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언
인간은 역사적 존재이다. 현상은 지나간 나날의 삶」에 기인(基因)한다. 현상이 괴롭고 아픈 것은 그만큼 많은 비극을 지니고 살아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슬픔의 과거를 무수히 가졌다고 해서 결코 절망할 수는 없다. 육당(六堂)은 그의 「조선역사願解歷史)」에서 미지근하고 하품나는 기록의 연속이 조선사(朝蘇史)의 외형이다. 혁명없는 역사는 인형과 같다고 했다.
이렇듯 역사의 안목이 왜곡되어 있을 때 절망은 깃든다. 하나 하나의 사실에다 다각도의 조명을 하고 나서야 스스로의 흐린 눈을 씻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란 어떠한 종교도 이념도 초월하고 순수한 민족적 신념에 입각해서 기술할 때 비로소 빛을 발하게 된다. 단제(판齊)는 이런 신념으로 묘청의 난을 다루었다. 그러기에 그는 이 난을 반란으로보지 않았고 하나의 운동健動)으로 보았다. 아마도 혁명(童命)으로까지 숭화시키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주장처럼 「조선사 일천년래일대사건(朝,群史 一千年來一大事件)」이라고 일컬올 만큼 그렇게 다대한 의의를 이 난은 가지고 있는 것일까? 본소론은 이 난의 발생과정과 그 배경을 고찰하여 새로운 의미를부여하고자 시도한 것이며 나아가 거기서 파생된 문제-민족분열의 내적원인(內的遺因)까지 규지(賴知)하고자 한다.
2. 묘청 이전의 내외정세
고려는 초기이래 문신우위정책(文百흩位政策)으로 귀족은 부패했고 여러 가지 분규가 발생하였다. 그런 대소간(大小間)의 분규는 드디어 이자겸(李資講) 대 한안인(韓安仁) 일파의 권력쟁탈전으로 발전하였다. 여기에서 승리한 이자겸은 14세의 어린 인종(仁宗)을 즉위시키고 급기야 왕의 자리를 노렸다. 이 기미를 알아차린 인종은 이자겸을 제거하고자 하였으나 오히려 그에게 발각 당하였다. 같은 일파인 척준경은 궁궐로 침입하여 송악산하 조종(租宗)의 구궁(日宮)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 인종은 그 후 이자겸과 척준경을 이간시키는 정책을 써서 그들을 각각 제거시켰다. 이렇게 국내가 소란하던 당시 국제정세 역시 미묘하게 돌아가 우리에게 조공을 바쳐오던 여진(女眞:金)이 강대해져서 요(遺)와 북송(北宋)을 짓밟고 있었다. 이때 고려에서는 금(옳)의 동향을 떠보자고 국서(圖書)를 보냈으나 금에서는 이 국서가 표(表)가 아니며 신(몸)이라 하지 않았다고 해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렇게 국내외가 혼란 되어 있을 때 묘청이 나오면서 서경(西京)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은 새로워지게 되었다. 서경은 신라말 승(傳) 도선(道談)이 지은 체도 참서(諸때讓書)의 도참사상에 의해 고려 태조이래 인종에 이르기까지 천도(훌都)의 파문을 수없이 남겼던 것이다. 서경(=평양)은 우리 문명이 발생한 곳이며 고구려의 수도이었던 곳이다. 태조(太組)는 이곳에 백성을 이주시키고 행정구획을 육부(六部)로 나누고 분사형식(分司形式:獨立行政#制)의 각기관을 두었다. 태조가 서경을 소중히 여긴 근원은 서경을북방개척의근거지로 삼으려는데 있었으며 고구려의 옛땅을 회복하면 수도를 서경으로 옮기고자 하였던 것이다. 역대왕은 태조의 유훈에 따라 자주 순주(파활)하였고특히 예종은 분사제도(分司制度)를 확립하여 중앙과 대동한 지위를 부여하였다. 이와같이 고도(古都)로써의 지위에다 서경존중사상은 서경인들에게 자부심과 애향심을 길러주게 되어 드디어 천도운동(選都運動)의 대류(大流)를 형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묘청의 출현
