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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설(殘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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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에세이 - 김수용 1986년 03월 49호
우수, 경칩을 못 기다려 입춘지나기 무섭게 방정을 떨던 매스컴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함언지 병인년의 봄은 좀 일찍 찾아온 느낌이었다.
2월도 다 가던 날 볕살이 하도좋길레 나는 목적지도 없이 훌쩍 버스에 올랐다.
자유분방한 삶을 동경하면서도 천 갈래 만 갈래 인연의 끈에 묶여 떠나지 못함에니, 이 조그마한 탈출조차 없다면 아마 나논 질식을 했으리란 변명으로 머리 속을 비우기 위해 물끄러미 차창 밖을 내다 보았다.
천지에 봄이 오는 것은 공들여 보살피고 가꾼 화초보다 팽개쳐지고 짓밟힌 들풀이 먼저 안다든가
범부(凡夫)에게는 역시 무념무상의 경지가 허락되지 않는 것일까, 머리 속을 어지럽히는 온갖 잡념을 버리지 못해 담배 한 개비를 물다말고 나는 가벼운 탄성을 흘렸다.
아직도 녹지 않고 있는 눈을 보았던 것이다.
웅달진 곳은 말할 것도 없고 용푹 파진 곳, 바위나 나무 뒤의 눈은 대동강 물도 풀린다는 우수(雨水)를 아랑곳하지 않았다. 광대무변의 하늘에서 내려온 눈이, 햇살이, 어디인들 차별을 했으랴.
같은 적셜량이라도 웅달이 졌으니 더디게 녹은 곳이고, 공평하게 내련 눈이라 할지라도 바람에 몰려와 이 쌓였으니 더디게 녹는 것이고 바뀌나 나무둥걸 같은 장애물이 있어 더디게 녹음이 아닌가.
화엄초조(華嚴初租) 원효는 해골에 담긴 더러운 물을 마시고 대오각냉(大뽑寬醒) 했다지만 잔설(慶寶)은 나에게 커다란 깨달음이었다i
깨닭없이 미워하고 짜증내고 원망하고 연연해한다고 생각을 해왔는 이 세상에 원인이 없는 결과가 없구나 하는 생각이 그것이었다.
내 마음 속의 응달을 생각하지 않고 남의 차가움만 원망했다. 내 품성은 생각하지 않고 내 기준의 자로 남을 재려고 했었다. 순반 걷잡을 수 없는 웃음이 터져 따오려는 바람에 중도에서 하차했다.
매듭이 풀리지 않는다고 껑껑거린 것이 결국 내 손바닥 안에 감추어진 고를 못 본 탓이라는 사실을 그제서야 깨달았다는 통쾌함으로 해서였다.
꼴에 난 문학을 한답시고 나를 이해해 주지 않는 주위 사람들을 얼마나 원망했던가.
획은 일은 혼자 즐기고 어려운 일에 생기면 그제서야 나를 찾던 사람들에게서 얼마나 커다란 야속함을 과거엔 느꼈던가.
맥을 것을 보고 눈빛을 달리하던 친구들에게서 느꼈던 감정이 간사함이 아니던가.
굳게 닫아걸었던 마음의 빗장을 1나는 뽑았다. 요즘 태어났기에 망정이지 난세에 났더라면 을사오적 뺨칠 놈이라고 욕을 되부었던 친구에게 먼저 화해의 손을 내 밀자.내 가슴에 못질을 하고 간 사기꾼도 용서하자. 장삿속을 보였다고 발길을 끊었던 단골 술집 주인이 요즘은 어찌 지내는지 문안이나 가 보자.
불어오는 바람은 여전히 매웠지만 잔설이 말끔히 녹아 내린 내 가슴으로 봄이 먼저 오는지 갑자기 전신이 근질거려 나는 버스가 사라진 반대 방향으로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