 3년 서기 802년 음력 시월 십육일에 왕과 왕후의 도움을 받아 현 대적광전(大寂光嚴) 자리에 창건되었다.
예로부터 전하는 이야기로는 이 절을 지을때 애장왕이 친히 이곳 가야산에 오셔서 비봉산(飛鳳山) 밑에 먼저 봉서사(鳳農寺:지금의 원당암)를 짓고 거기에 기거하면서 공사를 감독하며 정사(政事)도 베풀었으am로 비봉산 넘어 삼정리(三政里)엔 삼정승(三政초)이 있었고 극락전 동쪽엔 임금이 친히 마시던 샘 어수정(빼水井) 절 앞에 옥가평(澈街젤) 서쪽 십리 밖에는 말을 먹이고 세우던 마장동(馬場洞)이 있는 것은 모두 그 유적이라 하겠다.
그 뒤 해인사는 여러번에 걸쳐 중창된 기록이 있는데 신라말 930년 경에 북악파(北톰派)의 종주(宗主)로 이름이 높던 회랑(希朋)스님이 이 절의 주지로 있다가 고려가 건국될 때 고려 태조 왕건의 복전(福田)이 되어 태조를 도와 개국(開國)하게한 공(功)으로 태조의 회사를 받아 절을 중창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 조선 태조 2년 서기 1393년에 정중탑(健中搭)을 중영(重營)하고 대장경을 인경(印經)하여 탑속에 봉안했다고 하였을 뿐 절의 중창(重創)에는 언급이 없다.
세조(世租) 3년 서기 1458년에 임금이 죽헌(竹軒)에게 명하여 대장경 50번을 인경하고 신미(信眉)스님과 학조(字租)스님으로 하여금 장경판전을 시찰케 하여 판고(板庫)가 비좁고 허술하므로 경상감사에게 명하여 판전(板嚴) 40칸(間)올 다시 짓게 하였다.
또 세조 12년 서기 1468년에 세조가 세상을 떠나자 정회태후(貞熹太后)가 대의(大義)를 정하고 백성을 편하게 하니 깊은 은혜가 사방에 미쳤다.
판전이 얼마 되지 않아 기울어졌으므로 성종 l2년 서기 1481년에 학조 스님으로 하여금 절을 수리하게 하였는데 그 해에 정회태후가 세상을 떠나자 그 뒤를 이어 인수왕대비(仁牌王大紀) 두 분이 선왕(先王)의 뜻을 추모하고 정회태후의 뜻을 받들어 계속 역사를 일으켰으며 성종 19년 서기 1488년 봄에 쌀과 옷감을 회사하고 도목수 박중석(朴件石) 등을 보내어 판전 30칸을 짓고 보안당(普眼堂)이라 하였으며, 그 뒤 3년간에 160칸의 절을 완성하였다. 그 때 큰 법당의 당호를 비로전에서 대적광전이라 이름을 고쳤다. 역사(投事)를 마치고 난 뒤 9월 보름에 고승 대덕 수천명을 초빙하여 법회를 성대히 베풀고 낙성하였다.
그러나 그 뒤 수많은 인명피해와 헤아릴 수 조차 없는 막대한 손실을 우리 민족에게 주었던 임진왜란에도 화(網)를 변하였으나 학조스님이 중창한지 2백5년 뒤인 숙종 21년 서기 1695년에 불이 나서 동쪽의 여러 요사와 만월당(滿月堂) 원음루(圓音樓)가 불타고 그 이듬해 봄 서기 1696에 또 다시 불이 나서 서쪽 여러 요사와 무설전(無說搬)이 불타버리자 뇌음(雷音) 스님이 중창하고 영조(英租) 19년 서기 1743년에 큰 축대 아래의 당우(堂宇) 수백간이 불타니 그 때의 경상감사 김상성(金尙星)의 도움으로 농운(慶雲)스님이 중건하였고 또 영조 39년 서기 1763년에 불이 나자 그때의 경남감사 김상철(金尙喆)의 협조로 설파(雪被)스님이 중창하였다.
정조(正租) 4년 서기 1780년에 불이 나서 5년만에 성파(星被)스님이 중창하고 다시 순조 17년 서기 1817년에 큰 불이 나서 몽땅 타버렸는데 그때 경상감사 김노경(金홈敬)의 도움으로 영월(影月), 제월(靈月), 연월(淵月) 등의 스님네가 중창하였으니 오늘의 큰 법당은 그 때의 건물이다.
그러나 이렇듯 일곱번에 걸친 대 화재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기적적으로 대장경판전만은 무사하였으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