묘청은 서경의 승려로서 같은 서경인 정지상鄭知常)의 천거로 인종을 만났다. 그는 인종에게 고하기를 개경(開京)은 궁궐이 다 불타 기업(基業)이 다 쇠했는데 이제 새로이 서경 임원역(林原願)에 왕기(王옳)가 있으니 이어(移細) 하여 상경(上京)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 금국(金圖)이 항복할것이며 36국이 모두 신첩(百훌)이 될 것이라고 했다. 이와같이 불가(佛家)의 승려로써 도참사상과 정치적 혁신사상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인종 10년(l132년)에 서경 임원역 대화궁(大華宮) 안에 팔성당(八聖堂)을 설책하였는데 팔성이라 함은 국내명산의 수호신과여러 부 님 가운데서 한 위(位)썩 추려 각각 배합한 것으로 불빠에서 이르는 본적셜(本遊說)에서 나온 것이다. 그 예를 들변 호국빽두악(護圖白짧熾) 태백선인(太白仙A)은 백두산의 호국신이며 문수사리보살(文珠舍利홈훌)왜 분신이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것은 민족고유신앙힘 산신숭배(山補뿔拜)와 불가(佛家)및 도가적사상(道蘇的思想)이라고 할 수 있다. 묘청은 정치적 혁신을 꾀하여 부패와 타성에 짖은 개경귀족을 물리치고 서경민의 북도적(北道的) 기질속에서 칭제건원(稱帝建元)과 금국정벌을 기도했다. 고려는 태조와 광종(光宗)때 「광덕(光德)」이라 건원(建元)했으며 샌뀌나 발해, 태봉(泰封)이 연호(年號)를 세웠었다. 또한 보려는 일찌기 칭제건원(稱帝建元)과 같은 성질의 용어인 짐縣) 소(훌집), 제(制) 및 폐하(隆下)와 묘호(蘭號)륙 썼으나 송(末)이나 요(遭)가 그에 대해 간섭한 일조짜 없었다.
또한 당시 금(옳)이 홍기하여 북송(北宋)이 망한 틈을 타서 각기 소국가가 제멋대로 칭제건원을 하고 있던 때다. 더구나 일개 속국이었던 여진(女흉l이 형제의 예(禮)니 신하의 예(禮)니 하고 국서(법書)조차 받아들이지 않았으니 묘청의 주장은 당시 고려민의 대금감정(처金感情)에다 부채질을 한 셈이다. 이뽑게 당연한 칭제건원의 주장에 대해 대금(大金)이 노하여 일이 일어난다고 반대했던 김부식(金富軟) 및 개경배족의 의도는 그들 자신의 이해관계 때문이었다. 그들은 묘청의 주장이 받아들여졌을 때 반대해 왔던 자씬들의 세력이 약화될 것을 두려워했다. 그들은 그들 신의 권력유지를 위해서 사대사상(事大思想)을 취했피 역사상
의 전례(前例)를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이 같은 역사악(歷씻惡)의 되풀이에 의해서 그후 우리 홉상은 멍들고 상처입게 된 것이다. 묘청은 인종 5년베 인종이 서경에 순주(파활)했을 때 상주(上奏)하여 「빠신의 교(維新의 敎)」를 중앙에 포고(布告)하도록 핵였다. 이런 유신정책(維新政策)은 개경 궁궐이 모두 뿔타 버린 후 서경에서 새로이 국가의 안녕과 태평을 푹모하자는 제안이었다. 인종 6년에 인종은 묘청 일파인 김안(金安)에게 명하여 서경 임원역에다 궁궐을 경영(옳當)케 하였는데 김안은 겨울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역사를 독촉함이 매우 심하여 당시 고려인민의 원망이 매우 컸다고 한다. 이로부터 묘청에 대한 비난의 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으며 잇달아 천변재해(天잦淡害)가 무수히 일어나 묘청배척의 여론은 격렬하게 되었다. 거기에다 대화궁(大華宮) 건룡전(乾龍嚴)이 낙진(落震)의 재앙을 입게 되어 이것을 개경귀족에게 좋은 구실이 되었다. 이와 같은 재난들은 대화궁 창건에 대한 흉조로 여겨져 세인(世A)의 불신과 의혹을 샀다. 묘청의 목을 베자는 상주(t奏)가 빈번하게 나타났다.
