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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과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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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에세이 - 최영주 1986년 03월 49호
사는 것이 무엇이냐. 사는데 무슨 의미가 있느냐. 그저 살아지니까 사는 것이지, 사는데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겠느냐. 아니 왜 사느냐고 묻는다면 누구처럼 웃음으로 대답하고 말겠는가 아니면 심각하게 그 해답을 찾아 보려고 질문을 받는 순간부터 고민해 볼 것인가.
70년대 초 민권운동을 하던 한 종교인이 어느날 갑자기 운동을 그만두고 공격하던 세력을 변호하는 입장으로 돌아섰다. 많은 사람들이 의아하게 생각했다. 누군가 그의 딸에게 당신 아버지는 왜 삽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 딸은 사는데 무슨 이유가 있겠어요? 하며 오히려 반문했다. 적어도 질문한 사람은 그녀의 아버지가 종교인이라는 점을 의식하고 물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딸의 대답이 이렇게 나오자 묻는 사람이 오히려 머쓱해졌다.
왜 사는가 정말 사는 데는 이유가 없을까. 주어진 생명이니까, 그 생명이 숨쉬는 한 사는 것일까.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은 누가 뭐래도 스스로 왜 사는가 하는 질문을 한다는 데 있지 않겠는가.
왜 사느냐 하는 질문보다는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삶의 방법론과 태도를 물어보는 것이 훨씬 더 쉬운 대답을 찾아낼 수 있을것 같다. 물론 그것도단순히 어떻게 살것인가 하고 묻는다면 대개의 사람들은 되는 대로 살지 뭐 하는 투로 가법게 넘겨 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나 종교인 내지 종교적 심성을 지닌 사람은 분명 심각하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를 생각하는 데는 개인적인 존재와사회적 존재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개인적 존재란 인간사회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런 존재를 의식하고 나만을 위해 살기도 하니까 앞의 전제도 어쩌면 허위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 인간은 사람들 속에서 살게 마련이다. 곧 사회적 존재를 빼놓고서는 인간을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회 속의 인간, 사회화된 인간만이 궁극적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의 의미를 추구하게 된다고하겠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인간(국민)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를 찾는다면, 일제하의 3·1운동과 해방후 3·15부정선거를 들 수 있겠다. 3 ·1운동은 누구나 알고 있는 대로 이민족(異民族)의 압제에서 벗어나려는 독립운동이고 3·15부정선거는 권력의 횡포에 순웅한 경우이다.
나라를 잃어버렸다는 극한적인 상황에서는 누구나 쉽게 애국자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그렇게 쉬운 길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회라는 전체적 구조에서 개인을 생각하기에 앞서 내 가족, 내 집안이라는 전통적 가족주의의 틀에서 벗어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소수의 선각자들만이 애족하는 길에 나서게 된다.3·1운동은 이런 가족주의를깨뜨려 버렸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남녀노소의 구별없이 민족전체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선명하게 선돼한 살아있는 신화가 3 ·1운동에서 창조됐다. 민족 공동의 목표가 설정했을 때 한마음으로 그것을 선택하겠다는 행동의 결의를 보여 주었다. 오늘 우리 민족에게 있어 이런 지상(至上)의 공통과제는 무엇일까. 그것을 발견한다면, 3 ·1운동의 신화가 재현될 수 있을까. 민족 전체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을까.
3·15부정선거는 반대로 소수의 사람들만을 빼놓고는 국민의 대다수가 권력의 포로가 되었다. 이런 선택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그 뒤에 일어난 4월혁명으로 입증되었다. 다수의 선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길로 간 것은 무슨 까닭일까.
두 사건을 살펴볼 때, 그 이변에 종교인의 역할이 있었느냐 없었느냐가 중요한 판단자료가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떻게 살 것인가를 가르쳐 주는 것이 종교다. 곧 종교가 침묵하느냐 발언하느냐에 따라 역사의 수레바퀴는 다르게 굴러간다. 종교가 침묵하는 시대는 어떻게 살 것인가의 척도도 없어진다.
3월은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하는가를 생각하게 하는 출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