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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神)은 앉는 데에만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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뜰앞의 잣나무 - 동봉 1989년 12월 94호
남악회양(南嶽懷讓, 677-744)의 산하에 한 구도자가 찾아왔다. 의복은 비록 남루하였으나 기풍은 매우 늠름하였다. 홍주강서(洪州江西)의 마조도일(馬祖道一)이었다. 그의 시호는 대적선사(大寂禪師)이다. 남악은 마조를 첫눈에 알아보았다. 그가 충분히 불법을 강당할 만한 그릇임을 간파한 것이다. 그만큼 마조는 뭔가 특출한 면이 있었다.
당시 남악회야의 문하에는 수많은 납자들이 남악의 심인(心印)을 받고자 모여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육조 혜능(六祖慧能)대사의 양대 제자인 청원행사(靑原行思)와 남악회양의 한 사람으로 불법의 정맥을 이어온 조사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오는 납자들 모두가 남악과의 면접에서 합격한 것은 아니다. 그만큼 조사와의 면접은 엄격하고 까다로왔다. 요즈음 대기업에서는 ‘몇명 채용에 몇 명 응시’라는 식의 채용 범위가, 즉 모집인원이 전체 응시자의 몇 퍼센트쯤 되자만 남악회양의 경우는 달랐다. 충분히 불법을 감당할 만한 그릇만을 받아들여 교육하고 있었다. 그 숱한 경쟁자를 제치고 마조는 당당히 합격한 것이다. 그리하여 전법원(傳法院)에 나아가 늘 좌선정진(坐禪精進)을 하곤 하였다.
하루는, 근기가 순숙함을 알고 남악은 마조의 좌선하는 처소에 나아가 물었다.
“대덕은 좌선하여 무엇이 되고자 하는가?”
마조가 대답하였다.
“네, 큰스님, 저는 좌선하여 부처가 되고자 합니다.” 남악은 아무말 없이 뒤꼍에 가서 벽돌 하나를 주워다가 마조가 좌선하는 앞에서 돌 위에다 문지르기 시작했다. 마조는 정신이 흐트러졌다. 궁금증이 부쩍 일었다. 그래서 곧 물었다.
“큰스님께서는 지금 뭘 하시는 것입니까?”
“음, 이 벽돌을 갈아서 거울을 만들어 보려고.”
마조는 웃음이 나왔다.
“벽돌을 간다고 어찌 거울이 되겠습니까?”
남악은 기회주의자였다. 이때다 하고 되물었다.
“그래, 좌선을 한다고 어찌 부처가 되겠는가?”
이때 마조의 머리를 스치는 어떤 아찔한 느낌의 순간이 있었다. 마조는 다시 물었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소수레를 몰고 간다고 가정하자. 그때 만약 수레가 가지 않으면 소를 때려야 겠는가, 아니면 수레를 때려야겠는가?”

물론 여기서 마조도일의 좌선과 남악회양의 마전(磨塼), 즉 벽돌갈기가 모두 방편이요, 실상이 아님은 사실이다. 그러기에 마조스님이 좌선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요 수단이지 목적은 필경 아니며, 남악회양이 벽돌을 가는 것도 마조를 깨우쳐주기 위한 방편이지 실제 벽돌을 갈아 거울을 만들고자 했던 것은 아니다. 다만 마조의 집착을 떨어버리기 위함이다. 선(禪)이란 좌선만을 고집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남악의 마전과 마조의 좌선은 뭔가 이가 맞이 않는다. 비유가 들어맞질 않는다.
벽돌은 수천 수만년을 문질러도 거울이 될 수 없겠으나 부처가 되는 방법 가운데 좌선은 가장 훌륭한 노선이기 때문이다. 즉, 부처를 이루는 데서 우선 그 마음을 가다듬어 심일경성(心一鏡性)의 세계로 들어가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좌선이 가장 적합하기 때문이다. 즉 좌선은 부처가 되기 위한 방법 중의 하나로서 가장 대표적이라고도 하겠으나 어쨌든 가능성을 갖고 있지만 벽돌은 제 아무리 간다해도 거울이 이루어질 가능성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도에서 남악의 비유가 완전히 옳다고는 볼 수 없다. 만약에 그 비유가 옳다면 전혀 가능성이 없는, 즉 성불을 가능성이 없는 좌선을 뭣하러 하겠는가. 벽돌을 갈아 거울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좌선이 성불과 전혀 무관한 것이라면 지금 이 순간에도 깊은 산사에서, 토굴에서 좌선을 하는 선승들, 납자들은 시간만 낭비하고 있단 말인가.
남악회양이 마조도일에게 일침을 가한 것은 반드시 맞는 비유를 가져다 했다고는 할 수 없다. 다만 선(禪)이란 좌선만이 전부가 아님을 알려 주기 위한 것이다.