4. 묘청의 거사
묘청은 잇달은 천변(天變) 개경인들의 끊임없는 반대 그리고 인종자신의 서경순주단념(西京逃道短念)으로 인하여 자기의 목적이 좌절된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조정에 대해 위협적인 수단을 취하7l로 결심하였던 듯하다. 인종 12년 가을 묘청은 서경분사(西京分司) 사제소향(司帝小鄭) 안중영(安件榮)과불사爛事)로서 사람을 모아 일을 일으켰다. 그리고 분사시랑(分司持郞) 조광(趙흩) 둥과 더불어 거사를 주도하고 서경내에 있는 개경인온 모두 잡아 가두었다. 분사내(分司內) 여러성(城)의 군사를 풀어 군사행동을 서둘렀고 개경으로 가는 모든 길을 차단하였다. 또한 국호를 「대위(大뚫)」 연호를 「천개(天開)」라 하고 그의 군사를 「천견충의군(天遺忠義軍)」이라 하였다. 여기에서 묘청이 연호를 세운 것은 그가 평소에 주장했던 칭제건원의 발현이었다고 볼 수 있지만 국호를 「대위」라고 정하였다는 것은 이 거사의 성격을 규정하는데 있어서 모호한바가 많다. 왜냐하면 이 난이 발생한지 3개월후인 인종 l3년(1135년) 2월에 왕이 이 일에 대해 다음과같이 추회(追悔)하였다.
「(上略) 股方成於聽從, 彼(妙淸) 홉不知 日 有樓於忽望 단興軍馬 因廠官員 以天開表其年元 以忠義號其軍銀 公然、徵集兵쭈意‘欲陸 上都」
이 소서(認홉)에서 알 수 있듯이 국호 「대위」에 관해서는 조금도 언급치 아니하였던 것이다. 난후 3개월이면 묘청이 분사시량 조광에게 죽은지 1개월 후 인 것이다. 인종 13년 1월4일에 난의 소식이 개경에 알려 줬었고 1월7일에 토명회의(討平슴議)가 열리었으며 그 소식을 들은 조광은 1월22일에 묘청을 죽였다. 3월 왕의 소서중에 국호에 관해서 언급이 없었다는 것은 묘청이 죽은 후 조광이 다시 반(飯)하였을 때 「대위」를 사용했다고 추측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난의 초기 성격을 파악하는데 있어서 묘청은 계획적으로 반陳)한 것이 아니라 다만 유약한 성격을 가진 왕에게 하나의 경종을 울리고자 하였다고 볼 수는 없을까? 묘청이 죽은 다음 대의명분이 없어진 이 난은 서경인 대 개경인의 감정싸옴으로 변질되어 「반항을 위한 반항」의 허망한 싸움이 되어 버렸다. 이런 반항정신은 난의 토명에 1년 2개월이란 긴 세월을 요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5. 결 어
묘청은 한시대의 의지를 관철하고자했었다. 그는 자기를 실현하고 자기시대를 실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는 부패와 타락에 젖은 정국(政局)을 쇄신하고 혁신하여 고려인에게 진취적 기상을 불어넣어 주고자 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실패로 돌아가고 난의 중심인 그마저 죽었을 때 모든 양상은 달라지게 된다. 이 난은 우리나라 역사상 남도인(南道A)과 북도인 여의 투쟁이라는 면에서 최초의 점을 찍을 수 있다. 서경의 행정조직이 중앙정부와 대동하였기 때문에 크게 일어났고 또 오래 끌 수 있었다. 따라서 난 후 서경의 지위는 떨어졌고 일반 민중사이에서는 북도인(北道A) 멸시의 경향이 짙어갔던 것이다. 이리하여 북도인은 역사의 뒤안길로 들어서게 되었고 항상 중앙정부에 대해서 날카로운 칼을 갈게 되었다. 이런 반항의 주류는 이시얘(李雄愛) 이팔(李叭) 홍경래(洪景來) 난으로 이어져 이조 후기의 민중주동으로 까지 발천하였던 것이다. 더구나 최근세에 있어서 이조가 이 지방에 차별적 격절주의(隔總主義)를 취하였기 때문에 이 지방민들은 만주 시베리아로 국경을 넘었고 그들의 2세들이 볼쩨비키로 무장되어 조국에 돌아왔다. 이어 북한 정권을 수립 했던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정권이 쉽게 토착화된 원인은 아마도 그들이 오랫동안 소외당했던 정권에의 욕망이 영합하였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더욱 동족상잔의 참극까지 거리낌없이 감행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데서 어느 정도 감지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지금 그들은 그들의 정권을 합리화시키기 위해서 스스로 고구려 정통(正統)을 내세워 남한과의 슬픈 대결을 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