성불의 지름길이 선이라고는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그러기에 경전을 읽다가 깨친 사람, 염불을 하다가 부처가 된 사람, 어록을 읽다가 대오각성한 선승들도 있고, 자연의 음성을 듣고서 깨달은 사람도 있다. 낙엽지는 모습을 보고, 대나무에 돌이 맞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샛별을 바라보고, 선문답을 하다가 깨치는 사람도 있다. 기연은 가지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오로지 좌선만을 고집하는 수선자(修禪者)도 있다. 이것은 그 방법이 틀려서가 아니라 그 외의 방법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는 배타적 성격의 한 단면을 드러내는 결과밖에 되지 않는 것이라 하겠다. 「금강경(金剛經)」에서는 ‘무유정법
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 (無有定法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라 하였다. 즉 어떤 고정된 틀 속에서 벗어난 완전한 해탈법, 완전한 자유 그 자체, 자유라는 관념의 틀조차도 벗어난 대자유의 세계, 그것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이다. 다시 말해서 최상(最上)의 진리란 뜻이겠다.
우상이란 성모마리아상(像) 이라든가 불보살님의 상을 숭배하는 것만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를 통하여 그 이면에 자리하고 있는 본질과의 만남을 이루고자 하는 지극히 당연한 방법론적인 과정일 따름이다. 실제로 어떤 의미에서 보면 고집이야말로 큰 우상이라 아니할 수 없다. 물질문명이 고도로 발전해가는 현단계에 있어서 경제적인 구조와 정치적인 힘이 가장 거대한 우상으로 자리하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교회라든가 인원의 동원력이 얼마나 큰가에 비례하여 교세를 가늠하는 것 역시 밖으로 드러난 상(相)에 초점을 맞추어 우상화하는 것일진대 그것은 부와 조직의 우상이다.
우상이란 밖으로 드러난 현상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현상을 자기의 마음으로부터 얼마나 과장되게 집착하는가에 있다. 며철 전 막을 내린 MBC 미니시리즈에서 한 시골의 저수지 감독관이 완장에 집착하여 실제 마음 속의 완장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을 우
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치솟는 빌딩, 비대해져 가는 큰 기업, 한집 건너 하나씩 세워가는 교회, 그러한 것들을 감탄과 부러움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마음이 우상이다. 그것은 겉모양일 뿐이지, 결코 내면의 실상이 아니다. 그런 것으로 극락을 가고 천당엘 가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은 아무리 섬겨 봐야 실제 그 마음에 득될 일이 아무것도 없다. 다만 그것은 방편으로써만 필요할 뿐이다. 목적과 방법은 분명 다르다 방법이 목적이 될 수는 없다. 좌선은 부처가 되기 위한 방법이지 부처 그 자체일 수는 없다. 벽돌이 거울이 될 수는 없지만 가는 행위〔磨事] 그것은 그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좌선만에 고집하면 부처를 보지 못할 것이요 가는 행위에만 집착하면 거울을 볼 수가 없을 것이다.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앉는 모습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을 가라앉혀야 한다. 잉크와 종이로 이루어진 성서라든가 물질로 이루어진 십자가를 신주 모시듯 하면서 마리아상이나 불보살 또는 단군상이나 산상, 신상을 모시는 다른 단체, 다른 종교를 우상이라 일축해버리는 우를 범하는 기독교도들처럼 좌선에만 고집하여 간경이나 염불, 주력 등으로 수행하는 이들을 낮추어보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좌선에 대한 우상이니까 말이다.
남악은 마조에게 말했다
“그대는 좌선을 배우는가 앉은부처〔坐佛〕를 배우는가? 만일 좌선을 배운다면 선(禪)은 앉는 데 있지 않고 만일 앉은 부처를 구한다면 부처는 일정한 형상이 아니다. 그대가 만일 앉은 부처가 된다면 부처를 죽이는 일이요, 죄선에, 앉는 데에만 집착한다면 이치에 도달할 수 없다. 머무는 곳 없는 법에 대하여 취사심 (取捨心)을 내지 말라.”
길을 가다가 혹은 지하철 안에서, 또는 시장에서 꼬마아이가 스님들이 지나가면 ‘부처님, 부처님’ 하고 합장하는 모습을 본다 이때 아이의 엄마는 ‘부처님이 아니고 스님이야!’ 한다. 여기서부터 부처와 스님에 대한 분별이 시작된다. 뭔가 안다는 데서, 배움이라는 것을 통해 의식의 분열이 시작된다. 움직이는 부처가, 살아서 펄펄 뛰는 부처가 스님이 된다. 부처님은 법당 탁자 위에 가만히 앉아 있는 분만이 가능하다. 부처님은 고정형이다.